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고로 행려병원에서 쓸쓸히 떠난 ‘얄개’ 故 손창호의 마지막 소원 대신 이뤄준 딸…고두심 김용건의 오열..

연예계에는 사실 코미디 연기를 가장 어렵게 여기는 배우들이 많습니다.

격한 감정을 드러내거나 훈련을 거쳐, 호쾌하게 쳐내는 액션 연기보다 능청맞은 웃음연기가 훨씬 어렵다는 것인데요.

타고난 미모와 유머러스한 연기력으로 개성과 개성이 뚜렷한 캐릭터를 탄생시켜 한때 인기를 끌었던 인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비극적인 운명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1998년 8월 5일, 배우 손창호가 향년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짧지 않은 투병의 괴로움 속에서 풀려난 것이었지만 그를 기억하는 대중에게는 슬프고 안타까운 부고였습니다.


특히 팬들을 안타깝게 했던 것은 1998년 초 병원비를 내지 못해 행려병동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당시 상황으로 인해 가족들에게 버림받았다는 언론 보도가 있었고, 오랜 기간 악성 루머로 가족들이 상처를 입어야 했습니다.

훗날 딸이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고백하게 되었는데요.

최고의 청춘 스타


손창호는 중동고 시절 연극과에서 연기를 공부했고, 1968년 전국 남녀중고교연극대회에서 ‘놀부전’으로 최우수 연기상을 받아 그 실력을 인정받았습니다.

그리고 1970년 단국대 영문과 재학 중 MBC 공채 탤런트로 데뷔했는데 김수미가 그의 동기라고 합니다.


그는 TV 시리즈 “왜그러지”, “알뜰 교실” 등의 작품을 통해 유명해졌는데요.

또한 영화에서는 ‘얄개’시리즈 등의 하이틴 영화에 출연하며 이승현과 함께 청춘스타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통통한 얼굴과 유쾌하고 친근한 이미지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그는 당시 이덕화, 임예진과 호흡 등과 호흡을 맞추는 등 청춘 스타들 대명사였습니다.

이후 CF까지 섭렵한 그는 대중에게 아주 친근하게 다가왔습니다.

특히 해태 과자 광고에서 당시 청춘 아이돌 임예진과 함께 웃으며 연기하는 모습은 기억 속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는데요.

그는 부라보, 일번지라면, 싱글콘 등 수많은 CF에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어린이 프로그램 ‘꽃의 나라’ MC, ‘손창호-임예진의 청춘만세’ 등 방송 프로그램 DJ로 활약하는 등 다양한 방송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유머러스하고 명랑하고 발랄한 조연으로 순식간에 등장해 주인공이 아닌 청춘 스타로 급부상했죠.

그러나 그런 부와 명예를 얻은 그의 삶에 어둠의 그림자가 점차 드리워지기 시작합니다.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오가며 활동하는 동안 그의 집안 배경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는데요.

불행의 시작

그의 첫 불행은 그가 30살 때 찾아왔습니다.

4살 연하의 아름다운 신부를 만나 결혼식을 올리고 제주도 신혼여행을 다녀올 때만 해도 그는 불행을 예측하지 못했으나 신혼생활 일주일째로 접어들면서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4개월 만에 결별하는 사태를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그 무렵만 해도 그는 젊고 해야 할 일들이 많아 쉽게 상처를 치료할 수 있었습니다. 혹자는 그의 불행의 씨앗은 무리한 영화 연출 및 제작 작업 실패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후 쇄도하는 드라마와 영화 섭외를 접고 1983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대학 영화과에 진학했는데요.

하지만 유학은 배우로서의 삶과 삶 자체를 단절시킨 첫 단추가 되었습니다.

1987년 귀국 후 그는 다시 드라마 ‘첫사랑’에 출연했지만 팬들의 호응이 좋지 않았고, 이후 방송사와 영화계에서의 섭외가 크게 줄었습니다.

이 당시 그는 이미 당뇨병과 심부전을 앓고 있어 치료에 상당한 재정적 부담을 안고 있던 중이었는데요.


그럼에도 일본을 통해 많은 것들을 준비한만큼 나운규의 ‘아리랑’정신을 보여주고 싶다며 자신있게 외쳤습니다.

1990년 자신이 배운 감독 연출력을 바탕으로 영화제작사 ‘월촌시네마’를 설립하고 일본 술집에서의 한국 여성들의 삶을 그린 영화 ‘동경 아리랑’을 개봉했습니다.

그는 혼자서 각본, 주연, 제작, 연출 4역을 소화하며 활약했지만 흥행 실패로 막대한 손실을 입었습니다.

외롭고 쓸쓸한 투병생활..

영화의 실패로 재정적 압박이 가중되었고 스트레스로 인한 불규칙한 흡연, 음주, 식사는 그의 건강을 악화시켰습니다.

무리한 사업을 추진하지않고 치료, 금주, 금연 등 건강관리에 전념했다면 이렇게 일찍 우리 곁을 떠나지 않지않았을까 안타까워하는 시선도 있습니다.

그러던 중 1993년 공개 시트콤 ‘김가 이가’에 캐스팅되어 재기를 노리고자 했으나 야생 불법약초 재배 및 흡연 혐의로 구속된 뒤 더 이상 방송 활동조차 못하게 되었습니다.

1995년 mbc 3.1절 특집극 ‘노래만들기’ 이후 그는 그 해 sbs ‘깊은밤 전용호쇼’에 출연해 실명 위기를 가까스로 극복하고 목회자로 새로 태어나기까지의 고난과 근황을 시청자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하지만 이내 당뇨병과 만성 심부전 장애를 앓아 오랜 재정 문제로 치료비를 대지 못해 행려병자로 전락하게 됩니다. 

(당시 자신의 병원비뿐만아니라 중풍에 걸린 어머니의 병원비까지 대야하는 상황이였다고 합니다)

빚에 쪼들려 방황하던 그는 홀연히 대중으로부터 모습을 감춰버렸고 그렇게 잊혀져 가던 1998년 kbs의 ‘영상기록 병원 24시’를 통해 충격적인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는 10년 동안 일본을 왔다 갔다 하며 어머니의 중풍 치료제를 구하러 다녔던 효자였지만, 정작 자신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당뇨의 나쁜 음식, 흡연, 음주를 즐겨 이틀에 한번씩 투석을 받아야 할 만큼 몸 상태가 나빠진 상태였습니다.

투병 와중에도 손창호는 연예계로 재기하고자 하는 의지를 다졌으나, 눈을 감기 전 양쪽 눈을 모두 실명했고 끝내 재기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과거 10~20년전 손창호와 함께 작업했던 친한 동료 고두심과 김용건은 그가 투병할 당시 남몰래 치료비를 지원해주는 등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하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건강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시커먼 얼굴에 초점 없는 퀭한 눈동자의 그는 시한부 선고에도 불구하고 연신 담배를 피워 물었지만 ‘지금 가장 하고 싶은 게 뭐예요?’라는 질문에 메마른 목소리에 혼미한 정신 상태였음에도 ‘바다요. 바다가 보고 싶어요. 쪽빛 속초 바다’라고 답했고 이는 많은 이들에게 애잔함과 눈물을 자아냈습니다.

그는 서울 삼각산 밀알 기도원을 오가며 통원 치료를 받던 중 방송이 나간 며칠 뒤인 1998년 8월 5일 새벽 46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가 떠난 후 그의 육신은 한 줌의 재가 되어 속초 바다에 뿌려졌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어..


그의 딸 손화령이 배우로 데뷔해 아버지의 못다한 꿈을 잇고 있습니다.  그녀는 지난 2004년 kbs 어린이 드라마 ‘울라불라 블루짱’으로 정식 데뷔했습니다.

이후에도 손화령은 드라마 ‘온에어’, ‘바람의 화원’, ‘내 딸 서영이’, ‘심야식당’, ‘동백꽃 필 무렵’ 등 셀 수 없이 많은 작품에 출연했습니다.

최근에는 ENA ‘얼어죽을 연애따위’에 출연해 엄청나게 감량한 모습으로 많은 인기를 끌기도 했는데요.

손화령은 당시 한 언론이 그의 아버지에 대해 가족에 의해 버려진 사람으로 보도해 이러한 악의적인 기사와 루머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아픔을 가진 채 살아왔습니다.

“왜곡된 부분이 상당히 많았지만 당시엔 제가 어렸기 때문에 정정 보도와 같은 별다른 액션도 취하지 않았어요”

“그냥 피하고 숨고 싶었어요. 이젠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도 오래됐고 저도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많이 편해진 상태예요.”

“예전에 보도가 된 대로 우리 가정이 평탄하지 않았던 것은 맞아요. 아버지는 연기자로서는 훌륭한 배우였지만 집안에서는 그다지 성실한 가장은 아니었어요.”


“이 때문에 나와 대화할 시간이 거의 없었고 어머니와도 헤어지고 말았죠. 그런 아버지가 솔직히 미웠던 적도 많아요. 그래서 부모님 결별 후엔 거의 연락도 하지 않고 지냈어요.”

“이제 와 생각해 보니 내가 아버지의 삶을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일찍 돌아가실 줄 알았으면 매몰차게 대화를 단절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또한 그녀는 활동하며 손창호의 딸이라는 것을 잘 알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연기로 인해 아버지 연기 인생에 오점을 남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죠.


하지만 그녀가 기억하는 아버지 손창호는 라면과 같은 인스턴트 음식은 몸에 좋지 않다며 절대로 먹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가는 곳마다 딸을 데리고 다니기를 좋아했고 어릴 적부터 공개 방송 현장이나 방송국의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자연스레 배우라는 직업을 선망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랑 방송국이나 공개 방송이 열리는 놀이동산 같은 데 따라가는 게 좋았어요”

“그곳에 가면 동료 연기자분들이 귀엽다며 용돈을 주셨던 기억이 나요”

“아빠는 가족들하고 여행을 참 많이 다니셨는데 여름에는 바닷가에 가고 눈이 오면 설악산으로 떠나곤 했었어요.”

다큐멘터리가 비춘 그의 아픈 삶은 끝내 이루지 못한 꿈의 좌절로 비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쓸쓸히 생을 마감하던 그 순간 손창호는 영원한 연기자로서 스스로를 기억했을 것입니다. 

부디 그곳에서는 어떤 아픔도 걱정도 없이 편히 쉬시길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