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전부는 아니지만..” 현미 세상 떠나며 남긴 마지막 유언…재산 상속마저 포기한 두 아들의 충격 결정


현미 씨와 이봉조 씨 사이에서 가장 피해를 많이 본 사람은 바로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유산 한 푼 받지 못하고 병만 얻은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드디어 미국에서 두 아들이 들어와 별세 후 3일 만에 빈소를 차리게 되었는데요. 


두 아들은 어머니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그리고 현미 씨의 마지막 유언이 밝혀졌는데요. 

그건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이봉조 씨가 유부남인 줄 전혀 모르고 만나 아들을 둘이나 낳으며 무려 20여 년을 함께 산 현미 씨

그의 부인은 전혀 노출되지 않았기에 언론에서도 현미 이봉조 씨는 공식적인 부부였으며 심지어 인고 부부로 소문이 자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봉조 씨는 현미 씨와 함께 사는 동안 잘생긴 값을 하느라 바람을 피워냈고 심지어 두 집 살림을 하면서 그의 부인에게도 아이를 두 명이나 더 낳은 것을 현미 씨는 뒤늦게 알게 되었어요. 


그러자 그와 헤어질 것을 결심하고 두 자녀를 데리고 나오죠 이게 1975년도쯤에 벌어진 일입니다. 

빈털터리로 나온 현미 씨가 가엾어 의리의 남자 신성일 씨가 자기 명의로 대출을 얻어 같은 단지 내 아파트에 집을 얻어줘 엄앵란 씨와 그녀는 서로 오고 가며 친자매 이상으로 친하게 지냈습니다. 


여자 혼자 몸으로 두 아들을 키우기 위해 현미 씨는 야간 업소를 여러 군데 뛰며 새벽 2시~3시까지 목에서 피가 터질 정도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다 이봉조 씨와의 문제로 자녀들이 상처를 많이 받을 것을 염려한 현미 씨는 자녀들을 1979년 미국으로 유학을 시킵니다. 

돈이 많거나 허영심 때문이 아니었어요. 

이봉조 씨와 헤어진 지 13년 뒤 그가 많이 아프다는 것을 알게 되어 그를 찾아갑니다. 

그는 부인에게 가지 않고 그동안 홀아비로 살고 있었다고 해요.

 
그는 다시 자기를 받아달라며 눈물로 호소했는데 당시 당뇨 합병증으로 틀니를 끼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에 정이 많고 마음이 약한 현미 씨는 다시 재결합하기로 약속을 했어요. 

기자회견을 하고 합하기로 날짜까지 잡았습니다. 

그러나 일주일 후 시누에게 연락이 와 그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것을 듣게 됩니다.

그의 사후 또 한 번 현미 씨와 아들들은 상처를 받습니다. 

이봉조 씨가 바람을 피운 것보다 더 잘못한 것은 두 아들들을 그때까지 호적에 올리지 않은 것이었어요. 

현미 씨는 물론이고 두 아들은 호적 때문에 상당 기간 고통을 받았습니다.

끝까지 그의 부인과 이혼하지 않아 그의 자녀는 법적으로 그의 부인이 낳은 네 명의 자녀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법적으로 소송을 하면 현미 씨는 몰라도 친자녀는 상속을 똑같이 받을 수 있었어요. 

하지만 현미 씨와 자녀들은 상속을 포기합니다.

이봉조 씨의 재산을 가지고 싸우는 것을 아버지가 싫어할 것으로 생각했다고 해요. 

현미 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편이 죽은 후 난 재산은 단 한 푼도 받지 않았다”


“전 아내가 모두 가져갔다”

“변호사가 충분히 재산 일부를 취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 아들들이 ‘아버지가 싫어하실 일은 끝까지 하지 말자’고 말해 정말 한 푼도 챙기지 않고 더욱 열심히 살아왔다”

이렇게 이봉조 씨는 살아 생전에도 그랬지만 돌아가시면서도 현미 씨와 두 아들에게 가슴 아픈 상처를 남기고 말았습니다. 

두 아들은 아버지의 호적에도 올라가지 못했고 재산도 단 한 푼도 받지 못하게 된 것이죠.

아마 두 분이 재결합을 하셨다면 그런 문제를 처리했을 거라 생각되는데요. 

그러기 전에 갑작스럽게 돌아가시는 바람에 끝내 일이 이렇게 된 것 같습니다. 

두 아들은 중년이 되어서야 아버지를 용서하게 되었다고 말하기도 했는데요. 

그동안 얼마나 힘들고 상처가 많았는지 짐작하실 수 있겠죠.

“자기도 결혼하고 아이를 낳게 되니 마흔 살 다 되고 나서야 이제서야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그런데 돈이 다가 아니지만 현미 씨마저 자녀들에게 줄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현미 씨는 한국에서 홀로 40년 넘게 혼자 살다가 안타깝게 별세하셨는데요.

남겨줄 재산은커녕 빚이라도 없으면 다행일 것 같습니다. 

밤무대를 뛰며 힘들게 돈을 벌었는데 2015년 <사람이 좋다>에 나와 사기를 당해 수십억의 돈을 잃고 심지어 빚까지 얻었다고 말했습니다. 

갚다 갚다 남은 빚이 7억 정도라고 합니다.

사람을 너무 잘 믿어 많은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받지 못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고 합니다. 

10년째 같이 일해왔는데 월급을 제대로 받지 못한 지 1년이나 되었지만 그녀가 불쌍해서 당시 곁에 있었던 매니저의 증언이었죠. 

그녀가 왜 이봉조 씨한테 그렇게 철저하게 속았는지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현미 씨는 이런 사람이었어요.

매니저 비를 줄 수 없게 되어 매니저를 내보내고 혼자 고속버스 기차 등을 타고 다니며 행사나 무대에 서기도 했습니다. 

이런 경제 상태인데도 그녀의 마지막 공연은 노인들을 위한 무료 공연이었습니다. 

사실 현미씨는 돈보다 항상 자식 걱정뿐이었어요. 

현미씨가 늘 걱정했던 것은 두 아들의 건강이었는데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재산은 없고 나쁜 유전자만 물려받아 큰 아들은 심장 쪽이 안 좋고 둘째 아들은 당뇨가 있다고 합니다.

특히 큰 아들이 생사의 고비를 넘을 정도로 위험했습니다. 

심장질환이 있었는데 어느 날 심근경색으로 정신을 잃어 일주일 정도 못 깨어났습니다. 

심장이 멎었는데요. 쉽게 말하면 죽었다고 해요. 

둘째 아들은 부동산업을 하며 몸이 약한 형을 대신해서 자기가 가정을 챙기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습니다.

스트레스가 당뇨에 더 안 좋은데 그래서 현미 씨는 팔순이 넘어서도 아들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아들들과 떨어져 한국에서 외롭게 혼자 살면서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부모님 때문에 여러모로 고생이 심했던 두 아들은 어머니를 과연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빈소를 지키고 있던 현미의 큰 아들은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죄송한 마음을 밝혔습니다.

“어머니는 문밖을 나가면 대중가수였지만, 집에 돌아오시면 평범한 두 아들의 엄마셨다”

“제가 미국에 있을 떄 항상 아침 저녁으로 건강하라는 말씀을 많이 해주셨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다른 어느 것보다 혼자서 가시게 했다는 것이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며

“자식도 둘이나 있고, 식구들도 많은데 혼자 말없이 가시게 하다니…제 평생의 불효로 남을 것 같다”고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그는 현미와 나눈 메시지도 공개하면서 “주변에서는 제가 어머니와 대화하는 모습을 보며 ‘여자친구냐?’고 물을 정도로 너무나 다정하셨다”

“어머니가 저와 동생과 연락하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생각하셨던 것 같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대중들이 현미를 어떻게 기억하면 좋을 것 같냐는 물음에 “어머니의 비보에 많은 국민들이 애도하고 안타까워 해주시는 것에 너무나 놀랐다”

“어머니가 우리 국민의 가슴 속 깊이 기억되는 가수로써 계속 남았으면 한다”라고 전했습니다.

한편 현미 씨는 살아생전 자기는 죽으면 두 아들이 있는 미국으로 가서 묻히고 싶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죽어서라도 아이들 곁에 있고 싶다는 엄마의 마음이죠.

아무도 자기를 찾지 않는 때가 되면 미국 아들들 곁으로 가서 자기 아들 둘을 돌봐준 할머니 곁에 묻히고 싶다고 말해왔습

그런데 대한가수협회장으로 5일간 장례를 치르는데 11일 오전 발인하는데요. 

장지는 서울 추모공원으로 발표되었습니다. 

그런데 오후 들어 새로운 뉴스가 떴습니다. 어머니의 유언대로 미국으로 모셔가기로 했다고 해요.

 
발인은 11일 오전 10시 서울 추모공원에서 화장 절차를 마친 뒤 고인의 유해는 두 아들이 거주하고 있는 미국으로 향합니다. 


큰 형은 “나도 동생도 미국에 거주한 지 오래됐고 아무래도 이곳에 모시면 자주 찾아뵐 수 없기 때문에 이제라도 모시고 가서 자주 뵙기 위해 미국으로 모시기로 결정했다” 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어머니의 소원이자 유언을 지켜주셔서 감사드리고 이제 현미 님은 아드님들 곁에서 늘 행복하시길 기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