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륜 져버린 모친도 모자라..” 이제야 드러난 안정환 父의 충격적인 정체, 48년동안 숨겨졌던 그의 진짜 핏줄…하늘도 무심하구나..

어쩌면 이렇게 불우한 가정사가 또 있을 수 있는지 참으로 기고합니다.


문제 많은 모친도 모자라 태생조차 비밀로 얽혀 있던 안정환은 48년 만에 공개된 부친의 정체로 인해 또 한 번 바람 잘날 없는 시간이 시작됐습니다.


수려한 귀공자처럼 생긴 외모와는 달리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안정환을 떠올리면 워낙 유명한 모친의 빚투 논란은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축구스타 안정환의 모친인 안금향 그녀는 지금까지 웬만한 유명 인사 못지않게 항상 언론과 대중들에게 큰 화제를 몰고 온 인물이었죠.


이런 와중 현재 안정환의 모친의 정체와 더불어 한 번도 공개되지 않았던 안정환의 생부에 대해 그야말로 충격적인 사실이 알려져 다시 한 번 엄청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일단 안정환에 기구한 가정사에 대해 다시 한 번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판자촌에 살던 소년

안정환 모친은 미혼모의 몸으로 자식을 키우다 결국 도박빚에 쫓기는 바람에 아들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던 일화는 막장 드라마에서 나올 법한 이야기였죠.

안정환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모친 없이 외할머니와 외롭게 성장하는 등 그가 종종 매체에 밝힌 유년 시절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눈물겨웠습니다.

사실 안정환의 집안은 처음부터 가난했던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외갓집이 원래는 잘 살았던 편이어서 한창 부유했을 적에는 큰 어려움 없이 자랐지만, 안정환이 6살이 되었을 때 외갓집이 사업 실패로 어려워지는 바람에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요.

어머니가 외할아버지의 유산으로 커피숍을 하다 쫄딱 망한 뒤 다른 곳을 떠돌아다녔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안정환은 외할머니와 판자촌에서 빈곤하게 살아야만 했었습니다.

흑석동 판자촌에서 학창시절을 보내게 된 안정화는 배가 너무 고파서 무랑 배추서리를 하거나 굿판을 돌아다니면서 음식을 얻어먹었고, 옷이 없어서 남의 집빨래를 훔치는 것은 기본이었죠.


게다가 산에 흙뿌려진 삐라를 주어서 미군 부대에 신고하며 학용품을 마련했다고 합니다.

또한 절간에서 방생 기간이라도 되면 방생되는 물고기를 잡아서 다시 되팔아 돈을 마련하고 버스를 타고 가야 될 거리였던 학교를 항상 차비가 부족해 늘 걸어서 다녀야 했죠.

그마저도 한 푼이라도 더 아끼려고 학교 체육 창고에서 잠을 해결했다고도 합니다.

이렇게 가난에 시달리고 지쳤던 어린 안정환은 하루는 심각한 표정으로 할머니에게 말하길 “100만 원만 주세요 나가서 아버지를 사 올 겁니다”라고 말하여 할머니를 오열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안정하는 얼굴도 한 번 보지 못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살아왔는데, 그는 차두리를 보며 항상 부러워했던 게 바로 차범근이 아버지라는 사실이었다고 합니다.

안정환의 할머니는 그가 축구를 하는 것을 처음에는 엄청나게 반대했는데, 가뜩이나 잘 못 먹는 환경이라서 체력이 받쳐주지 않을까 봐 걱정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안정환은 먹을 게 필요해서 축구를 선택했던 것입니다.

축구부가 되면 간식으로 지급하는 빵과 우유를 먹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단순이 또래 애들보다 달리기가 조금 빠르다는 장점을 내세워 축구부로 들어가게 됩니다.

굶주린 배를 잡고 시작했던 축구부 생활은 후원하던 선배가 졸업을 하면서 지원이 끊겨버리며 하루아침에 축구부 폐지가 되어 이때 엄청난 상실감을 맛봤다고 하죠.

하지만 다행히도 안정환을 주목했던 다른 학교에서 그를 스카웃하겠다는 제의가 들어옵니다.

그렇게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축구를 했지만 선배들의 상습적인 구타와 엄청난 훈련으로 인해 여전히 고달픈 생활들에 지치며 불행을 피할 수 없었다고 하는데요.

한 번은 축구 보원 숫자대로 지급했던 빵과 우유 중 하나가 비자 선배 한 명은 안정환을 무려 3시간 동안이나 구타를 했다고 하죠.

하지만 한참 뒤에 복귀한 다른 선배가 “그거 내가 먹었는데 “라고 말해서 누명이 벗겨지자 그 길로 분하고 억울한 마음에 합숙소를 도망친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듯 청소년 시기인 안정환은 축구부를 밥 먹듯이 도망치고 끌려오길 반복했는데 본인이 말하길 “이 시기에 축구가 즐거워서 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고백합니다.


이때 싸움도 많이 하고 다니던 시절이라 실제 조직폭력배에서도 스카웃 제의를 받았다고 하죠.

그리고 쉬는 날에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용직 아르바이트 공사판을 전전해야 했는데, 당시 수도권 전철 5호선 목동역 건설이 이루어질 때 안정환은 인부로 투입되어 벽돌을 쌓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힘들게 축구를 해나가던 고교 시절 무렵 안정환은 축구에 대해 엄청난 두각을 나타냈고, 이를 바탕으로 대우의 자본으로 운영된 아주대학교에 진학을 하게 되었죠.

그리고 안정환은 프로축구단의 거액으로 입단하는 대학교 선배들을 보고 대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반드시 축구로 성공하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합니다.


안정환의 이름이 각인된 건 1997년 이탈리아 유니버시아드 직후였는데, 그는 돌아오자마자 경기 후반에 투입되어 혼자 2골 1어시스트를 하면서 1대 2로 지던 팀을 5대 2로 역전승시키며 전설적인 일화를 만들어내죠.

이로 인해 아주대학교의 재단이었던 대우그룹의 부산대우팀으로 입단하게 됩니다.

하지만 안정환은 프로에 입단하고 잘 나가는 국가대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영표의 보약을 뺏어 먹는 등 어려운 생활을 계속 이어나갈 수밖에 없었다고 하죠.

왜냐하면 자신을 키워준 할머니에게 아파트를 장만해줬고, 어머니의 도박 빚을 대신 갚아줬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유명한 안정환의 빚투 논란은 모친이 안정환을 뒷바라지한다는 명목으로 수억을 20년 동안 받지 못했던 한 사업가의 폭로로 시작됩니다.


그러나 안정환의 모친은 변제는커녕 각종 도박 및 사기로 추가적인 엄청난 액수의 빚을 졌고, 결국 교도소에 수감까지 되며 자식의 명성에 계속 먹취를 이어갔습니다.

가스라이팅을 당했던 안정환은 아들이라는 이유로 모친의 모든 빚을 갚아주어야 했고요.

오죽했으면 모친은 도박 빚에 쫓겨 도망다니느라 자식의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했고, 안정환은 이런 모친에 대한 집요한 보도와 억측에 시달리다가 결국 분노를 터뜨립니다.

“낳아준 어머니지만 언제 배웠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물론 누군가에게 돈을 빌려준 사람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제게는 연락도 없이 그저 안정환이라는 이유 하나로 계속해서 빚투 보도가 나오는 것에 대해 솔직히 자괴감이 든다”라며 자신의 심정을 밝혔었죠.

이어 “어머니께서 아들 훈련 및 양육을 명목으로 빌리신 돈 중 실제로 제가 받은 지원이나 돈은 한 푼도 없었다”


“가끔은 내가 그런 금전적 지원으로 잘 먹고 더 좋은 조건에서 운동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훌륭한 선수가 되지 않았을까라고도 생각해 봤다”라며 어머니가 자신을 위해 돈을 빌려갔다는 그런 명목은 모두 거짓이라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미우나 고우나 안정환이 모든 빚을 다 해결해 준 덕분에 모친 안금향은 출소한 후 절에 들어간 뒤 속세와 인연을 끊겠다는 등 언론 플레이도 했었지만, 앞서 언급된 2019년 빚투 보도가 또 터져나오며 생전에 안정환의 부친에 대한 얘기도 재조명을 받게 됩니다.

그의 진짜 핏줄

안정환은 사실 성장 과정에서 부모님과 큰 인연이 없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에 대해 말하길 “난 아버지 얼굴도 모른다”

“대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할머니와 옥탑방에서 살았다”라고 밝혔지만, 공개된 안정환의 생부에 대한 충격적인 얘기는 다음과 같이 이어집니다.

안정환의 모친은 “지금껏 남편에 대한 얘기를 한번도 꺼내지 않았다”

“그동안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남편의 존재를 처음으로 털어놓겠다”며 공개한 안정환의 생부에 대한 충격적인 얘기는 다음과 같이 이어집니다.


우선 안정환의 부친과 모친의 만남은 1975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안정환의 모친과 부친은 서울 명동에서 처음 만나며 인연이 시작됐습니다.

모친은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친구와 명동을 거닐다가 우연히 중학교 때 수학 선생님이었던 안정환의 생부를 만난 것이죠.

오랜만에 만난 이 스승과 제자는 명동 2층의 중국집에서 반가움을 나눴는데, 그 이후 모친이 부친의 하숙집을 알아내며 자주 들러 사랑의 감정이 싹텄다고 합니다.


그 후에 안정환을 임신했는데도 양가 집안의 반대가 심해 결국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고 동거부터 시작했다고 하는데요.

그 와중 안정환이 태어났다고 합니다.

이에 양가 부모님들은 ‘아이도 낳았으니 결혼식을 하는 것이 어떻냐?’고 했고, 결혼날짜도 잡았지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습니다.

안정환의 아버지가 폐암(급성폐렴)으로 인해 세상을 뜬 것입니다.

그렇기에 안정환은 살아생전 부친에 대한 기억이 없던 것이었죠.

정식으로 결혼을 올리지 않은 상황이라 친가 쪽에서 손자인 안정환을 책임지길 거부했고, 어쩔 수 없이 모친인 안금향은 자신의 오빠 호적에 안정환을 입적하였기에 안정환은 원래 성이었던 장 씨가 아닌 안 씨성을 갖게 된 것입니다.

안정환의 모친은

“정환이에게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도 해주지 않고 살아온 게 두고두고 후회가 됩니다. 정환이는 정환이대로, 남편은 남편대로 둘 다 한이 맺혔을 것 같아요. 그래도 남편은 정환이에게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제 꿈속에 나타나서 아들을 보살폈어요. 언젠가 한번은 꿈에 나타난 남편이 ‘정환이가 배가 아픈가 봐’하고 말한 후 사라지길래 다음날 아침에 합숙소에 전화를 걸었더니 정환이가 전날 먹은 것이 체했다고 하더라고요.”

“부산 아이콘스 소속이었던 정환이가 한국선수로는 처음으로 이탈리아 프로축구단 ‘페루자’에 진출할 때도 남편이 꿈에 나타나 다섯 개의 유니폼 중 하나를 골라서 손에 건네줬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페루자’의 유니폼이더라”

“아버지가 지켜줬기 때문에 지금의 정환이가 있지 않겠느냐”라고 밝혔습니다.


사실 이런 사정을 감안하면 미혼모로 아들을 키웠던 사정은 딱한 게 사실이었죠.

안정환의 주장과 달리 모친 안금향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안정환을 키우기 위해서 식당 일을 하며 힘들게 돈을 벌고 살았고, 시합이 있거나 학부모 모임이 있으면 누구보다 열심히 참석했었다”


“이렇게 평생 정환이만 바라보며 뒷바라지를 하고 살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정환이가 스타가 되고 나니 엄마로서 할 일이 없어졌고, 안정환이 식당 일마저도 못하게 해서 우두커니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들이 많았다”


“시간은 많은데 아들인 안정환은 늘 연습 때문에 바빴었기에 홀로 남겨진 집에 있으면 뭔가에 짓눌리는 것 같은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시끌벅적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찾아다니게 되었는데 그게 하필 도박장이었다”


“안정환의 모친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대우를 해주고 관심을 가져주니 그게 그렇게 기분이 좋고 힘들게 살았던 시간을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그러다 계속 발을 끊을 수 없게 되어 결국 이러한 결과를 초래했다”고 고백합니다.

이처럼 자녀 양육을 소홀히 했다는 안정환의 주장과 일평생 안정환을 돌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던 모친 안금향의 주장은 그야말로 180도 대립된 주장이라 누구의 말이 사실인지는 판단하기 힘들지만 분명한 건 부친의 안타까운 별세로 인해 양측 모두가 고통의 시간을 겪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운명에 맞선 안정환은 행복을 되찾았고, 운명에 낙담한 모친은 불행을 벗어날 수 없었던 거죠.

불운한 환경으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이 안정환의 인생을 보며 희망을 얻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