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원에서 자고, 지렁이를 잡으며..” <고교 얄개> 배우 이승현, 도망치듯 캐나다로 떠난 후 충격적인 근황…어쩌다 이렇게까지..

개그맨 김국진은 “인생은 롤러코스터와 같다”라는 말을 했는데요.

인생에는 너무나 좋을 때도 있지만 하염없이 나쁠 때도 있다는 말인데요.

<고교얄개>라는 작품으로 유명한 이승현의 인생을 보면, 롤러코스터가 따로 없습니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큰 성공을 거둔 사람도, 또 그 후에 실패해서 그와 같이 밑바닥을 친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이승현의 인생사는 아마 많은 다른 사람들에게 타산지석이 될 것 같은데요.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원조 하이틴 스타 


영화배우 겸 탤런트 이승현은 1961년에 태어납니다. 

그는 6살이었던 1966년 영화 <육체의 길>로 데뷔하여 꼬마 신랑 김정훈과 더불어 아역 연기자로 크게 주목을 받았는데요.

사실 그가 아역배우로 데뷔하게 된 것은 우연이었습니다.

이승현의 어머니는 “승현이의 첫 영화는 6살 때였어요”

“당시 조긍하 감독(육체의 길 연출자)께서 저희집 옆에 있는 여관에 묵고 계셨어요”

“그런데 우연히 승현이를 보시곤 출연을 권유하시더군요.”라고 이 때를 회상했습니다.


이승현의 부모님은 처음에는 아들이 연기하는 것이 탐탁치 않아했다고 하는데요.

이승현은 연기에서 굉장한 재능을 보입니다.

이전에 연기를 배운 적도 없지만, 천연덕스러운 그의 연기는 실로 타고난 수준이었습니다.

요즘도 아역 배우들도 많지만, 당시 이승현의 연기력과 견줄 수 있는 배우는 거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연기력을 선보였죠.

1977년 아역배우로 활동하던 이승현은 <고교 얄개>라는 작품의 주인공이 되는데요.

이승현은 당시에 대해  “<고교 얄개> 주인공을 뽑기 위해 오디션을 했는데 참여했던 200명이 모두 탈락했다”

“이에 감독님은 다른 드라마에 출연하는 내 모습을 보고 출연을 제의하셨다.”

“출연료로 100만 원을 받았다. 당시 100만 원이면 서울에 집 한 채 살 수 있을 금액이었다 (지금 가치로는 1억원보다 훨씬 더 큰 금액)”

“얄개로만 20편을 찍었으니 집 20채를 사고도 남을 금액이었다.”라고 회상했습니다.

아마 지금 4,50대 이상은 당시 나두수(얄개 시리즈의 주인공 이름) 역할을 하던 이승현의 모습이 아직 기억에 남을텐데요.

영화 <고교 얄개>는 1977년 개봉 후 관객 25만명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엄청나게 흥행하게 되었는데요.

이후 이승현을 주인공으로 세운 ‘얄개’ 시리즈가 영화계 흥행 보증 수표가 되면서 그는 엄청난 인기를 누리게 되었는데요.

그를 섭외하기 위한 경쟁까지 붙다보니 이승현의 출연료는 150만원에서 200만원 최고 500만원까지 올랐다고 합니다. 

당시 500만원이면 집 5채를 살 수 있는 정도였고 잘나가던 최고의 성인 배우들도 500만원 정도를 받을 때였는데 이승현은 고작 18살의 나이에 어마어마한 출연료를 받게됩니다.

그는 “요즘 말로 하면 BTS(방탄소년단), 원빈 이상의 인기었다”라며 당시를 회상했습니다.

이후 그는 <결혼행진곡> <얄개행진곡> <대학 얄개> 등 100여편의 영화에서 주인공 역할을 맡습니다(얄개 시리즈는 약 20편).

이러한 활약으로 1973년 청룡영화제 장려상, 1974년 제13회 대종상 영화제 특별상, 1977년 제13회 백상예술대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얄개 시리즈로 화려한 전성기를 보냈던 이승현에게 안타깝게도 큰 시련이 닥쳐오게 됩니다.

아무도 불러주지 않아..

이승현은 성인 배우가 되면서 이미지 변신을 모색했는데요.

아역 배우로써의 이미지가 너무나 강한 나머지 어떤 영화에 출연해도 좋은 결과를 거둘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승현은 “배우들이 아역에서 성인으로 넘어갈 때 겪는 변신에 대한 고통은 이 일은 해보지 않은 분들은 모른다”

“이 과정을 못 견디고 영화계를 은퇴하는 경우가 비일비재 했다”

“얄개(청소년 이미지의 이승현)가 베드신을 한다고 생각해 보라. 실감이 나겠나?”

“결국 나 또한 ‘이승현 하면 고교 얄개’라는 인식이 박혀 성인 역할은커녕 일반 영화에 출연하는 것조차도 힘들었다”라며 당시의 힘듬을 고백했습니다

이렇게 이승현은 연기적인 면에서 큰 좌절을 겪었는데요. 

지옥과 같던 캐나다 생활

이에 이승현의 어머니는 “계속해서 배우로서 살기보다는 해외로 나가서 공부도 많이하고 넓은 세상을 보았으면 좋겠다”며 그에게 캐나다 유학을 적극 권했습니다.


결국 이승현은 힘든 연기생활로 지친 마음에 어머니의 소원대로 1986년 캐나다로 유학을 떠납니다.

그러나 이 결정은 이승현에게 더 큰 시련을 안겨주게 되는데요. 

유학원을 하던 삼촌의 지인을 믿고 캐나다로 떠났지만 얼마 안 있어 심장마비로 유명을 달리하는 바람에 이승현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던 캐나다 땅에 그야 말로 혼자 남겨지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한국에 있던 어머니의 사업이 실패하면서, 이승현이 애써 모았던 재산이 모두 날아가게 됩니다.

이때부터 그는 살기 위해 다니던 대학도 포기하고 레스토랑 서빙, 청소, 막노동, 교포슈퍼에서 야채 다듬기, 지렁이 다듬기 등 닥치는데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집이 없어 캐나다 길거리에서 7년동안 노숙을 했다고 하는데요. 

이승현은 “햄버거를 굽고 화장실 바닥을 닦고 손이 부르트도록 낚시용 지렁이를 잡았어요”

“막노동도 했고, 레스토랑에서 접시도 닦았고, 호텔에서 청소부로도 일했죠”

“내가 남의 나라에서 무슨 짓거리를 하나 싶었어요. 후회도 참 많이 했습니다”

“한국에 있었으면 어려움 없이 연기 활동을 계속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도 많이 하죠”라고 밝혔습니다. 

결국 이승현은 1993년 캐나다를 떠나 한국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당시 필리핀에서 의료 봉사 활동을 하고 있던 어머니를 따라 필리핀으로 떠납니다. 

거기서 이승현은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목사가 되고, 독실한 크리스천인 아내를 만나 결혼도 합니다.

이승현과 부인 사이에는 아들을 한명 두게 되었죠


하지만 필리핀에서의 생활은 이승현에게 맞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강제로 시키니 할 수 없이 끌려간 것일뿐 이승현의 성향과 맡지않는 생활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승현은 1997년 가족을 데리고 다시 한국으로 귀국합니다. 

처가가 있는 대전에서 ‘얄개 만두’라는 분식집을 냈지만, 이것으로 생활은 여의치가 않았습니다.

이렇게 힘든 생활을 하던 중 이승현에게는 아직 배우의 꿈도 남아 있었는데요.

배우의 꿈

그는 다시 배우가 되기위해 충무로에 가기도 했지만, 예전에 알던 분들은 모두 나이가 들거나 돌아가셔서 현직에 있지 않은 상황이라 제대로 된 기회를 잡지 못했다고 합니다.

거의 이십년만에 다시 연기를 시작한 이승현은 쉽게 현재에 적응하지 못했는데요. (영화 블루스, 아티스트 등).

영화 <블루스>, <아티스트>등에 비중있는 역할을 맡기도 했지만, 결국 흥행에 실패하여 재기에 실패합니다.

더불어 이승현이 연기 생활을 시작하면서 아내와의 갈등도 심각해졌는데요.

이승현 씨의 아내는 남편이 다시 배우 생활을 하는 것을 반대했다고 합니다.

이승현은 “내가 다시 연기를 하겠다고 하자, 아내와의 다툼도 생겼어요”

“아내는 제가 옛날로 돌아가는 것을 원치 않았으니까요.”

“그 사람은 내가 옛날에 영화배우였다는 사실도 모르고 결혼했어요”

“게다가 영화 바닥을 워낙 싫어하고 편견이 심했어요. 배우 하면 외박, 술, 스캔들 그런 것만 생각했죠.”

“아내는 내가 배우가 아닌 목회자가 되길 바랐죠.”

결국 이승현은 연기를 위해서 1년 정도 가족과 연락을 끊기도 했다고 하는데요.

이것이 원인이 되어서 결국 이승현과 아내는 이혼을 하게 됩니다.


이후 이승현은 후배와 함께 영화사를 차리기도 하지만, 이것 역시 사기를 당해 크게 실패하고 말았는데요.

자신이 감독을 맡은 영화까지 끝내 하차하게 되자, 이승현은 자살을 결심하게 됩니다.

이승현 “더 이상 어쩔 수가 없어 후배와 함께 술을 퍼마시고 자살을 하기 위해 한강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죽는 것도 쉽지 않더군요. 어린 아들과 저만 보고 사시는 어머니 얼굴이 떠올라 죽기를 포기했습니다”라고 말했는데요. 


그 이후 이승현은 뮤지컬 ‘돌아온 고교얄개’ 등과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하면서 재기를 도모하고 있습니다. 

예전처럼 주인공이 아니라 그저 연기할 수 있는 배역을 위해서인데요.

이런 이승현의 딱한 처지가 알려지자, 예전 얄개 영화의 팬이었던 4,50대들이 주축이 되어서 ‘얄개 이승현 살리기 운동본부’까지 만들어집니다.

70년대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들에게 이승현의 이런 몰락이 큰 충격이었죠.

그들은 이승현 씨가 출연하는 뮤지컬의 객석을 꽉꽉 매워주는 등 힘을 주었는데요. 

이승현은 이후 영화사에서도 연락이 오게 되어 작품 활동을 꾸준히 하고있다고 합니다.

또한 최근 인연을 만나 재혼을 하게 되며 신혼의 사랑도 만끽하고 있다고 합니다.

두번째 아내와 파전집에서 일하는 근황도 방송을 통해 공개했는데요. (간간히 배우로도 활동하는 중)

이후 2019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15년째 남아있는 유일한 혈육인 친아들과 절연하는 등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합니다.

이혼할 당시 경제적인 문제가 컸고, 감정이 많이 상한 상태인 것이 친아들과 절연한 이유로 보이는데요.

전 처와 아들이 같이 살고있기에 친아버지와 연락하기가 껄끄러울 수도 있죠.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가 선택한 삶인만큼 앞으로 힘든 일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