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사극이 개국하자 정도전 역을 맡았고 1996년에는 <용의 눈물>에서 또 정도전 역을 맡게되어 정도전 전문 배우라는 칭호를 얻은 배우가 있습니다.
그는 바로 故 김흥기입니다.
김흥기는 정도전 역을 두 번이나 맡아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며 ‘역대 최고의 정도전’으로 불리며 큰 인기를 누린 바 있었습니다.
그의 공연을 본 봉화정 씨 문중도 매우 흡족해하며 사례비까지 주었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입니다.
김흥기는 1967년에는 연극, 1968년에는 영화, 1972년에는 드라마로 데뷔해 30년 넘는 시간동안 꾸준히 활동해왔습니다.
그런데 그가 2003년 KBS1 사극 ‘무인시대’에 정중부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출연하지 않아 그의 근황을 많은 이들이 궁금해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그가 2009년에 별세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명품 배우’ 김흥기를 추모하고 그가 세상을 떠난 이유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안정적인 직장도 버리고..
1946년생 배우 김흥기는 원래 국어교사라는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연기에 대한 꿈을 놓지 않았고, 결국 교사를 그만두고 1967년 연극 배우로 데뷔했습니다.
그 당시 배우라는 직업은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고정 수입도 없고, 아주 가난한 삶을 살아야 했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흥기는 연기에 대한 남다른 열정으로 안정적인 교사 생활을 접고 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김흥기는 1968년 영화 <대좌의 아들>으로 단역으로 데뷔했고, 1972년 MBC TV 드라마 특채 연기자로 데뷔하며 TV드라마, 영화, 드라마 등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가게 됩니다.
78년 영화 <율곡과 신사임당>에서는 주연으로 맹활약하며 스크린에서 인기를 끌었는데요.
TV드라마로는 사극, 시대극, 현대극을 막론하고 비중 높은 역할들을 맡으며 인상깊은 연기를 펼쳤습니다.
사실 김흥기는 모든 분야에서 완벽한 연기를 보여주었지만, 특히 대사가 어렵고 양도 많기로 소문난 사극에서 그의 진가가 발휘되었는데요.
유동근의 회상
사극 연기로 유명한 후배 배우 유동근은 그에 대해 말하기를 “흥기형은 후배들에게 모범이 되는 선배이다”
“흥기형은 내가 연기를 시작했을 때 이미 주연을 맡았고, 그의 대사는 후배들에게 인정받고 있다”
“그의 존재감은 여전히 꽤 크다. 흥기 형님은 촬영이 다가오기 전까지 대사의 토씨, 장단, 고저 하나하나 까지 철저히 준비하고 연기하는 배우다”
“기교로 연기하는 배우가 아니셨다. 그래서 대본을 못 외운다는 것 자체를 용납하지 못했고, NG에도 용서가 없으신 분이셨다”
“배우의 자존심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셨던 분이셨다”
“대본이 무려 10매가 되어도 한 번에 연기하셨다. 김흥기 선배가 맡은 정도전이 없었다면 이방원 또한 인기를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라며 김흥기 배우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유동근은 배우가 가져야 할 자질뿐만 아니라 사극을 하면서 연기하는 자세도 배웠다고 하는데요.
“김흥기 선배님이 사극에 임할 때는 연출자와 작가가 피곤해할 정도로 파고들어 고증하셨습니다”
“그런 형님을 보면서 고증의 중요성을 느끼고 형님을 본받으려 했습니다”
“더 활동을 하셨어야 했는데, 그런 선배를 다시 볼 수 없다니…너무나 가슴이 아픕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사극의 경우 역사적인 사실을 다루기 때문에, 그 고증을 어떻게 해야할지에 대한 과제를 많이 줍니다.
김흥기는 제작자보다도 더 열정적으로 이를 고증하며 그야말로 온 힘을 쏟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연기에 늘 온 힘을 다하던 김흥기는 교수로 후진양성에도 앞장섰습니다.
그와 동시에 공연계의 대선배로도 꾸준하게 연극 무대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연기 열정도 그의 몸을 갉아먹는 질병은 막지 못했습니다.
갑작스러운 뇌출혈 그리고…
김흥기는 2004년 연극 <에쿠우스> 공연 준비 도중 뇌출혈로 쓰러지며 많은 사람에게 충격을 줬습니다.
김흥기는 에쿠우스에서 주인공 알런을 돕는 정신과 의사 마틴 다이사트를 연기했습니다.
이 날 낮 공연을 끝낸 후 무대에서 내려와 대기실에서 쓰러졌습니다.
당시 알런을 연기했던 동료 연기자는 “김흥기 선배님이 평소 고혈압에 시달려 혈압약을 복용하였지만 연기에 집중할 수 없다는 것을 이유로 약을 끊고 우황 청심환을 줄곧 마셔 뇌출혈로 쓰러진 것 같다” 라며 안타까움을 토로했습니다.
김흥기는 낮 공연을 끝내고 대기실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던 중 실신했고 구급대원의 도움으로 로비를 통해 실려 나가는 것이 다수에게 목격되었다고 합니다.
극장 측은 기다렸던 관객들에게 사과의 말과 피해 보상 일정에 대해 설명했다고 합니다.
동료 연기자는 “배우 생활 16년동안 이런 경우는 처음입니다. 힘들게 발걸음 하신 관객 여러분께는 정말 죄송한 일이지만, 사람의 생명이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라며 양해를 구했다고 합니다.
당시 그 소식을 들은 많은 관객은 놀라움을 금치 못 했고 김흥기가 회복해 다시 연극 무대에 서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는 많은 이들의 바람과는 달리 의식을 찾지 못하고 오랜 시간 동안 투병 활을 이어나갔습니다.
김흥기는 쓰러진 이후 한양대병원으로 옮겨 척수액을 빼는 배액술을 받았으나 당시 정상 회복은 불가능하다고 이미 판정받았습니다.
당시 사고로 폐, 심장, 혈관 운동을 지배하는 뇌의 연수 부분에 심한 손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후 5년이나 의식불명 상태로 투병 생활을 이어 나갔습니다.
병원에서도 차 도가 없자, 가족들은 파주에 있는 집으로 모셔 그를 1년 동안 극진히 간호하기도 했습니다. 김
흥기의 아들 KBS 김진원 PD는 “어머니는 아버지를 간호하는 것이 세상의 가 장 큰 기쁨이자 행복으로 여길 만큼 열심히 보살피신다. 1분도 시선을 안 떼는 헌신적 인 간호를 수년째 하시고 있다.”라며 상황을 알렸습니다.
오랫동안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투병 중이라 가족들은 마음의 준비를 했다고 합니 다. 결국 2009년 3월 6일 김흥기는 향년 62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습니다.
집에서 투병 중 상황이 좋지 않아 병원으로 이송하는 도중 숨이 멎었습니다.
김흥기는 생전 배우 중에서도 손꼽히게 빠르고 정확하게 대사를 외우기로 유명했습니다.
머리가 비상하고 뛰어난 관찰력에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이라고 불릴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배우로서도 대성하고 그 명성을 오래 유지할 거라고 모두 생각했습니다.
갑작스럽게 들려온 그의 비보는 많은 사람의 가슴을 미어지게 했습니다.
쪽대본
KBS 드라마 기획팀장 이응진은 “대사 하나, 토씨 하나, 틀리면 안 되는 스스로 완벽주 자셨다. 드라마 연습 때도 누구보다 일찍 나와 대본을 챙기곤 했는데…. 나중에는 쪽대본에 대해 많은 스트레스가 쌓이셨고 그 때문에 쓰러진 것이 아닌가 싶다.”라며 안타까워했습니다.
쪽대본은 방송 촬영 이전에 대본을 제대로 만들어두지 않고, 촬영 직전에 바로바로 이번에 찍을만큼만 만들어 때우는 것을 말합니다.
연기자가 쪽대본을 받을 경우 연기 연습이나 상황 분석을 할 시간이 거의 없어지게 됩니다.
완벽주의자였던 김흥기 배우에게는 크나큰 스트레스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2007년 후배인 유동근이 당시 아내 전인화가 출연 중이었던 sbs 사극 <왕과 나> 촬영장에서 ‘쪽대본’문제로 제작진과 시비를 벌이다, 폭행까지 하게되는 사건도 있었는데요.
물론 아내 전인화를 챙기기 위함도 있었지만, 롤모델과 같았던 선배 김흥기를 죽음에 까지 이르게 한 ‘쪽대본’에 대한 분노가 머리 끝까지 달했기 때문도 있을 것입니다.
고인을 기리며..
그리고 생전 고인보다 손윗사람이었지만 대화가 잘 통해 친구로 지낸 윤문식은 “사람과 정을 나누는 방법을 몸소 보여준 친구죠. 자신보다 동료와 선후배를 더 챙겼습니다.
그리고 내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연기를 통해 감동과 웃음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 려준 배우였습니다.”라며 그를 그리워했습니다.
배우 김영철도 “김흥기 형과는 드라마 는 같이 못 했지만 연극 무대에서 함께 연기 호흡을 맞췄습니다. 참 철저하고 누구보다 일 욕심이 많은 분이었습니다.”라며 고인을 회고했습니다.
하나같이 모든 사람이 철저한 완벽주의자로 연기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신 분이라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김흥기의 아들 김진원 PD는 “고인은 평소 연기자 이전에 항상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고 늘 말씀하셨던 따뜻하고도 엄격한 아버지”라고 추억했습니다.
그는 고인이 돌아가신 후 드라마 스페셜 <마지막 후뢰시맨> 첫 연출을 맡았고 작품에 고인의 생전 연기 장면을 삽입하는 연출을 했습니다.
아들의 작품에 출연하고 싶었다라는 고인의 생전 소원을 이 뤄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기획 단계에서부터 아버지가 출연하신 드라마를 넣어야겠 다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자연스럽게 삽입할 수 있는 부분이 있어서 기획대로 연출한 것이었는데요.
그 모습을 본 많은 사람은 다시 고인의 생전 모습을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혔다고 합니다.
연기자로서도 철저하고 따뜻한 아버지로서도 참 좋은 삶을 살았던 김흥기 여전히 팬들과 가족은 그의 빈자리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하늘에서는 부디 고통 없이 편안하시기를 바랍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