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미의 비보에 식음을 전폐하며 오열한 나훈아…싱글맘 현미의 가슴을 설레게 한 유일한 남자..엇갈린 둘의 운명

“내 평생을 이가 빠질 때까지 노래하겠노라”고 외쳐오던 가수 현미는 전날까지도 지인들과 식사를 하며 건강에 전혀 이상 없는 행보를 보여왔지만 어제 향년 85세라는 나이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 충격을 안겨줬습니다.


때문에 그녀의 죽음에 대해 여러 의혹과 루머가 양산되었는데 대한가수협회 회장 이자연은 다음 같은 의견을 공개적으로 밝혔습니다. 

“어제까지도 외식도 하고 그러셨는데 아마도 넘어지셔서 그런 것 같다”


“제가 생각하기로 현미 선생님은 작년에 베란다에서 꽃 화분을 만들다가 갑작스레 넘어지시는 바람에 발목이 부러지시는 사고를 당하셨다”


“많은 이들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다 나아났다’며 안심시켜주셨고 무대에도 설 수 있다며 자신 있어 하시길래 후배들의 뜻을 모아 무대에 출연시켜 드렸다”

  
“하루는 사무실에 놀러 오셔서 당신이 발목을 보여주시더라”

“부기가 꽤나 있었지만 안 아프다고 하셔서 안심했었다”  


“그런데 고령의 나이엔 한 번 다치면 회복이 힘들다 보니 한 번 부러진 발목은 계속해서 문제를 일으켰던 것 같다”


“아마도 이게 이번 사망의 가장 큰 원인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싱크대 앞에서 넘어지셨다는데 누군가 빨리 도와줬다면 괜찮았을 거다”


“그래서 이번 사고가 내 개인적으로 너무나 슬프고 안타깝다”

이렇듯 85세의 현미는 숱한 어려움에 맞서 싸운 인생이 무색하게 너무나 허망하게도 홀로 쓸쓸히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그녀에게는 두 아들을 비롯해 조카인 노사연과 한상진이 있지만 직계 가족인 아들들은 현재 미국에서 거주하고 있는 관계로 아들들이 귀국한 후에야 빈소를 차리고 조문객들을 맞이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언급했듯이 노사연과 상진 등 연예인 생활을 이어오는 조카들을 비롯해 현미의 첫째 아들인 이영곤은 곤이라는 가수명으로 활동한 적이 있었고 둘째 아들인 이영주는 가수 원준희의 남편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현미는 첫째 아들 이영곤의 가수 생활 뒷바라지를 하느라고 6억 대에 대출까지 투자하며 든든한 부모 역할을 해왔지만 첫째 아들 이영곤은 무명 가수 생활 끝에 현재는 미국에서 부동산을 한다고 전해집니다. 

핏줄에서 물려받는 재능은 정말 타고난 축복인 건지 현미의 가족들은 끼와 재능으로 연예계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현미의 가족들은 한국을 대표하는 연예인 집안으로 손꼽혔죠.

故 현미의 사망에…


참고로 노사연은 현미의 큰 언니 자식이고 한상진은 현미의 여동생 자식입니다. 

조카인 노사연은 갑작스러운 별세 소식에 촬영을 마친 뒤 급히 빈소로 향했었고 배우 한상진 역 씨도 이모인 현미의 비보를 듣자마자 급하게 미국에서 귀국행 비행기를 알아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한상진은 기자에게 말하길 “이모가 어제까지 정정하셨다”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건강하게 지방 공연도 다녀오셨는데 갑자기 쓰러져 돌아가셨다”며 끝내 눈물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현미의 사망 소식을 슬퍼한 건 비단 가족뿐만이 아니었죠. 

가수 김흥국 또한 한탄해져져 심경을 밝히기 “현미 선생님은 내가 가장 존경하던 선배님이시다”

“한국의 대중가수로서 재즈 스타일의 성량도 풍부하셨지만 노래하는 스타일이 워낙에 시원시원하신 까닭에 현미 선생님의 노래 실력은 한국에선 보물과도 같은 실력이었다”


“특히나 가수들의 수명은 항상 짧았지만 현미 선생님은 희망을 보여주셨다”


“80세가 넘어서도 활발히 공연하며 죽을 때까지 노래할 수 있다던 그 포부는 많은 후배 가수들에게 큰 귀감이 되며 가수가 평생 직업이 될 수도 있다는 그런 모범적인 삶을 몸소 실천하며 보여주신 여장부셨다”

  
“라디오와 tv 방송을 할 때마다 후배들을 그렇게 끔찍하게 챙기신 분이다”


“항상 칭찬을 많이 해주시고 가수로서 관리하는 법을 알려주셨다”


“짧게 반짝 인기를 얻는 건 운이지만 길게 인기를 누리는 건 실력”이라며

“인생을 길게 보고 꾸준히만 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고 자신감을 주신 분이다”


“말로만 격려를 해주신 게 아니라 고인의 어려운 경제 상황에도 불구하고 후배들을 위해서 경제적 지원도 마다하지 않는 분 중에 한 분이셨다”

  
“하루는 제가 가수협회장을 할 때 장학금을 드렸던 적이 있는데 더 춥고 배고픈 무명의 후배 가수들에게 전달하라고 양보를 하셨던 분이셨다”


“당시 현미 선생님도 사기와 강도 끝에 월세살이를 했던 처지인데 말이다”


“마음이 너무나 여리신 분이라서 남들보다 늘 눈물이 많으셨던 걸로 기억한다”

“때문에 저는 이번 부고 소식을 듣고 그 누구보다 깜짝 놀랐던 게 사실이다”

“정말 더 오래 사실 줄 알았다. 많이 걸어다니시는 모습에 안심도 했다”

“선생님의 건강하신 모습을 항상 좋아했고 어떤 후배 가수보다도 친하고 가깝게 지냈다”


“그런 선생님이 나 홀로 자택에서 쓰러져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마음이 아프다”

“조금만 더 빨리 발견했더라면 충분히 100세까지 살 수 있는 분이셨다”


“배우자나 자식과 사셨다면 이런 변을 당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에 친한 후배 가수로서 고인의 삶이 안타깝고 너무나 황망할 따름이다”


고인을 떠올리는 이런 후배 가수들의 생생한 기억과 슬픈 심경을 듣자면 그동안 현미는 훌륭한 인성으로 많은 존경을 받아온 게 분명해 보입니다. 

너무나 따뜻했던 그녀…

개인적으로 고인이 얼마나 따뜻했는지를 보여준 일화가 생각나는데요.

60년대 현미의 라이벌로 꼽자면 대표적으로 떠올리는 여가수가 있을 겁니다. 

바로 ‘노란 샤스의 사나이’를 불렀던 원로 가수 한명숙입니다.

한명숙은 현미와 함께 60년대 많은 인기를 누려왔지만 1971년에 남편과 사별한 이후 2004년에 급속히 몰락한 슬픈 인생입니다. 


설상가상으로 공황장애가 있는 아들의 치료비로 많은 돈을 날렸었고요.

때문에 현재는 월수입조차 없이 사글세방에서 매우 가난하게 산다고 합니다. 

현미 또한 가정사에 의해 인생에 큰 어려움을 겪었던 인물이죠. 

사랑했던 전 남편 이봉조는 유부남임을 숨기고 결혼 사기를 쳤기에 현미는 충격 끝에 홀몸으로 자녀들을 이끌고 평생을 싱글맘이 처지로 고생했었죠.

그리고 믿었던 사촌 동생의 배신으로 자신의 전재산이었던 집을 사기당했으며 금고까지 털어간 강도에 의해 그야말로 무일푼의 처지로 전락했습니다. 

60년대를 대표하던 현미와 한명숙은 그렇게 노년의 월세방을 전전하였고 가족들과도 같이 살지 못한 채 혼자서 쓸쓸하게 말년을 보냈던 이들이죠. 

그러나 현미는 스스로 돌보기에도 바쁠 텐데 항상 남을 걱정하던 따뜻한 인물이었습니다. 

현미는 라이벌이었던 한명숙의 딱한 처지를 주위에서 전해 듣고는 매번 그녀의 병원과 집을 방문하며 따뜻한 말동무 역할을 해왔었는데요.

한 방송에서 현미는 다음같이 눈물을 흘리며 슬픈 심경을 토로했죠. 

“지난번에 병원에 갔을 때 한명숙이 허리가 아파 누워만 있었다”


“퇴원했다고 해서 전화를 하니까 허리가 아파 밥도 못 차려 먹고 있다더라”

“나는 한명숙이나 혼자 사는 처지지만 최소한 나는 건강하지 않나?”

“그래서 가끔씩 한명숙의 집에 들러 먹을 것을 챙겨주고 밥도 해주고는 한다”

이런 심정을 밝힌 현미는 더더욱 노쇠해진 한명숙의 모습을 보자 결국 제작진에게 요청해 촬영을 거부하며 오디오로 촬영을 진행하였죠. 


한명숙을 기억하는 분들이 가슴 아파할 것 같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이날 현미는 한명숙의 간병인에게 “뭘 먹는지 몰라서 음식을 못 챙겼다”

  
“대신에 돈이라도 갖고 왔으니 언니가 좋아하는 것 좀 챙겨주셨으면 한다” 라는 말을 하자 한명숙은 오히려 현미를 걱정하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현미야 너도 돈 없는 거 안다 나 때문에 네가 고생할 필요가 없어” 이런 한명숙의 말을 들은 현미는 “돈이 없어 10만 원밖에 못 가져왔다”며 그렇게 간신히 눈물을 참고 건강하라 당부하고는 현관문을 나섰습니다. 

그리고 현관문을 나서자마자 자신의 참아왔던 눈물을 펑펑 터뜨렸죠. 

“그렇게 화려했던 한명숙이 이렇게 되자 너무 가슴이 아프다”며 오열을 했었죠. 


사실 현미 본인도 경제적 상황은 크게 다를 바 없었을 텐데 자신보다 남의 처지를 더 걱정했던 이유는 그녀가 따뜻한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60년대를 대표하는 화려한 스타였던 한명숙과 현미 이 두 명의 말년이 어찌 이리 비참한 처자가 되었는지 실로 생각만 하면 가슴이 아파옵니다. 


현미는 자신의 인생이 30대 후반부터는 비바람 치는 날씨였다고 비유합니다. 

현미의 고향은 평안남도 이북으로서 그녀는 8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었죠. 

일제강점기 시대에 태어난 그녀는 갓난아기 때부터 이미 동네의 스타였는데 어머니의 모유가 훌륭했던 것인지 우량아 선발대회에서 3등을 했다고 합니다. 

참고로 현미를 포함한 8남매 모두 우량아 선발대회에서 수상을 했다고 하니 다른 핏줄보다 좋은 유전자를 타고 남 건 틀림없는 사실인 듯 싶습니다.

노사연의 어머니였던 현미의 큰 언니는 북한에서 굉장히 유명한 춤꾼이었는데 당시로서는 가장 유명했던 최승혜 무용연구소를 다닌 인재였다고 합니다. 

동생 현미는 언니의 영향 덕분에 자연스럽게 본인 또한 무용에 빠졌고요.

그렇게 무용을 비롯해 연극과 노래 등 다방면으로 재능을 선보였던 현미는 국민학교 때 김일성 앞에 가서 공연했을 만큼 북한에서는 꽤나 소문난 인재였다고 전해집니다. 

그리고 6.25 전쟁 때 월남하여 남한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현미는 그 재능을 숨길 수가 없었는지 전 남편 이봉주에 의해 발굴된 스타가 되었죠. 


어찌 보면 결혼 사기를 친 이봉조에 의해 현미의 인생은 어려움에 빠졌던 것인데 실로 현미의 마음씨와 그릇은 보통의 사람 그 이상인 듯 싶습니다. 

평생 증후에도 모자를 전 남편이 봉조가 하루는 당뇨로 이가 다 빠진 모습으로 그렇게 틀니를 끼며 색소폰을 불자 현미는 그 자리에서 엄청나게 오열했다고 하죠.

이봉조가 마지막 소원으로 현미에게 재결합을 요구했을 때 그렇게 당해왔던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현미는 마음이 약해져 요구를 받아줬었고요.

그러나 이봉조 또한 심장마비로 인해 홀로 사망하며 재결합은 무산되었고 현미의 두 아들은 이봉조의 호적에도 못 올라 단 한 푼도 재산 상속을 못 받게 되었죠. 

그리고 이봉조와 이봉조의 본처묘를 흔쾌히 합장하며 명복을 기원해줬다고 하니 보통 사람들의 그릇으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인자한 성품을 보여줬습니다. 

나훈아의 후회

이런 고인의 소식에 나훈아는 다음 같은 심정으로 자신의 뒤늦은 후회와 슬픔을 전했습니다.

“현민 누님은 나보다 여덟 살이 많다. 그리고 나를 항상 예뻐해 주셨던 분이셨다”

  
“하지만 나는 현민 누님을 단 한 번도 누나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이런 나의 태도에 현미 누님은 ‘왜 누나라고 안 부르냐?’며 질책한 적이 있었다”

“내가 답하길 ‘우리가 한 배 속에서 나왔나요. 연애도 할 수 있는 나이인데 뭘 누나라고 불러요’라고 당돌하게 말하자 현미 누님은 기가 차서 놀라면서도 좋아하셨던 분이었다”

  
“누님도 남자들한테 들었던 말 중에 가장 설레였던 말이라고 웃기까지 하셨다”

“사실 나는 다른 선배 여가수들에게는 누나라고 종종 부르며 깍듯이 따랐었지만 워낙에 현미 누님의 노래를 좋아했고 항상 매력적인 분이라고 흠모해 왔었다”

  
“그래서 연애도 할 수 있는 나이라며 후배처럼 보이기만 싫어 당돌하게 말했던 것이다”


이처럼 현미를 흠모하던 나훈아는 갑작스러운 황망한 별세 소식에 너무나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식음을 전폐하며 통곡까지 했다고 전해지죠.

이처럼 나훈아마저 설레이게 만들었던 한국의 대표 디바 현미 선생님의 인생은 정말 따뜻하고 강했던 인생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