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미 빈소 지킨 두 아들과 며느리 혼절..겁없이 빈소 찾은 수상한 남자의 정체?? 대통령까지 화환 보내…

한국 가요계의 한 획을 그은 가수 현미가 별세했습니다.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에 추모 행렬이 이어졌습니다.


그녀는 부엌 앞에서 쓰려져 많은 이들의 안타까움을 사고 있습니다.


현미의 아들은 빈소에서 바닥을 치며 오열하며 절교했다고 합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보통 사망 다음 날 빈소가 마련되는데 현미는 이틀 이상 소요가 되었습니다. 

이유는 두 명의 아들이 있는데 두 아들 모두 미국에 거주 중이었기 때문입니다.


현미는 차가운 냉동고에서 두 아들이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돌연 사망한 충격에 더해 장례까지 늦어서 비통함이 더해졌습니다.


부동산 사업을 하고 있는 아들은 사업체를 오래 비워야 하기에 그에 대한 처리와 처 자식까지 함께 오느라 늦었다고 전해집니다.  

장례는 보통 3일장을 하는데 현미는 5일장을 거행합니다.


아들들의 선택이라고 전해졌습니다.

현미의 빈소는 많은 연예인들이 찾았습니다.


현미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 중앙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는 가족들의 비통한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현미의 아들은 조카 한상진과 함께 기자들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원통해 했습니다.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해 가시는 길을 쓸쓸히 보내드렸다는 것에 평생의 후회로 남을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아들도 그걸 알고 있었고 빈소에서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만 닦을 뿐이었습니다.


조문객들이 현미의 빈소 앞에 도착해 조의를 표할 때마다 아들과 며느리들은 하염없이 슬픔에 눈물을 쏟았습니다.

현장에는 며느리가 쉴 새 없이 눈물을 닦으며 앉아 있었고 한 며느리는 고개를 푹 숙이며 망연자실해있었습니다.


상주인 아들은 자리에 한 번 앉지도 않은 채 넋이 나가있었습니다.

하춘화는 빈소에서 “선배님은 제가 6살 때 가수 데뷔했을 때 한 무대에 섰고 이미자 선배님이나 현미 선배님 패티킴 선배님 이런 분들은 제가 다 엄마 아줌마라고 부르던 대선배님이셨다” 라고 현미에 대해 회고했습니다.

 
“저에게 춘화야라고 부르는 유일한 분이셨다”


“우리 가요계를 지켜주셨던 분들이 이렇게 한 분 한 분 떠나시니 너무 마음이 허전하다”라고 밝혔습니다. 

“정말 활발하셨던 분이고 건강을 누구도 의심할 수 없을 정도였다”


“지금도 실감이 안 난다 100살 이상은 사실 걸로 후배들은 생각해서 너무 아쉽다 이제 누가 나를 춘화야라고 불러주실까라고 했다”


“좋은 곳에 가셔서 노래 건강하게 불렀던 모습으로 하늘나라에서도 편히 계시기를 빌 수밖에 없다”라고 전했습니다.

빈소에는 사회 각계의 화환들이 도착해 고인의 가시는 길을 위로했습니다.


현미의 영정 바로 옆에는 윤석열 대통령이 보낸 큰 화환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요.


이걸 보아 현미가 살아 생전 얼마나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또한 빈소에는 다양한 화환들이 많이 자리했습니다.


그 중에는 이미자의 화환도 보였는데 현미보다 세 살 아래로 친했던 언니의 가시는 길을 위로했습니다.


또한 나훈아, 태진아, 남진, 송대관, 장윤정, 박구윤 등의 화환도 보여 가요계 후배들의 위로가 전해졌습니다.

 
평소 왕성한 활동을 이어오던 현미의 사망에 고령으로 인한 심혈관 질환과 골다공증이 원인으로 작용한 게 아니냐는 추정이 의료계 내부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현미를 진료했던 교수는 “현미를 오랜 시간 진료했고 방송 녹화 현장에서도 자주 만났었기에 사망 소식이 너무 안타깝고 슬프다” 면서

“평소 성품이 좋으셨던 만큼 대중에게 좋은 이미지로 기억됐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의료계 내부에선 현미 씨가 평소 관상동맥 협착이 있었고 자다가 관상동맥 경면으로 관상동맥이 갑자기 완전히 막혀 심장 근육이 괴사하는 심근경색증을 일으켜 수면 중 죽음을 맞은 것 아니냐 는 견해도 나오고 있습니다.


현미는 가슴에 통증을 느끼고 물을 마시려고 나왔다가 부엌에서 쓰러졌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현미는 40년 넘게 혼자 살았는데요.

최초 보도는 싱크대에서 쓰러졌다고 했고 발견자인 팬클럽 회장 김 모 씨는 베란다 쪽 쓰레기 버리는 공간에 쓰러져 계셨다고 했습니다.


실제 현미의 집은 20평도 안 되는 집이라 베란다와 싱크대의 경계가 모호하다고 합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현미가 좁은 집에서 마지막을 맞이한 것입니다.


현미의 아들은 빈소를 지키며 원통함을 터뜨렸습니다.

“한국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어야 했다”

“며칠 전 어머니가 꿈에 나왔다 안부 전화를 드렸는데 목소리가 좋아서 조만간 찾아뵐 예정이었는데 너무 슬프다”라며 자책했습니다.


“또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면 죽지 않으셨을 것이다”


“내가 불효자다 어머니에게 몇 차례 미국에 가서 같이 살자고 말했는데 어머니는 ‘친구들과 생활 터전이 다 한국에 있어 낯선 미국에 가고 싶지 않다’며 내 걱정 말라고 거절했다”라고 밝혔습니다.

현미는 자신의 외로움과 고독보다 두 아들들의 안위를 더 걱정했던 것입니다.

  
현미는 생전에 아들 내외와 손주 손녀들이 한국에 왔을 때 지인들에게 그렇게 자랑을 했다고 전해진다. 


두 아들은 한국에 오자마자 의료진과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확인하고 오열하며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집니다.

이 날 장례식장에는 현미가 쓰러진채 발견되었을 당시 최초 발견한 팬클럽회장이자 현미의 12세 연하 남자친구도 자리한 것으로 알려져있는데요.

두 아들은 이미 현미와 만남을 갖고있던 연하 남자친구의 정체에 대해 알고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해당 팬클럽 회장은 현미의 남자친구였기에 그녀의 집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때문에 쓰러져있는 현미를 발견해 신고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