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 임희숙 2번 이혼 끝에 유서 남기고 독약까지 마신 후 결국..핏줄 임재범과의 엇갈린 운명

초창기 한국 흑인 음악의 선구자격인 인물로, 소울의 대모로 불리는 임희숙은 굉장히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활동하는 동안 숨길 수밖에 없었던 안타까운 가족사와 여러 사건들은 아직도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는데요. 

오늘은 임희숙이 걸어온 길과 근황에 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50년 6월 29일에 태어난 임희숙은 수중에 남겨진 두 장의 사진으로만 아버지를 추억합니다.

 
그녀는 6.25 전쟁 한복판 피난길에 태어나 생후 한 달도 안 되어 아버지와 생이별했고, 그때부터 고생이 시작됐습니다. 

“전쟁으로 한강 다리가 끊어지기 전에 딱 그 새벽에 태어났다”

“전쟁 통에 언니는 굻어 죽었다”

“아버지는 내게 희숙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이북으로 가셨는데 행방불명됐다”라고 밝혔습니다.


인민군에 끌려갔던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소식 한 번 전하지 못했고, 당연히 생사도 불분명했습니다.


갑작스럽게 너무 일찍 헤어진 탓에 임희숙은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이 너무나도 사무쳤고, 무대 위에서 모자를 쓰기로 결심했습니다. 

“모자를 쓰면 사진 속 아버지와 내가 많이 닮아 있다”


“아버지가 많이 보고 싶어서 모자를 쓰게 됐다”


실제로 임희숙의 무대를 보면 대부분 모자를 쓰고 있는데,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이 얼마나 큰지 어렴풋이라도 느낄 수 있는 대목이었습니다. 

한국 흑인 음악의 선구자 격인 인물로 불리는 임희숙은 아주 어린 나이에 가수 데뷔를 마쳤습니다. 

“어렴풋이 가수가 되고 싶다고 꿈꾼 게 14살이다”


“1~2년 만에 가수가 된 거니까 빨리 된 거다”


“16살에서 17살 겨울쯤에 가수가 됐다”


66년 <외로운 선장>으로 연예계에 데뷔한 임희숙은 고등학교 1학년 때 가수로 주목받으며 학업까지 중단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최종 학력은 덕성여자 고등학교 중퇴인데요.

지금보다 훨씬 보수적인 시절 학업을 중단하고 가수가 되겠다는 데에 어머니의 반대가 매우 거셌습니다.

“어머니는 내가 공부 잘하고 시집 잘 가길 바랐지 가수는 원치 않으셨다”


“가수를 한다고 하니 내 머리를 숭덩숭덩 한 너댓꾼들을 잘랐다”


“그리고 정릉에 있는 고모님이 저를 세우신 그곳으로 유배를 보냈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인 것도 남들의 눈에는 좋지 않아 보일 텐데 애지중지 키운 딸이 딴따라까지 된다고 하니 어머니는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딸의 머리를 자르고 쫓아내면서까지 결사반대했는데 그런데도 임희숙은 가수의 꿈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임희숙의 열정과 예사롭지 않은 실력에 결국 어머니는 그녀를 인정하게 되고, <타양살이> <목포의 눈물>을 만든 작곡가 손목인의 집으로 딸을 데려갔습니다. 

그러면서 노래 지도와 판을 내달라는 부탁을 드렸습니다.

어머니는 처음 결사 반대로 가수의 길을 저지했지만, 나중에는 전폭적인 지지와 응원을 보내며 딸의 앞날을 응원했습니다. 

그런 어머니의 헌신적인 뒷바라지 덕분에 임희숙은 당시 최고로 치던 워커힐 무대에서 데뷔를 치를 수 있었고 <외로운 선장> <그 사람 떠나고> <진정 난 몰랐네>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 등의 곡을 히트시키며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임희숙이 그렇게 높은 자리에 오른 데에는 가수 본인의 실력 외에도 어머니의 존재가 큰 몫을 한 건데 그렇게 인생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존재였던 어머니는 15년 전 세상을 떠나며 큰 슬픔을 안겼습니다. 

지난 1일 방송된 MBN <특종 세상>에는 임희숙 남매가 어머니 납골당을 찾은 장면이 방송되었습니다. 

이 날 임희숙은 납골당에서 어머니 유골함을 챙겨 자기 집으로 모시기로 했다고 밝혔습니다.

“나하고 엄마하고 있으면 동생들이 나를 더 찾아올 거 아니냐”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어머니를 모셨다는 임희숙은, 모친이 세상을 떠난 지 1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리움을 간직해 보는 이들의 마음을 짠하게 했습니다. 

그녀는 복잡한 가정사를 갖고 있는데 다섯 살 때 어머니가 제가하며 이부 동생이 둘이나 생겼습니다. 

큰 동생 이명용은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둘째 동생 이민용은 영화 <개 같은 날의 오후>등을 만든 감독입니다.

 
두 사람은 어머니가 재가후 새 아버지와 낳은 동생으로 언뜻 들으면 대면 대면할 것 같지만 남매의 우애는 아주 좋습니다.


길을 걸을 땐 손을 잡고 걸을 정도입니다. 


이민용은 “우리는 전쟁을 겪은 세대다.  그러다 보니까 전쟁이나 그런 것 때문에 아버지가 없거나 엄마가 다르거나 아버지가 다르거나 이런 가족들이 많다”

  
“따로 살게 되면 아버지 쪽에 살게 되거나 엄마 쪽에 살게 되며 멀어진다”


“근데 한 어머니나 한 아버지 밑에서 같이 있으면 그냥 똑같은 형제다”


의붓 아버지까지 일찍 세상을 떠나며 임희숙은 어머니와 함께 동생들을 극진히 보살폈습니다. 


동생은 “어머니가 장사하고 누나가 가수하면서 우리를 대학교까지 보냈다 생활비, 학비 이런 거 헌사를 아버지들이 없으니까 실질적으로 집안의 가장 역할을 누나가 했다” 며 임희숙에 대한 고마움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임희숙은 동생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더 큽니다. 


“전쟁이 나서 엄마가 내가 다섯 살 때 재혼했고 성이 다른 동생 둘이 있다는 얘기는 부끄러워서도 못하고, 엄마 흉 잡힐까 봐 못하고 우리 엄마 욕 먹이는 것 같아서 못했다”

“그래서 제가 외동딸이라고 그랬다 거기다 이름이 있는 가수라 동생들에게 시간 투자를 많이 못했다”


해준 것보다 못해준 것이 더 기억에 남는 모양인데 그녀의 마음속에는 어머니에 대해 미안함도 크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결혼해서 아이들을 낳으라고 했다”

“다 키워주신다고 했다 그런데 어디 가서 아이를 만드냐 그 소원을 못 잃어드려 가장 죄송하다”

임희숙이 임재범, 손지창과 친척지간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져있는데요. 

이것이 인연이 되어 같은 무대에 오른 적도 여러 번 있을 정도로 친한 사이라고 합니다.

그녀는 임재범이 ‘나는 가수다’에 출연했을 때 

“임재범이 노래하는 모습을 봤는데 자신이 살아온 과정을 너무나 상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가난, 악화된 건강 등 열악한 환경이 모두 합쳐진 소리였다”라며 감동을 받았다고 했는데요.

이어 “내가 데뷔할 당시에 kbs의 ‘나는 가수다’ 비슷한 프로그램에 출연한 적이 있었다”

‘이달의 가수’를 뽑았는데, 제가 1등을 했었다”

“지금 ‘나가수’에서 나오라고 하면 건강 때문에 못 나갈 것 같다”라며 과거를 회상하기도 했습니다.

임재범과 임희숙은 모두 배다른 형제가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요.

배다른 형제들과 절친한 인연을 맺으며 살아온 임희숙과는 달리 안타깝게도 임재범은 손지창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임택근 전 MBC 아나운서는 두번째 부인을 통해 임재범을 낳았고, 세번째 부인을 통해 손지창을 낳았는데요. 

두 사람 모두 혼외자식이었고, 생부인 임택근이 두 아들을 버렸기에 손지창은 자신의 이모부 손에 자랐으며, 임재범은 고아원에서 자라야만 했습니다.

아직도 아버지에 대한 상처가 남아있다고 말하는 임재범 씨

만약 임택근 씨가 배다른 자식들도 자식으로 인정하고, 다 같이 살아갈 수 있었다면 임희숙 씨 가정처럼 행복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임희숙은 두 번의 결혼과 이혼을 겪었습니다. 


74년 첫 번째 결혼은 5개월 만에 파경을 맞이했고, 두 번째 결혼 역시 끝이 좋지 못했습니다. 


먼 훗날 양아들을 들이긴 했지만 연이은 이혼에 배 아파 낳은 자식은 없습니다. 


두 번의 이혼을 겪으며 임희숙은 여관 객실에서 음독 자살을 시도하며 목숨까지 저버리려 했습니다. 

임희숙은 당시 남편 정정식과 어머니 앞으로 “남편과의 불화로 고민을 해왔다”는 유서까지 썼는데요. 

다행히 아침 검문 중이던 경찰관이 발견하여 그녀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안 좋은 일은 한꺼번에 온다고 아주 많은 것이 그녀를 괴롭혔는데요.


1975년 임희숙은 불법 약초 파동에 휘말렸습니다. 


미8군 공연을 하던 당시 몇 명이 불법 약초를 피웠는데, 그때 함께 자리했다는 것만으로도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예상치 못했던 일로 5년간 강제 휴식기를 갖게 됐는데, 자신을 의심하는 주변의 시선에 두 번의 미움까지 겹치며 임희숙은 해서는 안 될 선택까지 하게 됩니다. 


“이혼 후 주위에서 야단을 많이 맞았다”


“그러던 차에 불법 약초가 터지니까 그만 살라는 뜻인가 보다”


“참 살기 싫다는 생각이 들어 현실도 필요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눈앞이 아찔합니다.


사건 이후 시간이 꽤 흐른 다음에 임희숙은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로 재기에 성공했습니다. 


아무래도 독보적인 실력을 갖춘 가수라 대중의 사랑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동시대에 활동했던 정훈희는

“말하듯이 노래한다”


“희숙이 노래는 정말 시를 한 편 음악을 깔고 듣는 것 같은 느낌이다”며 그녀의 노래 실력을 칭찬했습니다.


후배 이세준 역시 “우리가 아우라라고 표현하는데, 무대에 서 계신 것만으로도 노래가 시작도 안 했는데 무대 위에 노래가 가득 찬 것 같다”며 임희숙이 대단한 존재감을 치켜세웠습니다. 


정말 대단하다 싶은데 임희숙이 워낙에 팬이 많았던 가수인지라 팬에서 소중한 인연으로 발전한 경우도 있습니다. 

방송에서 임희숙은 60주년 콘서트를 준비 중이라고 밝히며 오랫동안 자신을 응원해줬던 배우 정혜선을 찾았습니다.

정해서는 오래전 팬으로서 공연을 따라 다니다 임희숙과 연을 맺게 되었고 이제는 서로 없어서는 안 될 친자매 같은 사이가 되었습니다. 

임희숙은 정혜선을 만나 콘서트에서 자신을 소개해달라는 부탁까지 건넸는데 공연장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함께 볼 수 있을지 기대됩니다. 

생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유독 바람만장한 삶을 살았던 임희숙이제 힘들었던 지난날을 잊고 행복한 기억만 쌓아갔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조만간 데뷔 60주년 콘서트를 열 계획이라는데 성공적인 공연이 되길 응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