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세 최백호 충격 상황..가족들 연이어 사망..폐암 선고 받고 삐쩍 말라…

가수 최백호의 얼굴을 보면 그에게서는 어딘지 모르게 쓸쓸한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그가 오래도록 사랑받아온 이유 역시 노래가 좋아서도 있지만 또한 그만이 가진 말로 표현하기 힘든 특유의 쓸쓸한 느낌의 매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는데요. 


그런데 최백호는 실제로도 인생에서 곁에 있던 사람들이 자꾸 죽어버리는 너무나 안타까운 삶을 살아오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자신 또한 칠순을 넘기며 암까지 선고받으며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여야만 했던 가슴 아픈 순간도 있었는데요. 


최백호는 태어난 지 5달도 채 되지 않아 아버지가 죽게 되는데 그의 아버지는 사망 당시 갓 28살에 젊은 국회의원이었던 최원봉입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에 경북 김천 부근 다리에서 마주 오던 터키 군 수송 차량에게 추돌 사고를 당해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최백호가 태어나자마자 아버지가 죽자 그의 할아버지는 애비 잡아 먹은 자식이라며 최백호와 어머니 그리고 누나들까지 온 가족과의 인연을 단번에 끊게 되는데요.

할아버지는 부농이라 부유했지만 그렇게 인연이 끊어진 바람에 최백호의 가족들은 경제적인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고 이후 가난하고 힘든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결국 시골 초등학교 교사였던 어머니는 과부가 되어 홀로 딸 둘과 아들 하나를 키워야 하는 신세가 되었고 교사 월급이 워낙에 박봉이라 교사를 그만두고 부산에서 장사에 나서며 자식들을 힘겹게 먹여 살리시게 되는데요.

 
누나 둘의 외동아들이었던 최백호에게 어머니의 기대는 참으로 컸지만 그는 중고교 시험에도 떨어질 정도로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아 속을 꽤나 썩였던 아들이었다고 합니다.

최백호는 당시를 회상하며 “누님들은 공부를 잘했지만 나는 중학교 때부터 학교에 가는 걸 싫어했다”

  
“학교를 가려면 기차까지 타야 했다. 보니 매일 만화방에 앉아 있거나 그냥 바닷가로 가서 놀았다”


“동네 사람들이 그런 나를 보고 어머니한테 일러서 많이 혼났다”라고 말했는데요.

어머니는 막내 아들이자 장손이었던 그를 과잉보호하셨던 바람에 최백호는 세상 물정을 전혀 모르고 자랐다고 합니다. 

게다가 그는 천성적으로 부끄러움이 많고 소극적인 학생이기도 했는데요.

중학교 1학년 입학식 날 부산으로 통학하는 기차 안에서 콧날이 오똑하고 눈이 크고 얼굴이 하얀 단발머리 소녀를 보게 되지만 이후 3년간 말 한마디도 못해보고 가슴 앓이를 하며 매일 밤마다 공부도 안 하면서 보내지도 못하는 편지를 그렇게 썼다고 합니다.

 
자신의 작사 실력이 그 때 쌓였다는 최백호는 하지만 원래 가수가 되리라곤 꿈도 꾸지 못했는데요.

그는 원래는 미대를 진학하려던 학생이었고 기타 연주도 혼자서 막 배워서 정석으로 배운 실력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당시 누나 두 명을 교육시키던 어머니는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막내 최백호를 대학에 보낼 수가 없었고 최백호는 대학에 합격했지만 등록금이 없어서 입학을 포기한 채 일단 재수를 하게 되는데요. 

그러던 중 그에게 너무나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지게 되는데 바로 그의 어머니가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신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자식들을 키운다고 고생만 하시다가 최백호의 나이 고작 스무살에 그만 암으로 별세하고 마셨는데요.

당시 그는 모든 게 자신의 탓인 양 회한이 밀려와 사흘 밤낮을 내내 울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부모님 두 분을 모두 잃게 되자 최백호는 어릴 때부터 “죽음이란 게 우리 삶의 끝에 있는 게 아니고 항상 주변에서 같이 가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또한 이때 그는 돌연 군 입대를 결정하게 되는데 원래 아버지가 안 계셔서 군대는 가지 않아도 되었지만 최백호는 너무 슬픈 나머지 현실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군대로 도피를 선택했던 것인데요. 

그런데 강원도 원주에서 제일 하사관학교 조교로 군복무를 하던 그에게 그만 또 슬픔이 찾아오게 됩니다.

바로 그가 군 복무 중 결핵에 걸리게 된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를 여의고 잠잘 곳과 먹을 방법이 없었던 최백호는 거기에 슬픈 마음까지 잊고 싶어서 군입대를 선택했던 건데 당시로서는 사망률이 아주 높았던 무서운 병에 그만 걸리게 된 바람에 1년 만에 의병 제대를 하게 되는데요.

결핵 환자 보상금으로 고작 11만 5천 원을 받고 쫓겨나듯 제대를 한 그는 사회에 나가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걱정 때문에 막막하고 절망적인 상황에 부딪히게 됩니다. 


제대 후 일단 미술 취미를 살려 극장에서 영화 간판을 그리는 일에 나선 최백호


극장에 들어가면 바로 영화 간판을 그리는 줄 알았던 그는 하지만 밑그림 그리고 라인을 긋는 일만 시킨 바람에 일주일 만에 그만두게 되는데요. 

당시 남아 있던 가족들인 누나들도 모두 흩어져 있었기에 이후 최백호는 부산의 해수욕장 인근에 가장 싼 방을 구해 혼자 요양을 하다가 그마저도 가진 눈이 다 떨어지자 산속에 들어가서 오두막을 지어서 생활하게 됩니다.

2년이나 계속되었던 암울했던 시기에서 그는 홀로 산속에서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며 아픈 마음을 달래게 되는데요. 

긴 요양으로 차츰 건강을 되찾게 된 최백호는 이후 생계를 위해 친한 친구의 매형이 운영하는 한 라이브 클럽에서 노래를 시작하게 됩니다. 

당시 아마추어였던 그는 노래를 좋아해서 클럽 무대에 오르긴 했지만 직업으로 삼을 만한 수준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는데요.

친한 친구 한 명이 노래를 워낙 잘해서 노래 실력에 있어 그 친구와 너무나 비교가 되었고 자신은 그저 밤에 업소에서 일을 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이라고만 생각했다는 최백호 

게다가 한동안은 생계를 위해 하루 저녁에 7~8 군데나 되는 업소에서 노래를 하기도 했다보니 그는 이게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니라 그냥 소리만 지르다가 오는 느낌까지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한 제작자의 눈에 들어온 최백호는 당시 대형 음반사였던 서라벌레코드와 계약을 하며 1977년 데뷔곡 ‘내 마음 갈곳을 잃어’를 발표하고 본격적으로 가수 인생에 들어서게 되는데요. 

이 노래는 당시 크게 사랑을 받으며 최백호를 mbc 가요제 신인상 수상자로까지 올라설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당시 헤어진 연인에 대한 그리움을 그린 노래로 알려졌던 이 곡은 사실 최백호가 어머니를 그리면서 가사를 쓴 곡이었는데요. 

최백호는 최종혁이라는 작곡가 형님과 어느 날 술을 먹다가 이것도 노래가 되겠느냐며 자신이 쓴 글을 건넸는데요.

최종혁은 며칠 뒤 가사에 멜로디를 붙여왔고 피아노 연주로 노래를 듣는 순간 최백호는 소름이 쫙 돋았다고 합니다.

최백호는 문학 공부를 한 적은 없었지만 자신이 가사를 쓰는 능력을 갖춘 것이 돌아가신 어머니가 외동 아들이 걱정되어 물려주신 선물이 아니었나 생각한다는데요. 

이후 ‘영일만 친구’ 등의 연이은 히트로 가수로서 명성을 떨친 최백호는 지구레코드로 소속사를 옮기며 거액의 계약금도 받게 되는데 당시 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있었던 900만 원이라는 돈을 현금으로 받았는데요.

은행 계좌 여는 법도 몰라 하숙집 이불 밑에 두고 조금씩 꺼냈었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계셨더라면 이런 부분들을 다 챙겨주셨겠지만 그렇지 못했다보니 최백호에게는 어머니의 부재가 더 애틋하고 힘들게 느껴졌다고 하는데요. 


뒤이어 그는 당시 최고의 배우였던 김자옥과도 결혼하게 되는데 행복할 줄 알았던 결혼 생활은 서로 간의 성격 차이가 불거지는 바람에 3년 만에 이혼으로 끝을 맺게 됩니다.


게다가 인기라는 건 거품 같아서 전성기를 한 번 찍더니 이후로는 인기를 얻지 못해 긴 슬럼프까지 겪게 되는데요. 

김자옥은 후에 오승근과 재혼했다가 2014년에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최백호는 아버지와 어머니에 이어 잠시나마 함께했던 전부인마저도 일찍의 하늘로 떠났던 곳이었습니다.

게다가 최백호는 sbs 라디오에서 오랫동안 dj를 맡아오고 있는데 과거 자신의 방송 전 시간대에 하는 프로의 진행자가 공교롭게도 김자옥의 동생이었던 아나운서 김태욱이었습니다.

이에 김태욱마저도 김자옥이 세상을 떠난 지 몇 년 후에 자택에서 사망하는 바람에 최백호는 자신과 인연이 있던 사람들이 일찍 죽음을 맞이하는 참으로 불길한 일들을 경험하게 되는데요. 


김자옥과 결별 당시 최백호는 이후 콘트라 베이스 악기를 전공하던 10살 연하의 지금의 아내인 손소인 씨를 만나게 되는데요. 

처음엔 ‘어떻게 감히’라는 생각이 들어 손소인 씨를 쳐다도 보지 못하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더욱 마음이 끌리게 되었고 결국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결혼에까지 골인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던게 처가에서는 이미 한물 간 가수 최백호에 대해 극심하게 반대를 했고 급기야 장인어른은 결혼식에 참석도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게다가 최백호는 떨어진 인기 때문에 결혼 후 1년 동안 단돈 10원도 가져다 주지 못한 바람에 이후 생계를 위해 미사리 라이브 클럽을 수년간 전전하게 됩니다. 

당시 최백호는 손님이 던지는 수박 껍질과 땅콩을 얼굴에 얻어 막기까지 하자 너무나 서러워서 선배 가수 최희준에게 하소연도 해 봤지만 최희준은 “야 네 출연료에 수박 맞는 값도 다 들어있어. 참아야지 뭘”라고 했다는데요.


당장을 살기 위해 기계적으로 노래를 불렀지만 희망도 없고 몸과 마음이 지쳐가자 그런 그에게 누군가 미국행을 제안하게 되었고 최백호는 가족들과 짐을 꾸려 미국으로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사는 환경이 달라진다고 어려웠던 사정이 나아지는 건 아니었는데요. 

미국 한인 라디오 방송에서 dj도 했지만 해당 방송국이 없어지며 그는 결국 2년 만에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이후 어느 날 방 너머에서 설거지를 하는 아내의 뒷모습을 보며 ‘내 첫사랑도 저렇게 설거지를 하고 있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던 최백호는 뭔가에 홀린 듯이 노래를 만들어내는데요.

이렇게 탄생한 노래가 바로 ‘낭만에 대하여’였습니다.


이 노래는 당시 주말 드라마 ‘목욕탕집 남자들’에 삽입이 되는 행운으로 큰 인기를 끌게 되었고 40대가 훌쩍 넘어 전성기가 지나 퇴물 소리를 듣던 그에게 다시 한 번 제2의 전성기까지 가져다 주게 됩니다.


그렇게 늦은 나이에 다시 맞이한 인기로 결국 최백호는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는데요. 

하지만 걱정이 하나 줄자 다른 걱정거리가 하나 생기게 되는데요.

그것은 바로 자신의 딸과의 어색한 관계 문제였습니다. 

최백호는 아내와의 사이에 딸이 하나 있었는데 아내의 처가가 미국에 있다보니 아내는 자식을 미국에서 공부시키기를 원하게 되는데요.


어릴 적부터 가족과 뜻하지 않게 이별하며 살아온 최백호는 딸과 떨어지는 것을 강하게 반대했지만 결국 아이 엄마의 뜻대로 딸은 일찍이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공부를 하며 자라게 됩니다. 

이후 시간이 흘러 딸은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게 되었지만 아니나 다를까 오래간만에 만난 아버지와 어색한 나머지 마치 남처럼 거리를 두게 되는데요. 

최백호는 그간 머나먼 한국에서 늘 딸 생각만 하면서 살았는데 딸은 아버지를 너무나 불편해했던 바람에 그렇게 남보다도 못한 관계로 지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이후 최백호가 적극적으로 많이 노력하며 서로 싸우기도 하고 이야기도 많이 나눈 끝에 간신히 관계를 회복할 수 있게 됩니다. 


부녀가 정상적인 관계까지 회복이 되는 데는 무려 2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고 하는데요.

게다가 이 시기에 최백호는 또 한 가수의 죽음과 관련된 일에 얽히게 되는데 그가 대한가수협회 부회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유니라는 젊은 여가수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되자 역시 젊은 가수인 김진표가 대한가수협회의 가수들에 대한 무관심을 비판하게 되었는데요.

부회장이었던 최백호는 김진표의 주장에 반박 입장을 내놓게 됩니다. 

최백호는 “유니가 대한가수협회에 가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회원의 개인사까지는 협회가 챙기기 어려웠고 그럼에도 도의적으로 화한을 보내 애도의 뜻을 표했다”고 반박했는데요.

또한 “그동안 가요계에 아픈 일들이 많았는데도 김진표라는 가수는 현장에서 보지도 못했다”며 김진표가 모든 가수들을 싸잡아서 비난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따끔한 충고를 했습니다. 


그렇게 한바탕 설전을 치르고 난 최백호는 이후 나이 70을 목전에 두고 그만 폐암 선고를 받는 바람에 결국 자신의 죽음까지 준비를 하게 되는데요.

이 세상에 출생하자마자 아버지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해서 그간 인생을 살아오며 자신을 둘러싼 많은 이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아왔던 최백호였지만 정작 본인이 죽을 위기에 처하자 ’60대까지만 해도 별로 실감 못했던 자신의 죽음도 이제 현실이 됐구나’라고 느끼게 됩니다.


이전까지는 죽음에 대해서 정말 초연하게 받아들일 자신이 있었던 최백호는 막상 죽음이 닥치니까 심한 마음고생으로 15일 만에 무려 8킬로나 빠지게 되는데요. 

병원에서 의사가 폐암일 수도 있으니 다시 한 번 검사를 받아보라고 해서 받게 된 최백호는 결과가 나오는 날 의사가 아침 10시 30분쯤에 전화를 준다고 해서 새벽부터 기다리는데 그 시간이 정말 엄청 길더라고 애가 타는 마음이었음을 고백했습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의사로부터 전화를 받게 된 최백호 그는 당시 천만다행으로 폐암선고는 오진이었고 ‘비결핵성 항산균 폐질환’이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는데요. 

사람을 완전히 반 죽음까지 보내놓고는 이상이 없다고 하니까 일단 안도의 한숨을 쉬긴 했지만 최백호는 그 일을 계기로 사람의 죽음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그는 밝히길 “생이라는 것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가난하거나 부자거나 상관없이 대단한 걸 얻어서 누리고 있다”

  
“몸이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살아있는 게 고마웠다”며 삶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혔는데요.


그러면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일찍 세상을 떠나 죽음에 대한 공포가 어렸을 때부터 있었다”

  
“살아있는 게 너무 소중하고 얼마나 귀한 걸 누리고 있었는지 나이가 70 넘으니 깨닫게 됐다”

  
“60대와 또 다른 나은 어른이 돼 가고 있다”며 삶에 대해 깨달은 말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또한 “60대만 해도 가난한 옛날로 돌아갈까 봐 항상 불안하고 잡다한 생각이 많았다”

“이젠 정리가 되고 편해졌고 눈앞이 아닌 전체를 볼 줄 알게 되었고 그 덕분에 80이 되면 더 좋은 노래를 쓸 것이고 그렇게 90대까지 품위 있게 노래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늦은 나이에 전성기를 맞이했기 때문에 모든 일은 서둘러서는 되지도 않고 천천히 기다리다 보면 팔자대로 풀리게 되는 것이라 말하고 있는데요.

최근 가수 김호중으로부터 롤모델로 추앙받은 데 이어 방탄소년단의 한 멤버가 힘들 때 위로를 받은 곡으로 최백호의 노래를 소개해 화제가 되었던 가수 최백호

그가 앞으로도 지금처럼 편안하고 여유 있게 그리고 오래도록 우리 곁에서 좋은 노래를 들려주기를 바라며 그의 행복하고 건강한 노년을 기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