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한 아내가 찾아와 강제로 요양원에 감금하자 극단적인 생각에 끝내..최근 전해진 전인권의 충격 근황에 모두가 경악

1980년대를 대표했던 전설적인 대한민국의 락가수이자, 밴드 들국화의 리드 보컬로서 수많은 명곡들을 남겨 한국 대중음악의 거탑으로 불리게 전인권

그는 특이한 창법과 뛰어난 음악성으로 인해 지금까지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긴 하지만, 음악과는 별개로 과거부터 워낙 많은 사고들을 그에 대해 욕을 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 최근까지도 많은 비판을 받고 있는 중인데요.

오늘은 그가 음악을 접한 뒤 어떻게 최고의 밴드를 만들어 지금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는지와, 그의 음색이 변화하게 되었던 과정 및 그가 일으켰던 사고들에 대해 한번 정리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어린 시절

1954년, 서울시 종로구에서 태어났던 전인권은 당시 잘 나가는 인쇄소를 운영하고 있던 아버지 덕분에 꽤나 유복한 유년기를 보내고 있던 중,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시며, 이때부터 형들과 어머니와 함께 살아가게 되는데요.

이로 인해 그는당시 찾아왔던 외로움을 이겨내기 위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게 됩니다.

그 이후 그는 미술에 푹 빠져 중고등학교에 가서도 학업을 뒤로 한 채 그림만 그리는 생활을 이어나갔었다고 하는데요.


그러던 어느 날, 규율부 학생들과 사움이 붙어 그 길로 자퇴를 하고 마는데요.

이후 방송에서 그 때를 회상하며 전인권은

“어렸을 때는 그림 그리기를 무척 좋아했어요”


“그런데 학교에서는 왜 공부만 하라고 하느냐고 대들었다가 선생님한테 두들겨 맞았죠”


“그리고 바로 자퇴를 했어요”

“형들이 어떻게든 저를 학교에 보내려고 몽둥이 찜질을 했어요”


“하지만 저는 맞는 것은 두렵지 않았고, 엄마 속도 무지 썩였죠”


“담임 선생님이 학교로 돌아오라고 하니까 엄마가 제게 빌기까지 했는데 끝내 돌아가지 않았거든요”


“이후 밴드하는 동네 형들과 어울려 공원에서 노래를 불렀는데 사람들의 반응이 좋았죠”


“그때 불법 약물도 배웠어요” 라고 충격적인 과거를 밝혔습니다. 

전설적인 밴드 들국화

이 후 그는 작은 형이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모습을 보고있던 중 우연히 흘러나오던 비틀즈의 노래를 듣고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전류를 느꼈는데요.

이때부터 그림이 아니라 음악이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본격적으로 음악을 배우기 시작해, 삼청공원에서 노래와 기타를 쳐가며 조금씩 인기를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20대에 접어들어 전국을 돌아다니며 통기타 업소에서 노래를 부르게 되었던 그는, 1978년에 ‘따로 또같이’라는 이름의 그룹을 결성하며 25살의 나이에 언더그라운드 활동을 청산하게 되었는데요.

이 때 처음으로 발매했던 음반이 안타깝게도 폭삭 망해버리고 맙니다.

전인권은 당시에 대해 “그 때 만든 앨범을 기억에서 지우고 싶어 녹음실에 몰래 찾아가 불을 지를까 생각한 적도 있다”

“그룹과 자신이 맞지는 않았다”며 회상했습니다.


이후 팀이 해체된 뒤, 언더그라운드 가수들이 자주 모이던 ‘모노’라는 음악 카페에서 베이시스트로 인정을 받고 있던 최성원을 만나, 이후 조덕환, 허성국과 함께 80년대를 뒤흔들었던 락밴드 들국화를 결성하게 됩니다.

당시를 회상하며 전인권은

“들국화 결성 후 1985년 1집 앨범으로 데뷔하기까지 4년간 저희는 밤무대 업소에서 주로 팝송을 부르며 먹고 살았어요”

“당시에는 방송국 진입은 엄두도 못 냈고 무지 고생했죠”


“하지만 손님들은 저희 노래를 굉장히 좋아했어요”


“어느 날 새벽 업소에서 성원이가 만든 ‘제발’과 ‘그것만이 내 세상’을 불렀는데 분명 사람들이 처음 듣는 노래인데도 반응이 아주 열정적이었죠”


“그렇게 자신감을 갖고 앨범을 내기로 했어요” 라고 음반을 낸 계기를 전했습니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나온 들국화 1집은 음악 전문가들이 뽑은 대중음악 100대 명반 1위에 꼽히고 큰 사랑을 받게 되는데요. 

이후 들국화는 1980년대를 대표했던 전설적인 밴드로서 엄청난 업적들을 남기게 됩니다.

그가 메인 보컬로 참여했던 ‘들국화’ 1집은 한국 대중 음악 100대 명반 1,2차에서 유재하 1집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하기도 했는데요.

대표적인 노래로는 ‘행진’, ‘그것만이 내 세상’, ‘돌고 돌고 돌고’, ‘세계로 가는 기차’ 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후 들국화는 2집 앨범의 실패 이후 구성원들 간의 음악적인 견해 차이로 1989년 해체하게 되죠.

괴이한 행적

그 후 그는 5번에 걸쳐 불법 약물과 관련된 범죄를 일으키는 등 여러가지 사건을 일으키게 되는데요.


1987년에는 ‘들국화’ 멤버와 ‘사랑과 평화’ 멤버 이철호 등과 함께 불법 약물을 피우다가 구속되었고, 1991년에도 불법 약물로 구속이 됩니다. 


이후 1997년, 1999년에도 상습 투약 혐의로 구속이 되었죠. 

전인권은 2005년 4개월 전에 세상을 떠난 26살 연하의 여배우 이은주와 4년간 연인 관계였다고 주장하여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는데요. 


실제로 이은주가 전인권의 노래를 무척 좋아했고, 콘서트에도 자주 찾아갔으며, 두 사람이 밥도 먹고 문자도 주고받았다고 하죠. 

이윤주의 친한 언니 하 씨는 “전인권은 이윤주가 살아있을 때부터 이윤주의 스토커였어요”라며 “하루에 스무 차례씩 문자를 보내고, 새벽에 전화를 받지 않으면 폭언을 녹음하는 등 스토커 수준의 행동을 일삼았다”고 밝혔습니다. 


이어 “당시 이은주에게 두 살 연상의 회사원 남자친구가 있었고, 전인권을 연예계 대선배로 생각했기 때문에 끝까지 선생님 예우를 한 것”이라고 전했죠. 


또한 이은주의 친오빠는 “문자뿐만 아니라 당신과의 교류는 단순한 친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을 어찌하여 그렇게 착각을 하면서 이제 고인이 된 은주를 두 번 죽이시는지 가슴이 아픕니다”

  
“그리고 그걸 기정사실인 양 언론에 떠들어 대는 전인권 씨를 보며 연민마저 느낍니다” 라고 심정을 전했죠.


이런 논란과 반론, 유가족 측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전인권은 수개월이나 이은주와 연인이었다는 주장을 반복하며 국민들을 지치게 만들었습니다. 

이후 그는 2007년 또 다시 약물 투약 혐의로 구속을 맞게 되었고, 지상파 방송에서 출연금지까지 당하며 징역형을 살게 됩니다. 


출소 이후 다시 활동을 재개하는 듯 보였으나, 2010년 대상포진 치료를 위해 투여받던 모르핀에 중독되어 폐인과 같은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당시 너무나 힘들어 자살까지 결심했다고 하는데요.

부모님 묘소에 가서 절을 드린 후 극단적인 시도까지 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그의 모습을 본 전인권의 前 아내 정혜영은 망가져가는 그를 돕기 위해 요양병원의 글을 1년 반 동안 강제로 집어넣게 됩니다.

(전인권과 정혜영은 2004년 이혼한 관계였습니다)

당시에 대해 전인권은 

“어느 날 약을 먹으려는 찰나 건장한 체격의 남자 5명이 집에 들어와, 나를 번쩍 들었다”

“그 날이 요양병원에 끌려가는 날이었다”

“1년 6개월의 요양병원 생활은 절망보다 더 지독한 지옥이었다”

“새벽 5시에 불이켜지면, 모두 일어나서 6시쯤 쭉 늘어선 채 약을 받는 곳이었다”

“하루종일 아무것도 안했다. 오감이 망가져서 밥도 안 먹었다”

“왜 살아야하는지 왜 먹어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안 먹으면 강제로 먹게 하니까 겨우 죽 몇 술을 떴다”

“하루 하루가 지옥이라 8개월 동안은 매일 죽고 싶다는 생각밖에 하지않았다. 요양 병원이라 죽기조차 힘들었다”

“심장마비로 사망한 마이클 잭슨이 부러웠다. 차라리 나를 죽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로부터 10개월이 지난 후 아내가 나를 데리러 왔다. 딸의 결혼식을 1달 앞둔 시점이었다”라고 회상했습니다.

퇴원 이후 아내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었던 그는 “내 옆에 있으면 힘들기만 한데 차라리 당신의 길로 가라” 라며 그녀에게 이별을 권유했다고 하는데요.

아내가 “내가 전인권 좋아하잖아 어떻게 당신을 떠날 수 있어” 라는 감동적인 말을 했고, 이때부터 전인권이 정신을 차려 마약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가족과 음악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복귀

이후 아내와 재결합까지 하게되었고 꾸준한 치료로 인해 건강이 회복되게 되었던 그는, 과거에 헤어졌던 멤버들을 다시 만나 둘 국화를 재결성한 후 가수로서의 활동을 다시 이어나가게 되었는데요.

하지만 드러머였던 주찬권의 죽음으로 4집 발매 후 밴드 활동이 중단되거나, 설상가상으로 멤버들 간의 사이가 악화되며 두 번째 해체를 밟게됩니다.

그러나 이런 시련에도 음악에 대한 전인권의 열정은 여전했고, 자신의 이름을 건 전인권 밴드로서 현재까지 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최근 다시 그의 이상 행동이 포착되어 많은 이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그는 인천공항 제1터미널 5번게이트에서 종종 목격된다고 하는데요.

인천공항을 돌아다니거나 의자에 앉아 오랜 시간 멍하니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편의점에서 음료수를 5~6개 사서 옆에 두곤 하거나, 항상 갖고 다니던 작은 거울을 유리문에 집어던진 후 이것을 멍하니 바라보는 등의 행동을 했다고 하는데요.

전인권 측은 “이상없다. 불편하거나 그런 것은 없다”라고 입장을 밝혔습니다.

68세의 전인권 씨에게 앞으로는 모쪼록 좋은 소식만 들려오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