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샤쓰의 사나이’ 87세 가수 한명숙 아들 슬픔 속에 충격 숨져…”아들아 하늘에서 만나자” 가슴 아픈 인생

노란 샤스의 사나이로 유명한 가수 한명숙의 아들이 투병 중 숨진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한명숙은 슬하에 2남 1녀를 두고 있었는데 그중 큰 아들 이일권 씨가 그만 세상을 떠나버리고 말았는데요. 


이일권 씨는 80년대부터 작곡가로 활동하며 이명훈의 ‘내사랑 영아’ 등의 곡들을 만들었던 뮤지션으로 공황장애를 심하게 하려며 오랜 시간 치료를 받았지만 상태가 극심하게 악화된 끝에 결국 세상을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들을 위해 어머니인 한명숙은 가진 재산을 전부 쏟아부으며 치료에 매달렸지만 끝내 아들은 차디찬 주검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게다가 1935년생인 본인마저도 고령으로 건강이 너무나 악화된 바람에 현재 누워있는 상태로 지내고 있으며 이동을 할 때는 부축을 받아 휠체어 의지해 겨우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라고 하는데요.

그녀의 둘째 아들은 현재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일식집을 운영하고 있고 딸은 이승만 대통령 시절 국방장관을 지낸 고 신성모 씨의 손자와 결혼하여 역시 미국 시애틀에서 살고있는데요.

그러다보니 한명숙은 현재 매일 방문하는 요양보호사의 도움으로 겨우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그녀는 통장에 잔액이 286원밖에 남지 않아 현재 기초생활 수급자로 등록되어 월세 6만 원짜리 임대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데요.

과거 ‘노란 샤스의 사나이’로 화려하게 활동했지만 이후 나이를 먹으며 시장터나 복지관 등 무대라고 할 수도 없는 곳에서 가끔 오는 섭외를 받아 헐값에 노래를 부르곤 했고 그마저도 이제는 움직일 수가 없어 불가능해진 상황입니다. 

한명숙은 어떤 게 가장 힘드냐는 질문에 

“남한테 이야기하지 못하고 나 혼자 괴롭다”


“누구한테 이야기한다 해도 도와주는 사람 없다”


“외롭다 냉정하다”고 솔직하게 털어놨고 이 사실을 딸에게 이야기했냐는 질문에는 눈물을 글썽이며

“우리 딸한테 이야기하면 마음이 아파서 울 거다”라고 말했는데요.

 
심지어 그녀는 딸에게 “임대 아파트가 좋긴 한데 주위가 너무 조용하니까 고려장 같은 기분이 든다” 라고까지 말했을 정도로 극도의 외로움과 적막함 속에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때 톱스타로 대활약했던 한명숙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녀의 인생은 비참해지기 시작했고 그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50여 년 전인 197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요. 


그녀는 ‘노란 샤스의 사나이’로 왕성하게 활동하며 육군 상사였던 남편과 결혼의 자녀들을 낳아 행복하게 살던 중 1970년에 남편이 고작 41세의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는데요.

1년 사이에 또 부모님마저 돌아가시는 바람에 고작 35세라는 젊은 나이에 연이은 비보를 당하며 큰 충격을 받아 3년이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전화도 못 받고 노래도 못하며 집에만 틀어박혀 살게 됩니다. 

어린 시절


그녀는 어릴 적 평안남도에서 태어났을 당시부터 홀어머니 밑에서 형제도 없이 무남독녀로 태어났고 일생 동안 그나마 곁에 있던 가족들마저 이상하게도 하나 둘씩 떠나보내는 고독한 삶을 살았는데요. 


어린 시절 한명숙은 부친에 대한 뚜렷한 기억이 없었는데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때 중국을 오가며 사업을 하다가 광복 후 홀로 월남에서 부산에 거주하고 있었고 때문에 어린 명숙은 유치원 보모였던 어머니로부터 외가에서 키워지게 됩니다.


아버지가 계시지 않아 애정 결핍을 겪었던 그녀는 그로 인해 어릴 적에 말수가 적어서 오죽하면 외할아버지가 명숙이가 말을 하면 천지가 개벽할 것이라고까지 말씀하셨을 정도였다는데요.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친구들과 어울리며 다행히 성격이 점차 밝아지게 된 한명숙은 어릴 적 총명하고 끼가 많아 무용과 노래로 하계회를 주름잡기도 했었습니다. 

그녀는 6.25가 터지며 16살 때 모친과 어울렸던 피난길에서 다행히 해군통신부대원과 인연을 맺게 되어 잔일을 도와주며 해군 함정을 타고 인천에 정착하게 되는데요. 

당시 어머니는 어린 명숙에게 이따금씩 한 소설의 이야기를 들려주곤 하셨는데 그 내용은 부모와 헤어진 주인공이 부모를 만나기 위해 가진 역경을 이겨내고 결국 유명 가수가 되어 부모를 찾아오게 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16세에 피난 소녀 한명숙은 어머니가 이따금씩 들려주던 이야기가 알게 모르게 작용했는지 공교롭게도 인천에 정착한 뒤 악극단 가수로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전쟁 통에 경제적 어려움이 겹쳐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던 한명숙의 유일한 낙은 이따금씩 주인집에 있는 풍금을 치며 노래를 부르는 일이었는데요.

이 일을 계기로 그녀는 외삼촌의 평양음대제자인 드러머 이원근 씨를 만나게 되었고 그의 추천으로 ‘태양악극단’에 들어가면서 연예계에 첫발을 내딛게 됩니다. 


이후 실력을 점차 인정받으면서 미8군 쇼단에 픽업되며 활동을 넓혀 나갔던 한명숙은 안정된 허스키 보이스와 외국 팝을 부르기에 적당한 음색으로 미군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인기와 유명세를 몰아 패티 페이지가 내한했을 때는 함께 무대에 오르는 행운도 차지하게 됩니다.

 
하지만 당시 그녀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가 있었는데요.

이북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녀서 러시아어만 배웠다보니 영어를 전혀 읽을 줄 몰라 노래 가사에 한글로 소리 나는 대로 토를 달아 불러야 했는데요.

더구나 발음도 미국식이 아니라 억센 러시아 스타일이어서 팝을 부르기엔 부적절했다보니 미군들에게는 물론 한국 사람들에게까지 그녀의 노래는 매우 어색하고 괴상하게 들려졌습니다. 


이 때 외국 노래들을 녹음해주고 일일이 가사를 적어주었던 인물이 후에 음악 평론가로 활동했던 임백천 씨였는데요.


임백천 역시 당시 미8군 부대에서 활동하며 특히 영어를 잘해 통역을 도와주기도 했는데요.

또 자니카슨 쇼로 유명한 사회자 자니윤 역시 당시 한명숙 씨의 매니저 일을 봐주며 다들 어려웠던 때 서로가 서로를 위해 주었던 이러한 인연들로 한명숙은 점차 큰 무대로 적응해 나가게 됩니다. 

노란 샤스의 사나이


당시 kbs 악단 지휘자였던 손석우 선생은 그렇게 활동하던 한명숙을 지켜보게 되는데요.


그는 한명숙을 처음 본 순간을 회고하길

“당시 지인 한 분이 노래를 잘 부르는 가수가 있다고 해서 함께 대구의 한 공연장에 갔지요”


“이전까지의 가수의 음색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느낌을 주더군요”


“순간 이 목소리에 맞는 노래를 만들어야겠다하는 욕심이 생기더군요”라고 말하며 한명숙에게 세상을 뒤흔들게 될 최고의 히트곡 ‘노란 샤스의 사나이’를 선물해 주게 되는데요.


이 곡은 처음. 발표되었을 당시 일부 가요 관계자들로부터 그저 단순히 동요의 털이 좀 난 것 뿐 이란은 악평도 받았지만 바로 그 파격으로 말미암아 60년대 이후 우리나라 가요 흐름을 완전히 뒤바꿔 놓으며 큰 반향을 일으켰고 한명숙을 최고의 대스타로 만들어 주게 됩니다. 

노란 샤스의 사나이는 이후 프랑스와 일본의 가수들에게도 불리워지며 이른바 한류의 원조로 동남아까지 강타하게 되는데요.

당시 한명숙의 노래가 얼마나 유행을 했던지 한 외국인은 길을 가다가 노란 샤스에 산 아이가 나오자 대한민국의 애국가인 줄 알고 갑자기 부동자세로 서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당시에는 외국 관광객들이 한국 관광 기념으로 이 음반을 사가는 경우도 많았는데요.

대만에서도 워낙 널리 불려지자 언젠가 그녀가 대만에 공연을 갔을 때는 대만 사람들이 ‘노란 샤스의 사나이’와 ‘빨간 마후라’가 자기네 나라 노래라고 우기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 무렵 그녀의 노래는 북한을 비롯해 공산권에서도 널리 애창되었으니 한명숙은 민간 외교에도 한몫했던 그야말로 애국자가 된 기분이었다고 하는데요. 

급기야 노란 샤스의 사나이의 붐은 영화 제작으로까지 이어졌는데요.

당시 영화 <노란 샤스 입은 사나이>는 서울 국도극장에서 개봉되어 1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을 만큼 만원 사례를 기록했습니다.


그녀 또한 이 영화에 직접 출연하며 당시 한 신문에 실린 칼럼에이아면 한명숙은 연기력 없는 것이 오히려 매력이라는 평이 실리기도 했을 만큼 호의적인 평가를 얻게 됩니다. 

한명숙은 그 시절을 회상하며 

“당시에는 tv가 없던 시절이었어요”


“때문에 노래는 아는데 가수 얼굴을 모르니까 꽤나 궁금했겠지요”


“무대 인사차 지방에 내려가면 제 얼굴을 보려고 사람들이 극장으로 몰려들었어요”

  
“심지어 대구에서는 인파가 너무 몰려 영화 상영이 중단되는 사태까지 일어났을 정도였으니까요” 라고 말했는데요.


심지어 가수 트위스트 김은 이 무렵 한명숙의 얼굴과 각선미를 보고 연예인이 되겠다는 결심을 했을 정도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그녀 본인은 이 영화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후 가수 생활에만 전념하게 되는데요.

스크린에 나서는 것보다 노래를 수백 곡 이상 힘들게 부르더라도 무대에 서는 게 훨씬 행복하다고 여겼을 만큼 연기는 자신의 길이 아니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는데요. 


그렇게 그녀가 스타덤에 올랐던 어느 날 하루는 부산 공연 때 한명숙이 나온다는 포스터 문구를 보고 놀랍게도 부친이 정말로 찾아오게 되지만 그러나 오랜 숙원이었음에도 정작 한명숙의 반응은 냉담했었다고 합니다.


가족을 남겨두고 혼자 떠난 부친에 대한 앙금이 풀리지 않은 탓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아버지는 새 가정을 꾸리고 있었고 이 상황을 이해하기에 그녀는 아직 너무 어린 나이였기 때문이었는데요. 


이후 그녀는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을 비롯해 홍콩, 싱가포르, 필리핀, 태국, 말레이시아 등 ‘노란 샤스의 사나이’가 빅히트한 나라들마다 해외 공연을 다녔습니다.

해외 공연에서 돌아오면 각 방송국 PD들이 무대에 세우기 위해 직접 공연장에서 기다렸다가 데려가는 이른바 모시기 경쟁의 주인공으로까지 등극하게 됩니다.

불행의 연속

하지만 그렇게 행복한 나날들을 보내는가 했던 한명숙에게 이 무렵부터 불행한 인생이 펼쳐지기 시작하는데요.

남편이 41세의 나이로 타계하며 2남1녀 자녀를 혼자 키우게 됩니다.

이후 친정 어머니와 시어머니까지 동시에 모시고 살아야 했고 또한 거듭된 시련으로 성대가 손상되어 언어 장애와 함께 목소리를 3년간이나 잃어버리게 되는 바람에 가수로서 치명적인 성대 수술을 두 차례나 감당하며 노래를 접어야 하는 아픔도 겪게 됩니다. 


한창 가수로 활동할 때는 무대와 가정 둘 중 하나만 택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한명숙은 때때로 시어머니가 차려주는 밥상에 앉아야 했고 이후 활동을 중단하고 시간이 흘러 자식들을 결혼시켰는데요.

음식을 잘 못해서 며느리에게 요리하는 법도 가르쳐주지 못해 그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고 합니다.


심지어 김치를 처음 담글 때는 소금을 잘못 넣어서인지 배추에 싹이 돋아나기도 했다는데요.

그녀는 자식들이 분가하여 홀로의 몸이 되었지만 수익도 없는 상태에서 급기야 큰 아들까지 공황 장애를 앓는 바람에 얼마 남지 않은 전 재산을 모두 털어 아들의 치료에 쏟아부었지만 사실 그녀 본인의 몸도 노쇠해 졌기에 점점 이런저런 투병을 하게 되며 움직이는 것조차 힘겨운 삶을 살게 됩니다. 


요양병원에 입원 중이던 당시에는 과거 동료였던 현미가 그녀를 찾아오기도 했는데요.

당시 현미는 허리를 못 써서 밥도 못 차려 먹고 아무도 자기를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한명숙의 소식을 듣고 나서 직접 와서 보니 한층 더 노쇠해진 모습에 차마 말을 잇지 못하며 제작진에게 카메라를 끄고 오디오로만 촬영을 진행하자는 요청까지 하게 되는데요.

현미는 한명숙의 간병인에게 뭘 먹는지 몰라서 이거 가지고 얘가 먹는 거 좀 사다가 해줘라 나며 돈을 쥐어주며 부탁했고 한명숙이 너 돈 없는 거 안다며 만류했지만 현미는 내 마음이다 내가 돈이 없어서 10만 원밖에 못 가져왔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한때 스타였던 한명숙과 현미는 고작 돈 10만 원조차 크다고 느낄 정도로 둘 다 상황이 어려웠던 것인데요.

현미는 또 한명숙에게 “건강하고 절대 과거 생각하지 말아라”

“지금만 생각해라 시간 봐서 또 오겠다”라고 말한 후 문 밖을 나왔고

“너무 가슴이 아프다 그렇게 화려했던 우리 한명숙이..”라고 토로하며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 안타까움을 자아냈습니다.


이후 한명숙은 몸은 늙어 병들었는데 통장에는 286원만이 남으며 극도로 가난해지면서 기초수급자로 등록이 되었고 월세 6만 원짜리 임대 아파트에 입주 신청을 한 지 6년 만에 겨우 들어가는 등 빈곤 속에 죽지 못해 억지로 살아가게 되는데요. 

그러던 중 오랫동안 공황장애를 앓던 큰아들마저 이른 나이에 사망하면서 그녀는 사랑하는 가족 한 명을 또 떠나보내는 너무나 충격적이고 가슴 아픈 참변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무남 독녀로 태어났고 아버지도 없이 자란 한명숙은 이후 남편마저 젊은 나이에 일터니 후에 큰 아들마저 이뤘고 둘째 아들과 딸은 또 미국에서 정착하는 바람에 현재 슬픔 속에 병석에서 쓸쓸한 노년을 보내고 있는데요. 

모쪼록 한명숙이 건강을 회복해 다시 한 번 그때 그 시절처럼 무대에서 우리에게 노래를 불러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라며 너무나 힘든 인생을 살아온 가수 한명숙에게 여러분의 따뜻한 응원을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