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달이 아빠’ 박영규 3번의 이혼에 아들까지 잃으며 결국…최근 전해진 충격적인 근황에 모두가 오열한 이유

15살 때부터 가장이 되어야했던..

박영규는 1953년 대전에서 태어났는데요.

어릴 적 수학여행도 가지 못할 정도로 어려운 가정에서 자란 그는 15살 때부터 신문을 돌리며 생계를 이어갔는데요.

강아지에게 물리기도 하며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담임 선생님에게 박영규는 “넌 반드시 잘 될거다. 선생님을 믿어”라는 말을 들으며  다시 한번 용기를 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는 노래에 뛰어난 소질을 가지고 있어 성악가의 길을 가고 싶었다고 하는데요.

집안 사정이 좋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충남 기계공고에 들어가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내게 됩니다. 

공고에 들어갔지만, 그는 무대에 서고자 하는 꿈을 버리지 못했는데요.

결국 그는 이후에 서울예대에 74학번으로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군대를 다녀오고 제대하고 나서는 대학로로 가서 극단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대학로 소극장에서 소품 정리하는 일부터 시작한 박영규는 매사 최선을 다했지만, 그에게 주어진 환경은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는데요.

늘 배고픔에 시달린 끝에 그는 29살의 어린 나이에 폐결핵에 걸리게 됩니다. 
 
제대로 먹지 못해 몸무게가 42kg까지 빠지며 무대에서 기절까지 하게 된 박영규

그를 위해 대전에 계셨던 어머니까지 올라와 간호를 해줬지만, 치료비를 감당할 여력이 되지 않았는데요.

아픈 몸이었음에도 박영규는 본인이 직접 책 외판원 일까지 시작하게 됩니다.

그렇게 연기를 중단하고 아픈 몸으로 책을 팔았던 그는 1년 반 만에 영업부장까지 올라갔을 정도로 열심히 일했었다고 합니다.

 
박영규는 보건소에서 약을 타다 직접 엉덩이에 주사도 놓았고 어머니는 약탕원에서 몸에 좋다는 것들을 구해 아들에게 먹여주기도 했습니다. 

또한 폐결핵 투병 도중, 같이 연극에서 활동했던 서울예대 5년 여자 후배도 박영규를 극진히 보살펴주었다고 하는데요.

이것이 인연이 되어 그는 그녀와 2년간 열애를 하게 되며 결국 결혼까지 하게 됩니다.

엄청난 인기


하지만 당시 가진 게 없던 박영규에게 처가에서는 반대가 심했고, 결국 자취하던 방에 비닐 장롱 하나만 놓고 결혼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박영규는 그렇게 자취방에서 아들도 한 명 낳았지만, 아들을 품에 안고 처가를 찾아가도 여전히 문전박대를 당하게 됩니다. 


결혼 후 건강을 조금씩 찾게 된 박영규는 다시 연극을 시작하며 1986년에는 MBC 특채 탤런트로도 선발되어 브라운관으로 활동 무대를 옮기게 됩니다. 

이후 그는 88년 MBC 주말 드라마 <내일 잊으리>에서 야망에 불타는 애인에게 배신당한 김희애를 묵묵하게 지켜주는 따뜻한 이미지로 큰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준수한 외모와 신사적인 이미지로 그 인기는 날로 높아졌지만, 당시 탤런트들의 출연료가 높지 않았던 시절이었는데요.

탤런트 수입만으로 가정을 먹여살리기 힘들었던 그는 밤무대 출연을 위해 ‘카멜레온’이라는 노래가 수록된 음반을 발표하면서 하루 12개의 행사에 출연할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게 됩니다. 


당시 얼마나 큰 인기를 끌었는지 그의 밤무대 스케줄이 너무 바빠서 업소에 도착하자마자 이미 무대에는 노래 전주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얼른 마이크를 잡아 또 다른 업소로 이동해서 똑같이 무대에 서는 강행군을 소화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노력 끝에 그는 당시 하루에 중형차 한 대를 살 수 있을 정도의 큰 수익까지 올리게 됩니다. 

박영규는 80년대 후반 가수 김종찬과 함께 주부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연예인으로 꼽히기도 했는데요.


이러한 인기에 힘입어, 89년에는 MBC 미니시리즈 <당신의 축배>에서 당시 최고의 여배우였던 최진실과 로맨스 연기까지 하는 기염을 토하게 됩니다.

그렇게 박영규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집과 차를 살 수 있게 되었고 어려운 가정환경도 크게 좋아지게 되었습니다.


거듭된 이혼

그러나 경제 상황의 호전과는 달리 부부관계는 위기에 처한 상태였는데요.


아이와 엄마는 조기 유학을 원하며, 한국에 박영규를 두고 미국으로 함께 떠나게 되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결국 이혼하게됩니다.

이 후 박영규는 3살 연상의 톱 디자이너 최경숙 씨와 재혼하게 되는데요. 

1990년대 이후 더 이상 히트작을 내지 못하면서 그의 엄청난 인기는 거품처럼 사그라들던 순간, 그는 1998년 <순풍산부인과>에 미달이 아빠로 출연하며 화려한 재기에  성공하게 됩니다.


순풍산부인과는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에게 회자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고 극 중 박영규는 처가에 얹혀사는 무능력한 캐릭터로 국민적인 사랑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박영규의 아내가 췌장암 진단을 받자 또 한 번의 불행이 닥치게 되었는데요.

암 투병하던 부인은 

“건강할 때도 아내 노릇을 제대로 못 했는데 자신이 없다”

“마음 편히 투병하고 싶고 당신도 편하게 해주고 싶다.”라고 말하며 박영규에게 이혼하자고까지 하게 됩니다. 

투병 중인 아내를 간호하면서 금실 좋은 잉꼬부부로 소문이 나기도 했던 그는 두 번째 부인과도 3년간의 혼인 생활의 마침표를 찍으며 결국 이혼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절망적인 아들의 소식

이후 불행은 연이어 닥쳐오게 되는데요.

박영규의 아들이 미국 대륙 횡단 여행을 떠났다가 메릴랜드에서 오토바이 사고로 숨지게 된 것입니다.

고작 22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진 아들 소식에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아 실의에 빠져버린 박영규는 당시 “이 세상에 태어난 걸 후회했다.”라며 극단적 선택까지 했을 정도로 큰 고통을 받게 됩니다. 

“아들이 있는 곳으로 자신도 따라가야겠다.”라는 충동이 들었던 박영규

하지만 자신이 죽는 것은 스스로 마음이 편하기 위해서일뿐 세상을 떠난 아들을 위한 것이 아님을 느끼고 슬픔 속에 겨우 마음을 다잡았다고 합니다. 

또한 그는 사고가 나기 전에 먼저 출연 계약이 되어 있던 드라마 <해신>에는 약속을 지키며 꿋꿋이 출연했습니다. 

아들의 사고를 모르는 이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그는 프로다운 연기력을 선보이게 됩니다.
 

세번째 이혼

그 후 친구의 결혼식에서 처음 만났으며, 아들의 장례식에도 참석했고, 힘들 때마다 자신을 위로해 준 세 번째 부인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크리스마스 날, 극비리에 결혼식을 올린 세 번째 아내는 바로 김수륜씨로, 지금은 이영애와 결혼한 정우영의 전 부인입니다. 

아들을 잃은 슬픔에 방송활동을 접고 아내의 가족이 있던 캐나다로 떠난 박영규는 이후에 필리핀으로 가서 새롭게 골프 사업에 뛰어들 게 됩니다. 

지인과 파트너쉽으로 골프 사업에 참여하게 된 그는 한국인 손님을 주 회원으로 사업을 펼칠 계획으로 부부 공동의 일정 지분을 투자하며 36홀 골프장의 예비 CEO로 활동하게 됩니다. 

고단했던 지난 삶을 잊게 하고, 삶에 새로운 에너지를 주고 있다며 사업의 열정을 드러낸 박영규는 대부분 시간을 현장에서 보내느라 얼굴이 까맣게 그을릴 정도로 열정적으로 뛰어들었습니다. 
 
하지만 호기롭게 시작했던 사업은 나중에 투자자 간의 투자금과 지분 문제로 의견 조율이 되지 않는 문제가 생기게 되었고, 그로 인해 골프장 공사 진행이 주춤해지는 등 여러 문제가 잇따라 발생하게 되며 박영규를 또 힘들게 만들게 됩니다. 

사업에 2년을 몰두했지만, 예기치 않은 여러 문제가 불거지면서 골프장 CEO 자리를 계속 유지할 경우 공인인 박영규의 신뢰도에 문제가 발생할 것이 우려된 그는 고심 끝에 결국 사업에서 손을 떼게 됩니다. 

아들을 잃은 슬픔에서 재출발하며 의욕적으로 사업을 성공시켜 골프장 CEO로 재계의 신호탄을 쏜 뒤, 편안하고 여유롭게 국내 팬들을 만나고자 했던 그의 계획은 모두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박영규는 2년여 동안의 필리핀 생활을 정리하고 캐나다로 돌아갔지만, 결국 세 번째 부인과도 결별하게 됩니다.

아들에게 전합니다.

이후 배우로 복귀한 박영규는 MBC 연속극 <오로라공주>에 출연했지만 드라마 작가 임성한의 일방적인 횡포로 중도에서 하차하며 마음 고생을 하게 되는데요.

박영규가 임성한 작가와 불화가 있기는 했지만 제아무리 드라마의 작가라도 상식적으로 단지 배우와 불화가 있다는 이유로 나이도, 경력도, 더 많은 주연급 배우를 하차시킨 것에 대해 많은 사람은 임성한 작가의 잘못이 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는 이후에 KBS 사극 정도전에도 캐스팅되었다가, 드라마 작가의 반대에 부딪히게 됩니다. 

박영규의 코믹한 이미지 때문에 작가뿐만 아니라 같이 출연할 배우들도 우려가 컸지만 드라마 해신에서 박영규의 연기를 본 PD의 설득으로 결국 정도전에 출연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이후 박영규는 맡은 악역 캐릭터를 너무 잘 소화해내며 시청자들로부터 극찬을 받게 됩니다. 

그는 과거 아들을 잃고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에서도 해신에 꿋꿋이 출연하며 최고의 연기를 보여줬던 것이 이렇게 도움이 되어 정도전에서 다시 명연기를 선보일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이렇게 항상 최선을 다하며 살다 보면 언젠간 자신에게 복이 되어 돌아오게 되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그는 그 드라마로 연말에 연기대상 우수상까지 수상하는 쾌거까지 누리게 됩니다. 

수상소감에서 박영규는 “이렇게 좋은 날, 늘 보고 싶은 아들이 하늘에서 자신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열심히 살았다”

“하늘에 있는 아들과 가까워지고 싶었다”

“그러니 아들을 위해 하늘을 보며 노래하겠다.”라며 오페라 한 소절을 불러 많은 사람을 뭉클하게 만들었습니다. 

게다가 지인의 소개로 조그마한 사업하는 여성과 만나, 크리스마스 날 서울 역삼동 라움아트센터에서 지인들만 초대된 스몰웨딩으로 네 번째 결혼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배우로써 성공한 삶을 살았던 박영규는 최근 예순이 넘은 나이로 어릴 적 꿈꿨던 성악가가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고 밝혔는데요. 

이후 박영규는 <불후의 명곡>, <열린음악회> 등에 출연해 놀라운 노래실력을 선보이며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어렸을 때 가난해서 이루지 못한 꿈이었던 성악가의 꿈을 다시 한번 이루고자하는 그의 열정이 대단하기만합니다.

새로운 사랑을 만난 그의 인생에 이제는 또 다른 아픔은 없기를 바라며 너무나 슬픈 인생을 살아왔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꿈을 쫓고있는 배우 박영규에게 따뜻한 응원을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