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질게 터졌다 20억 빚 보증 류지광 충격 실체 “못 갚으면 앞길을 막겠다” 소속사 실토 ‘극단 선택’까지..

오늘의 주인공 류지광의 이야기에 앞서 미국의 16대 대통령 에이브로엠 링컨의 일화를 소개하겠습니다. 


어느 날 신문 기자가 링컨에게 질문하길 “당신의 놀라운 성공과 존경받는 삶의 비결이 무엇입니까?”라고 하자 이에 링컨은 주저 없이 “다른 사람보다 실패를 많이 경험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실제로 링컨은 정치 이력 중 10번의 선거에 도전해 7번의 고배를 마셨다고 하는데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이 딱 맞아 떨어지는 비유로 그렇게 그는 수많은 실패를 거듭했음에도 이에 굴하지 않고 도전한 끝에 결국은 대통령이 될 수 있었지요. 


오늘의 주인공 류지광 역시 사실상 20억에 달하는 빚보증으로 36년간 백수로 살며 기획사로부터 위약금마저 내야 될 상황이 되자 결국 어머니가 직접 찾아가서 무릎을 꿇고 빌었는데요.

그럼에도 재판 걸고 소송 걸고 해서 앞길을 막겠다는 말에 끝내 해서는 안 될 나쁜 선택까지 하고 말았던 류지광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에 대해 말해보고자 합니다. 


1985년 서울에서 태어난 류지광은 어린 시절 경제적으로 크게 어려운 일이 없는 꽤나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당시 아버지가 가장으로서 경제적 뒷받침을 충분히 하셨고 어머니도 외국은행 국내 지점에 근무하는 뱅커였습니다.

이처럼 남부럽지 않게 평탄하던 집이었지만 그의 어머니가 사람을 좋아해서 사람을 믿고 빚보증을 잘못 섰다가 류지광이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1997년 당시 무려 4억 원이라는 엄청난 빚이 생겨 그때부터 집안이 완전히 기울어 그야말로 쫄딱 망하고 말았습니다.

훗날 그의 고백에 따르면 당시의 4억 원은 지금으로 치면 20억 정도인데 결국 이 일로 부모님 두 분 모두 실직하고 말았는데요.

그리고 지금도 생생히 기억이 나는 게 하루는 아버지가 자신을 불러 눈물을 참으며 다음과 같이 얘기를 꺼냈다고 했습니다. 

“너희 엄마가 빚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우리 집이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다”


“그래서 더 이상 엄마랑 못 살 것 같으니까 이혼이라는 걸 해야겠다”라고 했었는데 그 충격이 뇌리에 박제가 되어 그 장면이 아직까지 기억이 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네 생각은 어떠냐?”고 물었고 그래서 이때 어린 류지광이 했던 말이 “엄마랑 아빠가 헤어진다면 살고 싶지 않을 만큼 아플 것 같아요”라고 하며 오열을 했는데요.

결국 아들의 애절한 이 한 마디에 아버지는 이내 마음을 다시 잡고 가정을 지키겠다고 다짐하게 됩니다.

한편 당시 축구를 좋아했던 류지광은 꿈 역시 축구 선수였고 하지만 꿈을 활짝 피울 청소년기에 하필 집안의 꼴이 말이 아니다보니 방항을 참 많이 하게 됩니다.

또한 그걸 부모님께는 내색을 못하니 집 밖에서 방황을 많이 하곤 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류지광이 고백하길 당시 “부모님이 고생하시는 걸 아니까 부모님께는 내색을 못하고 밖에서 방학을 참 많이 했다”


“그리고 내가 원래 꿈이 축구 선수였다가 중학교 시절 길거리 캐스팅이 되면서 연예인으로 방향이 바뀌었다”


“그러자 주변 또래 아이들이 내가 연예인 지망생이라고 하니 괜히 시비를 많이 걸었고 나 또한 지기 싫고 무시당하기 싫어서 막 싸우고 그랬다”라고 했습니다. 


한편 10대 시절 그에게 길거리 캐스팅을 제안한 기획사는 슈퍼스타 이효리가 몸담았던 핑크의 기획사로 유명한 대선 기획사로 아주 큰 연예 기획사였는데요.

그렇게 유명 기획사의 연습생으로 들어가는 행운을 잡았으나 하필 이때 이 기획사의 대표이사인 故 이호연 회장이 쓰러지는 바람에 류지광의 첫 가수 데뷔는 너무나도 허무하게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 무렵 과거 어머니의 잘못된 빚보증으로 생긴 빚을 아버지가 정말 열심히 일을 해서 6년 만에 청산하게 되었고 그래서 새로운 마음으로 평소 고기를 좋아하셨던 아버지가 고깃집을 차려 온 식구가 이 고깃집에 매달리며 부품 꿈을 꾸었는데요.


장사가 안 돼도 너무 안 돼 단 6개월 만에 폐업을 하는 안타까운 일이 또다시 일어나고 맙니다. 

설상가상 이 일로 아버지는 큰 충격을 받아 결국 심장병으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이후 가세가 또다시 완전히 기울어 쪼들리는 생활을 벗어날 수가 없다보니 류지광 그가 아버지를 대신해 닥치는 대로 일을 하게 되는데요.

당시 커피숍 알바를 시작으로 pc방, 독서실, 주점, 조개구이집 등을 전전하며 생계에 힘을 보태야 했습니다.

 
그렇게 가수의 꿈을 꾸며 그쪽 길을 걷기를 누구보다 바랐지만 가수가 되려면 보컬 수업을 받아야 하고 음반도 내야 하는 등 기본적인 자금이 많이 들어갔는데요.

앞서 얘기한 대로 돈 한 푼도 없을 뿐더러 집안 형편이 너무 좋지 않다보니 누구 하나 지원해 줄 수 없는 환경이라 그저 답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무렵 방송가에는 오디션 열풍이 불면서 우후죽순 관련 프로그램들이 생겨나더니 우승을 하면 음반도 제작해주고 상금도 주고 소속사 지원에 유명세까지 얻을 수 있는 그야말로 모든 게 가능하게 됩니다.

그러자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오디션에 참가하게 됩니다. 

그런데 류지광 그가 제일 처음 나간 오디션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수 오디션이 아닌 모델 오디션이었는데요.

그 이유로는 그렇게라도 자신의 이름을 알리면 가수의 길을 걷는 데 있어 뭔가 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의 계획대로 이 오디션을 계기로 음반 기획사의 러브콜을 받아 마침내 캐스팅이 되어 계약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기획사에서 그에게 요구했던 게 누가 봐도 저음에 동굴 목소리인데도 불구하고 그와 맞지 않는 높은 음역대를 거듭 요구하게 됩니다. 

이와 관련해 류지광이 고백하길 “아시다시피 나는 바리톤 중저음이다 그래서 훗날 미스터트롯에서 ‘지하 100층 동굴 저음’이라 불리기도 했었는데 그런데 이때 기획사가 나에게 맞지 않는 음역대만 계속 주문했다”

  
“그러자 보컬 트레이너마저도 이건 안 될 것 같은데 이 친구랑 안 맞다며 분명히 아니라고 했고 그럼에도 소속사가 계속해서 높은 음액대만 요구하는 바람에 이후 무리한 연습으로 결국 성대 결절까지 오고 말았다”


“그러면 보통의 경우에는 ‘내가 너한테 너무 무리한 걸 시켰구나 그래 우리 좀 쉬었다가 다시 해보자’ 이렇게 나와야 하는데 당시 소속사는 나의 성대 결절 이유로 계약 파기와 더불어 계약 파기의 원인이 나라면서 위약금까지 요구했다”


“그래서 결국 당시 어머니가 기획사에 직접 찾아가서 무릎을 꿇고 비셨다. 우리 아들에게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말이다”

  
“그럼에도 기획사는 절대 안 된다 계약 파기하자며 일방적인 결정을 하고 말았고 그리고 기획사에서 한다는 말이 위약금을 정확히 한 달 안에 반드시 갚아라고 했다”


“그러면서 만약에 위약금을 갚지 않을 경우엔 재판 걸고 소송 걸고 해서 내 앞길을 어떻게든 막겠다고 하더라”


“결국 이러한 일들로 당시 아버지가 나에게 했던 말이 지금도 기억이 나는 게 ‘네가 이쪽 일을 앞으로 안 한다고 하면 네가 연예계에 더 이상 미련이 없다면 그 기획사 사장을 천국으로 보내겠다’며 감정의 극단까지 치닫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아들의 꿈을 위해 내 앞길을 위해 아버지가 그냥 돈을 주고 말아라고 해서 비록 속에 천부는 나지만 결국 위약금을 주고 그 기획사에서 나올 수 있었다”라고 했습니다. 


한편 이 무렵 앞서 얘기한 대로 방송가에는 오디션 열풍이 불고 있었고 그리고 그 중심에는 지금의 미스터 트롯만큼이나 인기가 많았던 슈퍼스타K라는 프로가 있었는데 당시 이 프로가 얼마나 인기가 많았냐면 무려 지원자가 240만 명이나 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그도 이 오디션에 참가해 240만 명 중 24위를 차지하는 나름의 성과를 거두긴 했으나 끈질긴 노력에 비해서는 턱없이 부족한 반응으로 결국 이때 ‘나는 아니구나 여기서 끝내야 하는구나’라고 하며 연이은 실패로 좌절의 늪에 빠지더니 결국 가수의 꿈을 내려놓기로 결정하게 됩니다. 


이와 관련해 류지광이 고백하길 “가수가 되기 위한 문턱에서 자꾸만 실패하자 당시 나는 상실감이라는 게 진짜 엄청났었고 특히 슈퍼스타K 오디션 직후에는 이게 최고조였다”


“원래 내가 술을 잘 못 마시고 안 마시고 그러는데 이때는 허구한 날 매일 술만 마시고 그랬다 그걸 마시면 그 순간은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하루는 ‘내게 더 이상 미래는 없고 벼랑 끝에 서 있다’는 생각이 들어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쁜 생각을 하고 모든 걸 내려놓으려는 순간 부모님 얼굴이 만화에서 보던 것처럼 영화에서 본 것처럼 주마등처럼 부모님의 얼굴이 막 스쳐가더라”

“그리고 그 순간 당시의 여자친구가 ‘정신 차려 왜 그러냐 그러지 말라’며 나를 붙잡아 주었는데 그날 여자친구와 함께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그는 연이은 실패로 한때는 해서는 안 될 나쁜 생각까지 할 정도로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간들을 보내야 했고 하지만 이내 다시 정신을 차려 여러 오디션을 보며 그렇게 2009년부터 2020년 미스터트롯에 나오기 전까지 11년간 무려 7번의 오디션을 봐야 했습니다. 

그리고 한때는 불타는 트롯맨의 손태진이 우승했던 팬텀싱어에도 출연해 이후 팝페라 가수로도 활동했는데요.

그러나 대중적인 장르가 아니다보니 또다시 한계가 오고 말았고 그렇게 수많은 오디션 프로그램에 도전하며 나름 의미 있는 결과를 내고도 지속적인 조명을 받지 못해 아쉬웠던 찰나 마침내 운명의 프로그램 <미스터트롯>을 만나게 됩니다.


이와 관련해 류지광이 고백하길 “매번 막다른 골목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다 보니 비슷한 반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미스터트롯 출연도 다 포기하고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려던 상황에서 진짜로 마지막으로 결심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최종 라운드 문턱에서 안타깝게 고배를 마셨는데 당시 겉으론 쿨한 척 했지만 속으로는 솔직히 많이 슬펐다”


“그런데 아쉬움은 당시 순간일 뿐이고 이번 만큼은 다르다는 걸 시간이 지날수록 깨닫게 되었다”

  
“이게 다 미스터 트롯의 인기 트로트의 인기 덕분이 아닌가 싶다”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류지광 그가 고백하길 

“비로소 이제야 방송을 틀면 거의 매일 등장할 만큼 스케줄이 많이 생겼는데 이 모든 게 고진감래라고 생각한다”


“돌이켜보면 지난 20년간 희망과 기대 절망과 좌절을 거듭한 시기였다”


“아예 가능성조차 없었다면 일찌감치 포기했을 텐데 그만두려고 마음 먹으면 일이 생기고 막상 기대를 갖고 뛰어들면 다시 기약 없는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이른 나이에 많은 걸 겪어봐서 웬만한 건 견딜 만한 내공이 생겼는데도 같은 일이 반복되니 힘들더라”

“주변에서는 더 늦기 전에 직장을 가지라고 했는데 그럴 때마다 부모님의 격려와 위로가 항상 큰 힘이 됐다”


“솔직한 말로 내가 미스터트롯 나오기 전까지는 어쨌든 36년간 백수였는데 그럼에도 부모님이 한 번도 이 길을 반대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아버지는 나에게 남자가 돼서 한 번 시작했으면 깃발을 꼽아봐야 되지 않겠냐며 의지를 돋구어 주셨다”


“그래서 나는 부모님을 위해서라면 할 수 있는 건 뭐라도 다 해드리고 싶다”


“그 중 가장 하고 싶은 건 부모님의 집을 사드리는 일이다”


“언젠가는 반드시 그렇게 할 것이다. 그리고 나의 힘든 과거를 거치면서 지금은 오히려 그것들이 감사하고 심지가 굳어지고 단단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행여 너무 이른 나이에 벼락 인기를 얻었다면 오히려 더 망가지고 힘들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혹시 지금 가는 길이 멀기만 하고 지루하고 포기하고 싶다면 그럼에도 끝까지 간다면 그 힘들었던 날들이 보람으로 느껴지는 순간이 반드시 찾아올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