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기 강호동조차 벌벌 떨었던 백두대호 김학용 향년 72세 별세..병상에서 남긴 마지막 한 마디에 강호동 이만기 오열…


강호동이 전성기 시절 유독 무서워하는 단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백두대호 김학용 감독입니다. 

백전무패 적수가 없던 이만기를 강호동이 이길 수 있게 만든 감독이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씨름의 인기는 많이 죽었지만 각종 해외 무술이 등장하기 전에 전통적으로 당시 씨름은 길거리 싸움에서 최강이라고 불릴 정도로 사람들에게는 흥미로운 스포츠였습니다. 


몸의 중심과 회전을 이용해 상대를 넘어뜨리는 기술이냐? 체중과 힘으로 이기는 힘 씨름이냐? 갑론을박하는 경우가 많았는데요


힘과 기술 모두를 겸비한 이만기가 세상에 등장하자 천하장사 10패를 달성하며 통산 전적 293승 52패 승률 84%를 기록한 이만기를 강호동이 이기는 사건이 일어나죠.

일양약품 김학용 감독은 신예 강호동을 내세워 극적인 승리를 하는데요.

백두대호 김학용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타고난 강골

새끼 호랑이 시절 김학용 감독은 1935년 태어나 1950년대부터 60년대까지 전국 씨름 선수권 대회에서 3연패를 달성하며 당대 최고의 장사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체형 자체가 정말 강골에다가 힘도 엄청났던 김학용 감독은 중학교 때 쌀 1포대 80kg짜리 두 가마를 너끈히 들어 옮겼다고 합니다.


여담으로 60이 넘은 나이에도 손아귀 악력은 그 누구도 이길 수 없었으며 워낙 힘이 장사였던 터라 환갑의 나이로 130kg이었던 강호동을 들어 매치는 세리머니를 한적도 있습니다.

성인이 되어서는 씨름판에서 황소를 쓸어갔는데 전국 장사씨름 대회에서 21회 우승을 했습니다. 


이때 황소를 건네는 사람이 놀랍게도 깡패 이정재입니다. 


이정재도 씨름 선수 출신이기도 하며 7대 씨름협회장이었습니다. 

사실 이 당시도 그랬지만 80~90년대에 들어서는 씨름은 인기가 많은 종목이었기에 그들의 이권 노다지라고 불렸고 그래서인지 수원파 두목 최창식과 칠성파 두목 이강환이 씨름계의 협회장과 부협회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인기가 많았나 봅니다. 

김학용은 60년대가 들면서 선수 생활을 끝을 내고 사업에 매진하게 되는데요.

사실 운동 선수가 사업을 하거나 장사를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결정입니다. 

새로운 분야의 개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업가로 활동하시기에 사업가로서 초반에 많은 고전이 있었다고 하죠.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80년 이전까지 씨름판을 떠나 있으면서도 항상 씨름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만기 이겨보자

사람의 욕구 중 마지막 단계는 존중과 자아 실현이라고 하죠. 

김학용은 80년대부터 씨름판에 복귀해서 새로운 자아 실현을 시도합니다.

 
민속 씨름 위원회의 심판위원장으로 활동하게 되죠. 


심판위원장으로 활동 중에 문득 사람들은 김학용 감독을 만날 때마다 이야기합니다. 

“요즘 씨름이 재미가 없습니다. 이만기가 다 해먹으니 말이죠”


“김학용 씨 당신은 원래 전국 씨름 대회 우승자 출신 아닙니까?”


“심판이 아니라 사람을 가르치면 황경수 감독의 제자 이만기를 넘어설 수 있지 않겠느냐?”라는 말에 그때 김학용 감독은 “내가 보여주지”라고 다짐합니다.

 
김학용 감독은 1989년에 일양약품 2대 감독으로 취임하게 됐고 무명의 강호동을 발굴해 천하장사로 만듭니다. 

이때 강호동이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말하기를  “당시 여자친구를 한 번도 만나본 적 없이 훈련에 매진할 정도로 정말 힘들었다”고 하죠.

또 “세상에 제일 무서운 것이 있다면 감독님이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렇게 강호동의 운동 신경을 최대한 끌어올려 당시 체중 130kg, 100m 달리기 12초, 벤치프레스 160kg, 스쿼트 250kg 괴물을 만듭니다. 


하지만 당시 적수가 없던 이만기에게 강호동이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말도 많았는데요.

이만기가 기술과 힘은 완벽했지만 단 한 가지 약점이라면 아마 멘탈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이만기가 얼마 전 방송에서 밝힌 바 있죠.

김학용 감독이 말하기를 “야 호동아 너는 무슨 수를 써도 이만기는 못 이긴다 그런데 딱 한 가지 방법이 있다”

 
“만기의 성질을 건드려라. 그럼 이길 수 있다”


그 때문인지 강호동의 함성 소리는 더어져갔고 먼저 무릎 꿇지 않는 강호동의 행동은 이만기의 멘탈을 공격하는 데 안성맞춤이었습니다. 

그 이후 강호동은 5번의 천하장사를 획득하며 씨름계의 새로운 간판이 됩니다.

하지만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강호동이 갑작스럽게 은퇴한 후 한국 프로 씨름계는 급격한 몰락의 길을 걷게됩니다.

프로 씨름계의 몰락과 함께…

백승일, 이태현, 신봉민, 김경수, 황규연 김영현 등이 1990년대 중후반 씨름판을 이끌어갔지만, 이만기와 강호동이 호령하던 시절의 카리스마와 스타성에는 한참 미치지 못했죠.

1990년대 내내 씨름의 인기가 점점 떨어지며 대회 스폰서가 떨어졌습니다.

한 때 10팀이 넘어가던 프로팀은 결국 최홍만이 속해있던 LG투자증권이 2004년 마지막으로 해체되고 신창건설 씨름단마저 2006년 초에 해체되며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됩니다. 

김학용은 2000년 씨름계에서 완전히 은퇴하며 평소 앓던 당뇨병과 췌장암으로 인해 병상에서 예전에 비해 한없이 초라해진 씨름판의 현실을 지켜보며 너무나 안타까워했다고 합니다.

김학용과 절친했던 이준희 감독은 스승이었던 고인에 대해

“씨름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열정이 대단했던 분이었다”

“작년 12월께 선생님을 뵈었는데 씨름 걱정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셨다고 한다. 많이 수척해보이셨다”

“그 때 고인은 ‘씨름인들이 합심해 꼭 모래판을 살리자’라는 말을 강조했다”고 밝혔습니다.


김학용은 결국 2007년 향년 72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합니다.

 
민족의 스포츠 씨름에 대해 평생을 생각한 김학용 감독은 씨름을 정말 사랑했던 사람이 아니었나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