‘원조 꽃미남 엔터테이너 김원준’ 극심한 생활고, 안타까운 비행기 추락사고 알려져…

김원준은 원조 꽃미남으로 비주얼 때문에 인기가 많다는 선입견이 있었고 음악적인 실력에 대해서 높이 평가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데뷔곡인 ‘모두 잠든 후에’는 데뷔 전 학창시절 만들었던 곡이고 자기 노래의 대부분이 자작곡이며,

김원준은 무려 300곡이 넘는 자작곡을 남기고 있는 싱어송 라이터입니다.

김원준의 이미지로 보면 평생 꽃길만 걸어왔을 것 같지만,모든 사람의 인생엔 굴곡이 있듯이 그의 인생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심지어는 죽을 고비와 심한 생활고를 겪기도 했습니다.

김원준은 1973년생으로 2022년 기준 우리나라 나이로 50세라는 얘기인데, 실제 나이보다  20년 정도 더 어려 보이는 엄청난 동안 입니다.

김원준의 고향은 서울 서초구로, 그의 으리으리한 집안이 화제가 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의사인 아버지가 지나치게 엄격하게 훈육했다고 합니다.

데뷔 초 일간 신문에 연재된 어린시절 회고를 보면 의외로 굉장히 우울한 성격이었다고 밝혔습니다.

유학기 때 놀이 상대는 오로지 강아지와 자전거였으며 너무 소심한 성격탓에 주위 사람들이 자폐증 걱정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고교 시절에는 4인조 아마추어 밴드 쥬크박스를 결성해 활동했고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울예술대학의 재학 중에 음악 활동에 심취하게 됩니다.

예술대학교는 1학년부터 오디션을 많이 보는데 유재석과 91학번 동기인데 유재석은 대학 입학하자마자 대학 개그제에 입상해서, 그를 부러워했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1992년 선배가 한 오디션을 추천했는데 광고 모델을 뽑는다고 알려줬는데,

그 광고가 바로 추억의 ‘카운트다운’ 광고로 당시 제일기획에서 개최한 가수 오디션에 합격한 것입니다.

당시 제일기획에서는 참신한 신인 가수를 발굴해서 음악과 cf를 동시에 선보여 유행을 만들어가는 파격적인 광고 전략이 수립되어 오렌지라는 레이블로 음반 사업을 시작했고,

cf 전속 모델을 겸하는 신인 가수를 발굴해내는 과정에서 김원준이 뽑힌 것 입니다.

이 오디션에서 불렀던 노래가 자작곡인 ‘모두가 잠든 후에’입니다.

제일기획은 곧바로 김원준의 데뷔 앨범 제작에 착수했고 동시에 카운트 다운 광고 촬영과 음반 녹음을 수행하는 등  짜여진 계획 속에서 데뷔를 준비시켰습니다,

결국 김원준은 오디션 합격 후 단 45일이라는 단기간에 cf 모델과 가수로 데뷔하는 기염을 토했으며,

데뷔 앨범 타이틀곡 ‘모두 잠든 후’에는 가요차트 1위를 차지하면서 대박을 터뜨리며 성공적인 데뷔를 했습니다.

1993년부터 각종 지상파 예능 프로그램에도 적극적으로 출연해서 당시 mbc 대표 예능 프로그램인 특종 tv 연예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습니다.

당대 최고의 개그우먼 이영자와 함께 영화 보디가드를 패러디했는데, 큰 화제를 일으키며 김원준의 인지도는 전 국민 아이돌로 급상승하게 됩니다.

그리고 1990년대 초중반의 대표적 문화 현상이었던 x세대의 아이콘으로 등극하며 대중적인 인기를 크게 얻기 시작했습니다.

1993년 2집에서 록과 댄스 등을 절묘하게 결합시킨 자작곡 ‘언제나’를 타이틀곡으로 활동, 1집 때와는 사뭇 다른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골든디스크 본상, MBC 10대 가수상, KBS에서는 올해의 가수상을 수상하는 등 오디오와 비디오가 결합된 가수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이어 1994년 30대의 인기가 절정이었는데 신드롬을 불러 일으키는 등 인기를 이어가면서 가요 톱텐에서 5주 연속 1위 골든컵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1995년에는 배우로도 영역을 넓혀 KBS 드라마 창공의 주인공으로 활약했고, 드라마의 주제곡인 세상은 ‘나에게’도 김원준이 작곡해 불렀습니다.

김원준은 1990년대 광고 모델로도 왕성한 활동을 하며 당시 패션 유행을 일으킬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 그는 싱어송 라이터로 아티스트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빠지게 되면서,

따라 부르기 쉬운 대중성을 버리고, 과감하고 새로운 시도를 통해 음악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앨범 프로듀싱을 하는 바람에 대중에게 외면 받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앨범들은 전성기만큼의 인기를 얻지 못하면서 최고의 톱스타로서 지위는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그의 전성기도 차츰 저물어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김원준은 생명을 위협하는 사고를 당하기도 하는데,

1998년 708동 초 방송 때문에 화성에서 경비행기를 탔다가 갑작스레 경비행기가 추락하게 되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사고 당시 기절하여 응급진료 후 후송되어 서울 세브란스에 입원했으며,

팔과 다리 목 등에 골절상 약한 장파열 등이 발견되어 일주일 정도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김원준 씨는 그런 몸 상태에도 무리한 퇴원 후 팔과 목 깁스를 하고서 미리 짜여진 스케줄을 소화하는 등의 투혼을 발휘했습니다.

게다가 1999년 병역 문제에 연루되면서 이미지에 큰 손상을 입었습니다.

의혹의 주요 내용은 김원준이 아버지의 뇌물로 면제 받은 게 아니냐는 내용 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사 결과 대가성이 없다는 판단과 수차례의 공개 재검을 통해 습관성 어깨 탈구를 동일 사유로 면제 판정을 받으며 의혹을 벗었습니다.

그러나, 전성기 시절 벌어놓은 전 재산을 털어 만든 스튜디오를 운영하면서 직접 음반 제작까지 참여하게 되었는데,

6집 음반 발매 이후에 계속된 실패로 결국 정규 9집 발매 후에는 생활고에 빠지며,

전성기 시절 좋아하는 모델을 종류별로 사놓았던 많은 자동차, 적금과 부동산도 정리하면서 재산은 밑바닥을 드러내게 됩니다.

결국 그는 재개하기로 마음을 먹고 2002년부터 전국 을 돌며 행사를 뛰었고, 드라마에도 출연하는 등,

물불을 가리지 않고 연예계 활동을 하면서 재기에 어느 정도 성공하게 됩니다.

시간이 흘러, 김원준의 결혼은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맛집 동호에서 지인의 소개로 만나게 되어, 처음에는 상대방의 직업을 서로 잘 몰랐다고 합니다.

김원준씨의 이내는 검사 이은정 검사.

공부만 했던 사람이라 TV를 거의 안 봐 김원진을 잘 알지 못했다고 하며, 박소연을 닮은 미녀 법조인으로 더욱 화제가 되었습니다.

결혼하고 9개월 후인 2017년 첫 딸을 낳아 아빠가 되었는데, 김원준은 딸을 슈퍼맨이 돌아왔다 해서 공개하기도 했습니다.

아내 바보,딸바보로 유명한 그는 안정된 상태에서 평범하고 행복하게 사는 게 자기의 소망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던 중 2012년부터 현재까지 강동대학교 실용음학과 교수로 재직 중에 있으며 동시에 학과장직도 맡고 있습니다.

즉 교수로서 고정적인 교직원 월급을 받게 되어 소망을 이룬 것입니다.

현재 mc,드라마,뮤지컬,예능 등 가리지 않고 출연하고 있으며, 홈쇼핑 게스트로 출연해 상품을 소개하기도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어린나이 초고속으로 스타덤에 올랐지만,

나태하지 않고, 현재까지도 다방면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는 김원준씨의 앞으로의 행보도 기대가 되며 응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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