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지못해 살았던 나날..” 은둔 생활 후 결국 빙의까지 된 배우 이미영, 귀신까지 보여?

환란이란 근심과 재앙을 통틀어 이르는 말인데요.

배우 이미영은 자신의 인생이 환란의 연속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녀가 어머니 산소 앞에서 말하길 

“진짜 우리 엄마는 지지리 복도 없는 여자였다”

 
“엄마의 그 박복을 내가 또 이어받은 것 같다”


“이게 우리 딸들에게는 가지 말아야 하는데 딸들도 걱정스럽다”고 했습니다. 


당대 최고의 하이틴 스타로서 최고의 청춘 스타 전영록과 결혼하며 모든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던 그녀

두 번의 이혼 후 ‘왜 이렇게 사는 게 너무 힘들까’라며 화장실에서 샤워기 줄을 목에 감아 나쁜 생각까지 하며 당시에는 귀신까지 보고 빙의가 됐었던 배우 이미영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에 대해 말해보고자 합니다. 


1978년 17살의 ‘미스 해태’ 대상으로 뽑히며 연예계에 데뷔한 이미영은 각종 광고와 드라마에 출연하며 인기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한편 그녀의 오빠였던 맹구 이창훈과 전영록은 대학교 동기였으며 1983년 영화 ‘대학 신입생 오달자의 봄’에 함께 출연하게 되면서 전영록과 연인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미영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을 뽑자면 첫 번째가 미스 해태 선발대회 대상 받았을 때고 그 다음으로 전영록을 만났을 때였다고 했습니다. 


훗날 이미영이 전영록과의 첫 만남을 떠올리며 말하길 “그 당시에는 나에게 정말 따뜻하게 대해주고 나의 모든 이야기를 잘 들어줬으며 솔직히 나에게 완벽한 사람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당대 최고의 청춘 스타와 떠오르는 하이틴 스타의 결혼은 모두의 부러움을 샀지만 그 행복은 그리 길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정확히 12년 후 두 사람은 이혼하게 되었으며 결혼했을 때만큼이나 이혼 소식은 엄청난 화제가 되었습니다.


훗날 첫 번째 이혼에 대해 이미영이 말하길 

“사람들이 흔히 이혼할 때 상대가 도박을 했다, 바람을 피웠다, 사업이 실패해 돈 문제였다 등의 이혼 사유를 말하지만 사실 사랑을 하면 그 모든 걸 다 포용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사랑이 깨졌을 때는 반대로 상대의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거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간에 사랑이 깨진 거다”라고 했습니다. 

이혼하기 전 당시 이미영의 어머니가 함께 거주했었는데 사위 밥해주고 챙기면서 사위 식성을 다 알 정도였다는데요.

아이들에게도 호칭만 할머니였지 엄마나 다름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손녀들을 친딸처럼 키운 할머니가 두 사람이 이혼 후 “자식들 남편에게 줘”라고 했을 때 정말 가슴이 미어져 너무 힘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남편에게 보낸 후 이미영이 고백하길 “아이들을 남편에게 보내고 나는 1년 동안 매일 술만 마시고 완전히 미친 사람처럼 살았다”


“당시 나는 집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하는 게 tv를 켜고 라디오를 켰다”


“왜냐하면 애들을 남편에게 보내고 집에 돌아오니까 집 안에 소리가 울렸다”


“사람이 살다가 집 안에서 다 빠지니까 소리가 울렸다”


“그 공허함은 말로 못한다. 세상에 태어나서 그런 공허함은 처음 느꼈다”

“보람아 우람아 하고 집에 들어왔는데 소리가 울렸던 그 날을 잊을 수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첫 번째 이혼하기 그 무렵 신경을 많이 써서 그녀는 30대 초반부터 우울증과 갱년기가 왔다고 했습니다. 

이혼 후 뭐 하나 해보려고 사업을 하면 주위에 죄다 사기꾼들만 있었고 그녀가 작은 가게의 대표로 있을 때 결국 홀라당 돈을 다 날렸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싫어져서 운둔을 하기 시작했으며 그 당시에는 이상한 일들이 많아서 결국 귀신까지 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한 날은 후배가 자신의 집에 와 앉아서 이야기하는데 후배 옆에 어떤 남자가 앉아서 울고 있길래 ‘이 사람은 누구니’라고 후배에게 묻자 후배가 ‘언니 무섭게 왜 그래’라고 했으며 이미영이 ‘너 이 남자 안 보여? 이 사람이 안 보여?’라고 했던 그날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그녀는 당시 뭐에 씌였는지 빙의까지 해 아기 소리를 냈다가, 할아버지 소리를 냈다가, 남자 소리도 내고 별 소리를 다했다고 했습니다. 


훗날 그녀가 당시를 고백하길 “당시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나를 끄는 것 같아서 환장하겠더라”라고 했습니다. 


결국 빙의 되는 일이 너무 잦자 그녀는 굿까지 했는데요.

그래도 절대로 신내림 만큼은 받고 싶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사랑하는 딸들을 위해서 하루라도 더 오래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담배도 끊고 술도 끊고 정말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당장 생계가 힘들었는데 배우라는 직업이 일을 하고 싶다고 해서 일할 수 있는 게 아니었고 설상가상 2~3년간 일이 안 들었왔다고 했습니다. 


말 그대로 생계 수단이 끊겨버렸던 이미영은 일이 안 들어와 당장 먹고 살 게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살던 집을 팔고 전세로 자그만한 10몇평짜리 집을 얻어서 이사하고 남은 돈은 통장에 넣어놨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내가 돈이 있구나’라는 생각에 라면만 먹어도 배가 불렀지만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 평소에 알고 지내던 친한 언니가 “미영아 이자를 5% 쳐줄 테니까 석 달만 돈을 빌려 쓰자”라고 했는데요.

실제 친언니의 친구다 보니 철썩같이 믿고 빌려줬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힘들고 어렵던 시절 5000만 원을 결국 빌려주었으나 이자는 딱 두 달만 받고 원금 갚는 것을 계속 미룬 그 언니는 결국 도망갔고 당시 이미영은 아파트 잔디밭에 앉아 피눈물을 흘리면서 울었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훗날 만난 두 번째 남편과도 행복은 잠시 뿐이고 또다시 이혼하게 되는데요.

그녀가 말하길 “나는 내가 이혼이라는 주홍 글씨를 2개 새길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안 그래도 첫 번째 이혼할 때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고 안 좋은 소리를 많이 들었어요”

” ‘네가 그렇지 그러니까 그 남자랑도 헤어졌겠지’라고 사람들에게 결정적인 단서를 주는 것밖에 안 되는 상황이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라고 했습니다.


당시 두 딸이 엄마에게 다시 돌아왔을 때인데 떼어놓고 살던 애들이 돌아와서 모든 걸 다 해주고 싶었던 이미영과 달리 재혼한 남편은 아이들이 오니까 태도가 달라졌다고 했습니다. 

“왜 애들을 치마폭에 싸고 사느냐?”라며 이미영을 이상한 사람 취급했는데요.

결국 거기에서부터 문제가 생긴 두 사람은 이미영이 먼저 재혼한 그 사람의 손을 놓으면서 ‘내가 나쁜 사람이 되더라도 할 수 없다’며 아이들을 선택했고 그렇게 또다시 이혼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 이혼 후 왜 이렇게 사는 게 너무 힘들까라고 생각한 이미영이 결국 해서는 안 될 나쁜 생각을 하게 되는데 화장실에 샤워기 줄을 목에 감았다고 했습니다. 

가슴 아프지만 당시에 집에 있던 둘째 딸이 그걸 목격하고 울면서 “엄마 왜 이러냐 엄마 왜 이래”라며 엄마를 붙잡았고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너무도 마음이 아프다고 했습니다.


이미영이 고백하길 “우리 엄마가 이 세상에 왜 왔을까? 전생에 무슨 죄가 많아서 저렇게 고생할까 싶었다”


“나의 어린 기억에는 엄마는 자면서도 인상을 쓰실 정도로 고생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마자 큰 오빠가 불에 타 저 세상으로 보낸 후 그때 엄마가 심장병에 걸리셨고 거의 반쯤 미친 여자처럼 지내셨다”


“근데 내가 그런 엄마의 팔자를 닮아가는 것 같다”


“우리 딸들을 보면 가엾고 안 됐다 이게 다 부모를 잘못 만난 거고 부모 잘못인데 우리 두 딸에게 이런 울타리밖에 못 되어주는 내가 너무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한편 전영록 역시 한 인터뷰를 통해 이미영과 이혼 후에 고충을 털어놓은 바가 있는데요.

그가 말하길 “어딜 가면 꼭 아내와 딸을 버렸다고 손가락질 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당시 나의 전 재산을 다 주고 딸 둘만 데리고 10평 남짓한 전셋집을 떠돌아다녔으며 심지어 이혼할 때 돈이 필요해서 당시 저작권도 다 팔았다”


“저작권 협회에 저작권 담보로 돈을 빌릴 수 있냐고 문의하자 안 된다고 했고 그런데 당시 한국에 진출하기 시작한 외국계 음반회사가 내 저작권을 사겠다고 하더라 그래서 10년간의 저작권을 팔아서 이혼했다”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