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별세한 향년 45세 故 김형곤, 전 부인 직접 입 열어…”사망원인 심근경색 아니다”, 그의 전 재산 행방

때때로 우리는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미스터리한 사망 소식을 듣게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풍자적 농담으로 유명한 김형곤 역시 구체적인 사망 이유가 드러나지 않은 채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데요.

당시 그가 떠난 후 전 부인의 충격적인 행보도 화제가 되었죠.

과연 김형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정치권과의 악연


1960년생 김형곤은 1980~90년대 왕성하게 활동한 개그맨입니다.

김형곤은 1980년 데뷔하자마자 ‘젊음의 행진’, ‘청춘의 토요일’ 등에서 통통한 몸매와 동그란 얼굴, 재치 있는 입담으로 큰 인기를 끌었고 서세원, 주병진과 함께 가장 인기있는 개그맨으로 손꼽혔습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유머 1번지’라는 프로그램의 코너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 ‘탱자 가라사대’, ‘꽃피는 봄이 오면’ 등의 코너에서 시사 개그를 선보이며 사회적 붐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그는 개그 코너를 통해 사회 풍자를 하게되면서 정치권의 압박을 받게 되는데요.


그가 선보이는 개그 중 절반은 항상 편집되었고, 안기부에 강제로 끌려가 얼차려를 받기도 했습니다. 


또한 김형곤은 어릴 때부터 성소수자의 권익 보호에 앞장서 왔습니다. 

항상 음지에 사는 이들을 돕고 싶은 마음에 그들을 위해 목소리를 높였지만, 이로 인해 부부가 운영하는 술집은 퇴폐업소로 몰려 구속 영장을 발부받는 등의 시련을 거쳤죠.

정치권에서 그들을 풍자하는 김형곤을 눈엣가시로 여겨 협박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평소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이 많은 김형곤은 16대 총선이 치러진 2000년 무소속으로 성동구 국회의원 선거에도 참여했는데요.

하지만 결과적으로 낙선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아닌 친구로…

낙선의 아픔도 채 가시기 전 그는 이혼의 아픔도 겪어야 했는데요.

선거에서 패한 직후 정치권에 입문하는 것에 대해 끝까지 말렸던 부인과 김형곤의 갈등은 극심해진 것이 주된 이혼 원인이었습니다.

이혼 후 김형곤은 너무나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특히 당시 6살 난 아들이 눈이 밟혔죠.

‘김형곤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아이는 사람들의 지나친 관심을 받아야 했고 이로 인해 한국에서 아이를 키우는 것조차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눈물을 머금고, 6살 난 아들을 영국으로 유학 보내야 했습니다.

한편 김형곤은 이혼 후에도 전 부인을 친구처럼 대했고 아들도 최선을 다해 케어해주려 했는데요.

그는 영국에 있는 아들과 함께 머물기 위해 한국과 영국을 왔다갔다하며, 아들과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의 전 부인 정유진은 

“아들 아빠와 저는 한 달에 한 번 영국에 번갈아가며 방문합니다”

“저는 15일쯤 머물다 집에 갔고, 아들 아빠는 10일 정도 머물렀어요.”

이어 “이혼 후에도 시어머니와 많이 만났고, 전화 통화도 자주 했어요

“비록 이혼했지만, 전 남편과 친구처럼 잘 지냈습니다”라며 당시를 회상했습니다.


두 사람은 결별했지만 자녀를 매개로 서로의 가족들과 끈끈한 관계를 유지했는데요.

이 부분은 김형곤이 죽은 후에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전 부인 정유진이 김형근의 개그 극장을 직접 맡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김형곤의 형은 “동생이 대학로에 극장 등 유산을 아내에게 물려줬어요”

“아내와 이혼했지만 아들을 돌봐주는 전처에게 동생의 유산을 물려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고인의 전 부인에게 극장을 포함한 모든 자산을 등기했습니다”라고 밝혔습니다.

이혼한 전처에게 유산까지 물려주다니…참 쉽지않은 선택을 한 김형곤이 대단해보입니다.

후배를 위한 선행을 아끼지 않았던 군기반장 김형곤


그는 자신보다 한참 아랫 기수인 후배들에게도 정말 잘해줬던 것으로 알려져있는데요.

후배인 양희성이 계속 무명으로 사는 것이 안타까워 정신적, 금전적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물론 군기가 강한 개그계에서 그는 군기 반장으로도 유명했습니다.

군기를 잡을 때는 확실히 잡는 편이었다고 합니다.

1985년 최양락이 반말을 하자, 동료들과 함께 찾아가 그를 혼내놓은 일화도 전해지고 있죠.

1991년 후배 서인석의 앞니를 부러뜨리기도 했었는데요.

까마득한 후배들을 위해 은혜를 베풀 줄 아는 선배였지만, 다소 과격한 면도 있었던 선배였던 것 같습니다.

당시 김형곤의 은혜를 받았던 조원석과 양희성은 김형곤의 부고 소식에 매우 가슴 아파했습니다.

갑작스러운 죽음…사인은


김형곤은 2006년 3월 11일 향년 45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김형곤은 사우나에서 땀을 흘리며 운동을 하던 중 사고를 당하게 되었는데요.

그의 원래 습관은 운동을 먼저 하고 사우나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날 김형곤은 갑자기 운동 습관을 바꿨는데요.


이후 그는 화장실에서 앞으로 넘어져 이마가 함몰될 정도의 중상을 입게 됩니다.

하필 주변에 사람이 없어, 1시간 넘은 뒤에야 사람들에게 발견되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발견된 직후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이미 너무나 늦은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4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의 죽음 이후 그를 진찰한 병원은 “심근경색이나 심부정맥으로 인한 급성 심장마비 가능성이 높다”고 발표해, 그의 사인은 심장마비로 추측되었는데요.

일부 전문가들은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김형곤의 사인은 심장마비가 아니라 뇌출혈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특히 김형곤은 최근 몇 달간 신체검사에서 특별한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으며, 평소 헬스 등으로 건강관리도 잘 하고 있었다”

“콜레스테롤, 혈압, 혈당 등 모든 것이 정상이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경찰 측에서는 “구급차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세상을 떠난 상태였고, 타인의 혐의점은 찾을 수 없어 돌연사로 결론지었다”라고 밝혔죠.


이후 부검이 이뤄지지 않아 김형곤의 사망 원인은 영원히 풀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김형곤은 데뷔 초부터 비대한 몸으로 인해 ‘삼겹살’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고 하는데요.

무려 몸무게가 120kg에 육박했었다고 합니다

심한 비만으로 인한 당뇨병 등 몸에 이상이 있음을 느껴 다이어트를 시작하기로 마음 먹은 후

금연 금주는 물론 생식을 하는 등 식단관리에 신경쓰고,


헬스장에서 하루 2시간씩 운동을 해서 살을 뺀 결과 1달만에 13kg을 감량했었다고 하는데요.

일각에서는 무리한 운동이 사망 원인이 아니냐는 추측도 했었죠.


개그맨 이용식은 “형곤이는 평소 다이어트에 대한 집착이 매우 컸다”라고 말하며

“사망원인은 과도한 운동이었던 것 같다”고 덧붙였습니다.


엄용수는 “김형곤은 화장실에 오래 머무는 습관이 있었는데, 이 습관이 그의 목숨을 앗아가는데 큰 역할을 한 것 같다”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개그우먼 김형곤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만들었습니다.

사망 후 고인의 뜻에 따라 시신은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에 기증되었는데요.


기부 문서에 서명한 전 부인 정유진 씨는

“오래 전부터 형곤 씨는 ‘죽게되면 연구용 시신을 기증해 후세를 위해 희생하고 싶다’라는 마음을 밝혀왔다. 그래서 기증했다”고 말했습니다.

평생 많은 이들에게 웃음을 안겨준 김형곤은 죽어서도 후대를 위해 선행을 함으로써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가 떠난 지 수년이 지났지만 그가 남긴 발자취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