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버틴 ‘뽀빠이’ 이상용의 충격적인 근황…이제 방송 못 나오나? 거짓 인성 논란에 결국 실체 밝혀져…


1980년 <모이자 노래하자> 녹화장으로 선생님 한 분이 어린 제자를 데리고 뽀빠이 이상용을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선생님이 말하길 “얘가 선천성 심장병을 앓고 있는데 아이의 아버지는 천식으로 일을 할 수 없고 어머니가 시장에서 장사하며 홀로 6남매를 키우고 있다”

  
“수술 안 하면 죽는다 아이 좀 살려달라”는 말에 이상용 군은 두 말 않고 바로 “그렇게 하자 알겠다”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이와 함께 서울대병원에 갔는데 수술비가 1800만 원이라는 말에 그는 기절할 뻔했다고 했습니다. 

당시 10평짜리 아파트 값이 1천만 원이었고 이상룡 그는 650만 원짜리 전세에 살고 있었는데 자신의 전세금 3배에 달하는 수술비를 선뜻 지원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이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본인도 어린 시절 병약한 몸으로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었기에 그 아이의 비극은 남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그동안 이미지 관리하느라 야간 업소 출연을 고사하고 있었는데 그때부터 밤업소 세 군데를 다니며 바자회도 하고 돈도 빌리고 발로 뛰면서 결국 수술비를 마련했다고 했습니다. 

이상용의 지원으로 아이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마쳤으나 문제는 그다음이었다고 했습니다. 


수술을 받은 아이의 아버지가 감격해 방송에서 뽀빠이 이상용이 무료로 수술을 해줬다고 밝히자 전국의 심장병 어린이 부모들이 우리 아이도 수술을 해달라며 이상용의 집으로 몰려왔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 수많은 아이들을 돕는다는 것은 감당하기 어려웠고 대신 한국 어린이 보호회를 만들어 한 명씩 수술해 주겠다고 약속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사무실을 내고 16년 동안 567명의 심장병 어린이에게 새 생명을 찾아주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16년 후 1996년 11월 4일 한 방송사에 뽀빠이 이상용의 충격적인 사건이 폭로되었다고 했습니다.

“뽀빠이 이상용이 심장병 어린이 수술을 빌미로 국민들의 성금을 받아 가로챘다”

“40억 원 호화주택에 산다, 벤츠를 탄다, 후원금 빼돌려 땅 1만 평을 샀다” 등 어마어마한 폭로 기사가 터져 나왔다고 했습니다. 


너무나 엄청난 사건이라 국민들은 충격에 빠졌고 이상용에 대한 배신감으로 한국 땅 덩어리 전체가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1996년 말 국민들은 그의 만행에 연일 분노했으며 심장병 어린이를 돕던 선량하고 존경받던 인물에서 국민을 상대로 사기친 희대의 파람치범으로 그렇게 뽀빠이 이상용은 철저하게 침몰되었다고 했습니다.

시간을 거슬러 1987년 이상룡 그는 심장병 어린이 돕기의 약속을 지킨 결과 ‘국민훈장 동백상’ ‘카톨릭 봉사대상’ 등 그의 헌신에 대한 보답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의 그런 선한 이미지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이상용이 국회의원에 출마하면 무조건 당선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여기저기에서 그에게 정치를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이 들어왔지만 그럴수록 그는 정치가 싫어졌다고 했습니다.

사실 이상용은 체질적으로 정치를 싫어하는 사람이었고 또한 그에게는 신성한 약속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천주교였던 이상용이 전 교황 바오로2세를 만나게 되는데 그 때 교황에게 말하길 “평생 어린이를 위해 사셨던 방정환 선생님처럼 살게 해달라”고 말하자

교황이 이상용에게 말하길 “그렇다면 절대로 정치는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라. 그 약속을 한 다음에 3일 동안 당신을 위해 기도해 주겠다”라고 했습니다.

그에게 교황과의 약속은 하나님과의 약속과 마찬가지였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정치를 멀리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심장병 어린이를 돕던 이상용에게 어느 날 검은 손길이 다가왔다고 했습니다. 

당시 대통령의 측근 김 모 씨였으며 김 모 씨는 당시 소통령이라고 불릴 정도로 위세가 막강했고 사회 사업가로 명성이 높은 이상용을 내보내기만 하면 국회의원으로 당선될 수 있다고 계산을 했기 때문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여당 고위층으로부터 고향인 대전의 국회의원 출마를 권유받았지만 하지만 공천 제의에 이상용은 단번에 거절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가 출마를 거부하자 그것이 권력자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고 그를 그냥 놔두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결국 근거도 없이 권력기관들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1996년 11월 3일은 이상용 그에게 전쟁 같은 날이 다가오게 됩니다.

어느 날처럼 우정의 무대 녹화가 끝나고 돌아오니 언론에 이상윤 그가 아주 몹쓸 놈으로 보도되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벤츠를 타고 40억짜리 집에 살고 심장병 어린이를 한 명도 수술하지 않았다는 소설 같은 기사였지만 사실 이상용 그는 당시 20년 된 지프차를 타고 있었고 살고 있는 집은 융자금이 막 상한이 끝난 상태였습니다.

1996년까지 수술받은 심장병 어린이가 567명이었다고 했습니다.

하루아침에 방송에서 퇴출된 이상용은 집 밖을 못 나갔고 그가 시작부터 함께했던 <우정의 무대>는 아예 폐지되었다고 했습니다. 


대전역 앞에서 “우리 아들은 그렇지 않다”며 프린트물을 돌리던 그의 아버지는 그 충격으로 돌아가셨고 그리고 이상용 그도 너무나 원통하고 억울해 이때 충격으로 왼쪽 눈이 실명되었다고 했습니다. 


당시 권력기관들이 총동원되어서 심장병 어린이 재단을 탈탈 털었지만 이상용의 공금 횡령은 전혀 없었고 애초부터 사실무근이었으며 그리고 재단이라고 하지만 사실 대부분의 돈은 이상용 개인의 재산으로 운용되었던 재단이었다고 했습니다. 


결국 시퍼런 칼을 휘둘러대는 검찰은 뽀빠이 이상용의 심장병 어린이 돕기 성금 유용 혐의에 대해서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고 했습니다. 

방송사들은 이상용을 완벽하게 무너뜨리고 난 다음 비겁하게도 언론에는 단 한 줄도 뽀빠이의 무혐의 사실이 보도되지 않았고 그나마 무혐의 사실을 보도한 유일한 J일보는 세 줄짜리 짧은 기사로 내보냈다고 했습니다.

지금도 많은 국민들이 뽀빠이 이상용이 심장병 어린이 성금을 횡령하고 구속되어 형무소에서 복욕하고 출소한 줄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상용 그도 그지만 그가 무너지자 무엇보다 안타까운 사람들은 수술 날짜를 잡고 기다리던 심장병 어린이와 가족들이었다고 했습니다. 

수술을 기다리던 어린이들은 입술이 새파해진 채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지만 이미 뽀빠이 심장병 어린이 재단의 숭고한 사랑의 행위는 어쩔 수 없이 멈추고 말았다고 했습니다.

당시 모두가 이상용을 외면할 때 김수환 추기경과 법정 스님은 그를 믿고 지원해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가 충격에 시력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평소 그를 닦기던 김수환 추기경이 말하길 

“눈이 덮였으니 쓸지 말고 떠나라 봄이 오면 눈이 녹고 너는 나타난다”

“하늘이 너를 더 크게 쓰시려고 아픔을 준 거니까 떠나라”고 했고 그 말을 마음속에 새기고 이상용 그는 수중에 남은 돈 20만 원을 가지고 미국으로 떠났다고 했습니다.


미국 서부로 건너가 그가 나온 고려대 출신이 대표로 있는 여행사에서 관광 가이드로 일하며 생활비를 벌었다고 했습니다. 


하루에 관광버스를 13시간씩 탔으며 그리고 한국 여행객을 붙잡고 자신의 억울함을 알리자 사람들이 고맙게도 

“억울하겠다. 우린 다 안다”며 그에게 팁을 많이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관광 가이드를 하면서 라스베거스를 수없이 갔지만 슬롯머신 한 번 안 했으며 2년간 팁 9000만 원을 모아 딸을 시집 보냈다고 했습니다.


그가 관광버스 탑승 후 관광객이 2배쯤 늘었지만 국민들이 당신을 보고 싶어 한다는 아내의 한마디에 귀국을 결심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한국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세상에 선뜻 나갈 용기가 없어 전남 구례 비닐하우스에서 상추 마늘 농사를 짓고 경남 일대에서 꽃모종을 심으며 지냈다고 했습니다. 

당시 그의 일당 3만 원이었고 그 돈으로는 생활이 불가능해 가족에게 가장의 의무를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엉엉 울었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그에게 손을 내민 동료들이 있었고 개그우먼 문영미와 녹음한 <이상용의 폭소 열차>는 그렇게 세상에 나온 음반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cd를 들고 직접 휴게소 화장실 앞에서 팔았으며 손님을 앞에 두고 즉석 개그도 했다고 했습니다. 

지나가던 분들이 신기해하며 “요즘은 잘 지내냐?”며 걱정과 응원 그리고 cd도 많이 사주었다고 했습니다.

cd를 많이 팔긴 했지만 가게에 큰 보탬이 되지 못했고 그래도 이 덕에 소식을 듣고 전화가 오게 되는데 당시 춘천 mbc 사장 유수열 씨가 “상용아 와라 나는 너 안다”라며 말했고 그렇게 <강원 매거진>이 이상용의 방송 복귀작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상용 그에게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라는 질문에 그가 말하길 “집은 20평 건강은 80평 행복은 150평에 사는 사람입니다”

“이상용의 인생을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이라는 질문에 그가 말하길

“1억 원입니다. 파란 지폐 만 장이면 1억입니다. 나의 인생은 파란만장 했으니까”라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