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울어’ 천재 가수 배호 사망 직전 마지막 유언 공개! 前 매니저의 충격 증언과 이제야 드러난 진짜 사망 원인

우리나라에 수많은 훌륭한 가수가 있지만 최고의 작곡가 신중현 씨, 박춘석 씨 등과 평론가들이 가장 극찬한 가수.

하지만 안타깝게 29살에 요절한 불세출의 가수 배호 씨를 아시는지요?

가왕 나훈아 씨가 존경하는 유일한 선배라고 하는데요.

그의 명곡 중 하나인 <누가 울어>는 원곡 가수의 노래는 물론, 장윤정, 임영웅, 양지은, 진해성 정동원 등 후배가수들의 커버도 아직까지 큰 인기를 끌고있습니다.

배호 씨의 일생을 알아보다가 저도 모르게 눈물을 줄줄 흘리고 말았습니다.

살다 살다 이런 얘기는 처음입니다.

그는 죽어가면서도 노래를 불렀는데요.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요?

또한 그의 사후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는데요.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독립운동가의 아들

먼저 그의 부모님 얘기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놀랍게도 독립군의 자손이었습니다.

우리 역사에 씻을 수 없는 비극은 독립군들이 살아생전 조국과 민족을 위해 자기의 안위를 버리고 목숨을 내걸고 싸웠건만 말로가 좋지 않았고, 더 비극적인 것은 그 자손들마저 아주 비참한 삶을 살았다는 것이죠.

그의 아버지의 존함은 이름도 거룩한 배국민이셨습니다.

아버지는 원래 평안북도 출신의 부유한 집안으로 일본 동경대에 유학까지 다녀온 엘리트였습니다.

나라를 위해 중국에서 독립투쟁을 하며 광복군으로 활동했는데 대위 출신이었다고 하죠.

그렇게 중국에 계시는 동안 아이를 낳게 되었는데, 배호 씨는 우리나라가 아닌 중국 산둥성에서 태어납니다.

호적상으로 1942년에 출생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해방 후 배호 씨가 3살이 되던 해 아버지는 가족과 함께 조국으로 돌아왔는데, 조국의 실상은 그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내몰았습니다.

일본이 전쟁에 패망에서 물러났는데 아직도 나라는 친일파 천국이었어요.

즉 나라의 주요 관직들을 여전히 친일파들이 잡고 있었던 것이죠.

당시는 미 군정이었는데 미국이 나라를 운영하기 편하다는 이유로 친일파 관료들을 그대로 쓴 것이었습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미국과 소련에 의해 신탁 통치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는 두 동강이 날 지경에 이르게 되었죠.

목숨을 걸고 나라를 위해 싸웠던 독립군들의 희망과 반대로 나라의 운명이 흘러가자 울분에 가득 차게 된 배호의 아버님은 폭음을 하다 그만 간경화로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1955년 어린 배우의 나이 이제 겨우 13살 때였죠.

어머니는 일제 치하에서 평안북도 신의주에 위치한 보성여고를 나올 정도의 신여성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먹고 살기 어려워진 어머니는 배우 씨와 여동생을 데리고 부산에 언니가 있는 곳으로 내려가 귀가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어머니는 허리가 크게 안 좋아 극심한 통증을 견디기 위해 아스피린을 한 움큼씩 먹어야 할 정도로 건강 상태가 심각했습니다.

결국 어린 배호는 어머니의 약값과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소년 가장이 되어 중학교를 중퇴하고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천부적인 재능

그 후 어릴 적부터 음악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고,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던 그는 어머니의 권유로 외삼촌을 찾아 서울로 상경하는데요.

그의 음악성은 모예 쪽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의 외삼촌들은 당시 유명 방송사였던 동양방송 문화방송의 악단장이었어요.

삼촌에게 드럼을 배운 그는 1958년 그의 나이 16살부터 당시 유행하던 미 8군 무대에서 활동하는데요.

드럼을 치면서 노래를 불러 작은 화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1963년 21살 때 그는 음반을 내며 정식 가수로 데뷔하게 되는 그때 불렀던 노래는 당시 인기 장르인 트로트가 아닌 재즈, 라틴 음악이 섞인 스탠다드 팝 계열의 곡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했어요.

나중에 사람들은 “그의 첫 데뷔곡부터 그의 운명을 불행하게 만들 곡이었다”며 비통을 금치 못했습니다.

첫 데뷔곡의 제목은 굿바이였죠. (그의 마지막 곡 이름은 더 충격적입니다)

수 년간 그는 계속 드럼을 치며 가수를 부업으로 하는 생활을 이어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작곡가가 그의 집까지 찾아왔는데, 배호 씨의 음반을 듣고 그의 가능성을 캐치한 배상태라는 작곡가였는데요.

배호 씨를 무명에서 한순간에 최고의 가수로 만든 <돌아오는 삼각지>라는 곡을 들고 온 것이었습니다.

당시 배호 씨는 신장병을 앓고 있었고,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로 몹시 아파 누워 있는데 작곡가가 집까지 물어물어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배호 씨는 노래를 부를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거절했으나 작곡가의 끈질긴 설득 끝에 결국 노래를 하기로 해요.

어머니는 작곡가한테 “아픈 사람한테 이러는 거 아니다”라며 반대했지만 배호 씨가 수락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죠.

그는 돈이 없어 이혼하지 못했고, 무명 가수의 생활은 비참해서 점심과 저녁을 굶은 채 무대에 서는 일이 허다했다고 합니다.

그는 돈을 벌어야만 했어요.

그렇게 노래를 부르게 되었는데 극도로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숨이 가빠 호흡이 짧아져 노래를 제대로 부를 수가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악보에 없었던 많은 쉼표를 집어넣고 나서야 노래를 녹음할 수가 있었어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게 그의 노래를 오히려 더욱 애절하게 만들었다고들 하죠.

이 노래는 대한민국을 뒤흔들었습니다.

이 노래가 뜨면서 그전에 불렀던 배호 씨의 노래들도 덩달아 떴고, 후속곡으로 내놓은 <안개 낀 장춘단공원>, <누가 울어> 등도 줄줄이 성공하면서 가장 짧은 기간에 가장 많은 곡을 히트시킨 1960년대 당대 최고 인기 스타가 됩니다.

그가 불렀다 하면 히트된다고 할 정도였어요.

무엇이 이토록 사람들을 열광시켰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먼저 그의 노래는 당시 사람들의 심정을 그대로 대변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많은 고통을 겪은 세대였죠.

일제 치하와 6.25 전쟁을 모두 겪은 가장 불행한 세대 인간에게 원초적으로 가장 큰 고통을 안겨주는 것이 배고픔인데 하루 세 끼를 다 먹기가 힘들었죠.

그런 당시 우리 민족의 한과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해 주는 것이 그의 노래였습니다.

대부분 배호의 창법을 이렇게 표현하죠.

흐느끼듯 가슴 절절한 창법..

이런 그의 비통함은 바로 당시 우리 국민들의 심정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는 아주 매력적인 저음으로도 정평이 나 있는데요.

소리공학 연구를 하는 진 교수는 배씨는 저음부터 고음까지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고 한 음절에 두 옥타브가 있으며 노래 속에 여러 옥타브를 왔다 갔다 한다고 해요.

즉 저음부터 고음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여자보다 더 날카로운 고음을 낼 줄 안다고 하죠.

이런 소리를 낼 수 있는 가수가 거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비슷하게 흉내낼 수는 있지만 절대 그의 노래를 똑같이 할 수가 없다고 해요.

이렇게 풍부한 성량에 기가 막힌 자신만의 창법을 구사했고, 또한 처음에 드럼을 배웠기 때문에 그 리듬감이 아무나 따라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23살의 악단을 이끄는 드럼 명수이기도 했죠.

이런 것들이 전부 총망라되어 그는 단순한 대중가수가 아니라 예술인이 되었습니다.

또한 그의 노래는 트로트라는 전통 가요의 틀 안에서 외국 노래의 분위기가 풍기는 아주 오묘한 매력이 있는데 들어보시면 고개를 끄덕이실 겁니다.

그의 노래에 대해 당대 최고의 작곡가들은 극찬을 했는데요.

그들이 하나같이 “이런 가수가 다시 나오지 않는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불세출의 가수라고 칭하죠.

특히 신중현 씨는 “그의 노래에는 창작성이 있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작곡하고 작사하는 사람만 창작하는 것이 아니라 시키는 대로 노래 부르는 것이 아니라 그는 노래에 혼을 불어넣어 창작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노래에 대해 가장 힙한 표현도 있는데요. ‘건방지게 멋있다’ 아 진짜 이 말이 딱 맞는 것 같습니다.

이 사진도 정말 건방지게 멋있는데요.

60년대에 이런 포즈와 스타일이 나온다는 게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하늘이 내린 사람이었어요.

요즘은 많은 문명의 혜택들을 받기 때문에 좀 더 수월하게 음악을 할 수 있지만 당신은 아무것도 없는 가장 못사는 나라에서 이런 천재가 탄생했다는 것이 너무나 경이롭고 신기하기까지 합니다.

특히 배호 씨는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않아서 그런지 악보를 볼 줄 몰랐다고 하는데요.

천재적인 청음 능력으로 순전히 귀로 음악을 듣고 멜로디를 익혔다고 합니다.

그리고 수없이 노래를 부르면서 흥얼거리면서 수없이 가사를 되뇌이며 자신만의 창법과 감정으로 노래를 예술의 경지로 올려놓았습니다.

예로부터 흥과 끼가 뛰어나 예술적인 감수성이 뛰어난 우리나라 민족은 그 못 먹고 못 살았던 시절에도 그를 알아보고 라디오에서만 듣던 그의 노래를 직접 보고 그를 직접 보고 싶어 더욱 그의 인기가 폭발했습니다.

최고의 자리에서…

그런데 그에 대한 폭발적인 사랑은 역설적으로 그를 죽이고 맙니다.

무리한 일정에 건강이 좋지 못한 그의 지병이 도지게 된 것인데요.

일부 사람들은 돈에 눈이 먼 매니저가 아픈 글을 여기저기 끌고 다녀서 그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하는 얘기를 하기도 이에 대해 한 증언이 있습니다.

그의 매니저는 당시 유명했던 작사가이자 매니저였던 전우 씨였는데 그의 아들이 훗날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들이 중학생 때 아버지와 배호 씨와 함께 차를 타고 공연장으로 가게 되는 일이 있었는데 차 안에서 이런 말이 오갔다고 해요.

몸이 좋지 않아 차 안에서 기침을 많이 하는 배호 씨에게 전우 씨가 “공연을 취소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자 “팬들이 기다리는데 그럴 수 없다”고 하며 괜찮다고 배호 씨가 고집을 부렸다고 합니다.

이렇게 인격마저 훌륭했다고 주위의 평가가 자자했던 그가 갑자기 극장쇼 약속을 펑크 내고 사라지는 일이 발생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난리가 났고, 신문에 연일 대서특필로 그의 잠적이 다루어졌어요.

알고 보니 그가 쓰러져 병원에 입원 치료 중이었어 3개월간 입원했는데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마지막 곡 작업을 했고, 그때 만든 노래가 <마지막 잎새> <0시의 이별>이었습니다.

참으로 그의 죽음을 암시하는 듯한 노래 제목이죠.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실제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병원에서 퇴원한 그는 다시 무리한 일정을 강행합니다.

서 있지도 못할 정도일 때는 의자에 앉아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 동료 가수들의 부축을 받으며 노래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사회자의 등에 업혀 노래를 부르기도, 2절까지 부르지 못해 1절만 부른 날도 적지 않았어요.

더 심한 날은 레코드를 틀어놓고 그 옆에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고 해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할 정도로 열광했고, 반대로 그의 목숨은 꺼져가고 있었습니다.

결국 그는 기어이 다시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는데, 그때 배호 씨는 병상에서 이런 글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의 글은 한 편의 문학 작품을 보듯이 너무나 아름답고 슬퍼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그 글에서 ‘자신은 4대 독자이며 앞으로는 어머니의 바램대로 노래 부르지 않고 조용히 살겠다는 말도 하는데, 기력이 없고 자꾸만 잠이 온다’고 하면서 죽음을 애견했습니다.

병원에서 이미 늦었다는 암시를 들은 어머니는 교인들의 말에 설득되어 그를 퇴원시킵니다.

현대의학으로 안 되면 신앙의 힘으로 그를 살려내자고 한 것이죠.

그렇게 그를 자택으로 데리고 가던 도중 그가 차 안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 함께 동석했던 작곡가 배상태 씨의 증언에 의하면 그가 차 안에서 완전히 의식을 잃기는 했지만 그때까지도 맥박이 뛰고 있었다고 합니다.

차 안에서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고 해요.

집에 돌아와 많은 사람들의 찬송과 기도 속에 결국 맥박이 멈추었습니다.

그의 죽음에 대한민국은 큰 슬픔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특히 그를 따르던 수많은 여성 팬들이 장례식에 소복을 입고 찾아와 장례식장은 통곡의 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는 끝까지 결혼을 하지 않은 미혼이었습니다.

사실 별세하기 전 한 여성 팬과 약혼까지 했다고 하는데요.

그가 입원해 있던 병상 곁에는 1년 동안 떠나지 않고 간호해주던 7세 연하의 여성이 있었다고 합니다.

배호보다 7세 연하였으니 1949년생으로 당시 나이는 22세였습니다.

그녀는 대구 공연 때 배호의 팬으로 만나 배호와 장래까지 약속한 사이였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그를 병원에서 지극 정성으로 돌보았으나 죽음을 예감한 그는 그녀에게 죽기 하루 전에 차고 있던 반지와 시계를 주면서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얘기합니다.

배호는 한사코 안 가겠다고 울부짖던 그녀를 폐가 끊어질 듯한 고통을 참으면서 설득해 눈물로 고향에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그녀의 미래를 위해 그렇게 한 것이었죠.

당시 두 사람의 심정은 말로 표현이 될 수 없었을 것이입니다.

그녀가 살아있다면 지금 대략 70대 초반의 나이일 것인데요.

어느 곳에선가 지금도 배호 노래를 들으며 살고 있을지도 모른겠네요.

그런데 그는 왜 이렇게 죽어가면서까지 노래를 불렀을까요?

죽어서도 노래를…

사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노래를 그만두기를 원했습니다.

그의 건강 상태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는 이미 학업을 중단한 중학생 때부터 집안의 생계를 책임진 가장이었습니다.

그에게 노래는 즐기는 것이 아니라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한 유일한 방편이었어요.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살기 위해 죽기 살기로 일한 것처럼 그도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노래를 부른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 당시에도 연예계는 치열해 하루가 멀다고 신인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고, 그가 병을 치료하기 위해 너무 긴 공백기가 생기면 어렵게 얻은 이 인기와 돈을 한순간에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도 있었다고 합니다.

몸이 편찮으신 어머니와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여동생 당시 우리 부모님들이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 자신을 돌보지 않고 희생한 것처럼 그도 어머니와 동생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던 것이죠.

가족을 위해 죽을 때까지 열심히 일하다 죽은 가장이었습니다.

그의 정확한 사인은 겹친 과로로 인한 신장염 합병 증세였습니다.

그 당시 의술이 지금보다 훨씬 떨어지기는 했지만 충분히 쉬었더라면 이렇게까지 빨리 돌아가시지 않을 수 있었다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더욱 애통해 했습니다.

특히 그는 어머니를 편히 모시기 위해 13평짜리 아파트에서 번듯한 2층 양옥집을 마련했는데 그 돈을 갚기 위해 쉬지 않고 노래를 부른 것이었어요.

호적상으로 1942년에 태어나 1971년에 돌아가셨으니까 그의 나이 겨우 만 29살에 세상을 떠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가장 인기 절정이었을 때 하늘의 별이 되었는데요.

그의 가족의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의 사후 그가 벌어서 마련해 준 집이며 재산을 어머니가 보증을 잘못 쓰는 바람에 다 날리고 여동생은 오빠를 잃고 큰 충격에 그만 정신질환이 오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그의 묘소 곁에 어머니와 여동생이 나란히 잠들어 있습니다.

그렇게 그의 핏줄은 그만 끊기고 말았죠.

그의 사후 아주 보기 드문 일이 벌어지기도 하죠.

그가 마지막 유언으로 “나는 죽어서도 노래를 부르겠다”고 했는데요.

그가 돌아가시고 난 후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별세 후에도 수십 년 동안 그는 놀랍게도 국민들이 가장 사랑한 가수였습니다.

1981년 MBC 특집 여론조사에서 가장 좋아하는 가수 1위가 되기도 했는데요.

이런 현상은 90년대까지 이어졌어요.

이에 그의 인기를 노린 가짜 배호들이 등장했습니다.

음반사들은 무명 가수를 내세워 목소리를 녹음하고, 겉포장에 배호의 사진을 걸고 음반을 발매했습니다.

음반사는 그를 위해 명복을 빌어주기는커녕 그를 돈벌이 수단으로만 이용했습니다.

이러한 고질적인 음악계의 병폐로 인해 시간이 지날수록 배호 씨가 점점 잊혀졌죠.

너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제 그를 기억하는 분들은 거의 중장년층으로 60대 이상이라고 하는데,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배호 씨의 열렬한 팬으로 자처하는 아나운서 김동건 씨가 배우 가요제를 추진해서 아직도 열리고 있고, 그와 끝까지 의리를 지키는 팬들은 그의 기일에 아직도 함께 모여 합동 추모제를 지낸다고 합니다.

또한 대한민국을 넘어 해외까지 그의 진가를 알아보는 사람들의 팬클럽이 수십 개에 이른다고 하죠.

가수는 역사와 시대를 대변한다고도 하는데요.

그는 흘러간 가수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흘러나온 가수이며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독립투사의 아들로 사람들을 위로해 주는 최고의 노래를 선사하고 떠난 국민 가수이자 민족 가수로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전문가들이 전 세계를 통틀어 이런 훌륭하고 위대한 가수의 박물관이 하나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하는데요. 여러분 생각은 어떠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