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받으면 완치율 80%인데..” 원로배우 김지영 씁쓸한 소식 김나운, 이순재 오열..마지막 유언 남긴 채 끝내..


한 가지에 깊이 몰입하는 사람의 모습은 그 무엇보다 빛나 보입니다. 

국민 할머니로 불렸던 고 김지영 님처럼 말이죠. 

해운대, 야인시대, 장밋빛 인생에서 열연을 펼쳤던 김지영 님은 빈곤층부터 재벌, 공감가는 어머니부터 악녀의 모습까지 소화해내며 항상 최고의 연기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랬던 김지영 님이 작고한 지 벌써 6주기가 다 되어가고 있는데요.

사실 그녀가 우리 곁을 떠났다는 사실이 아직도 잘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지금도 종종 방송되는 김지영 님의 작품을 보고 있자면 더욱 그렇죠.

오늘은 김지영 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 그녀를 추억하는 내용을 담아보고자 합니다. 

나아가 김지영 님을 생각만 하면 눈물을 글썽일 정도로 여전히 그녀를 그리워하고 있는 김나운 씨와 이순재 님의 이야기를 함께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김지영의 과거

1938년 함경북도에서 태어난 김지영 님은 8살이던 당시 광복을 겪었고 그 해 고향인 함경도를 떠나 서울로 이주해 옵니다. 

하지만 바로 5년 뒤인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그녀의 아버지는 가족을 버리고 떠나고 맙니다.

그렇게 가장 힘들었던 시기 가족의 생계는 자연스럽게 어머니의 몫이 되었다고 하는데요. 

딸은 엄마를 닮는다는 말이 정말 사실인지 안타깝게도 김지영 님은 평생 가족 뒷바라지를 하다 돌아가신 그녀의 어머니처럼 가족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게 됩니다.

 
20살의 나이에 영국 배우로 데뷔했던 김지영 님은 데뷔한 지 3년 만에 영화 배우로 스크린 데뷔까지 하게 됩니다.

이후 결혼을 하게 되고 그로 인해 배우 생활을 잠시 쉬게 됩니다.

그러다 아픈 남편과 4남매의 뒷바라지를 하고자 다시 연기에 뛰어들게 되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경제 상황이 어려웠는지 조연이 들어와도 조연에 맞는 옷이 없어서 단역만 전전했다고 하죠. 

이후 알려진 사실이지만 김지영 님의 남편은 술독에 빠져서 살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술에 절은 폐인인 남편을 극진히 간호했지만 결국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김지영 님은 허망하게 남편을 잃은 당시의 심정을 자신의 자서전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통곡과 절규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잘 살아보자고 만나서는 평생 고생만 시키더니 얼굴도 안 보고 가냐?”

“못된 인간아 이 날 이때까지 옷 한 벌 제대로 못 해주더니 처음으로 입혀준다는 옷이 겨우 소복이냐?”

참 김지영 님이 아내로서 얼마나 가진 고생을 했는지 또 얼마나 짙은 가난 속에서 살아왔는지가 절절히 느껴지는 대목이네요. 

배우 김지영

남편과 아이들의 생계를 위해 다시 시작한 연기였지만 김지영 님에게 연기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 그 이상의 가치였습니다.

그녀는 공채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심한 텃세를 겪었지만 이에 좌절하지 않고 자신만의 노선을 개척합니다. 

그게 바로 사투리죠 김지영 님은 거의 유일한 사투리 전문 배우인데요. 

하나의 사투리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것도 힘든데 팔도의 사투리를 모두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사투리의 미묘한 디테일은 현지인이 아니면 흉내내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사투리를 자연스럽게 또 능숙하게 다루는 것은 엄청난 노력이 필요한 일이죠. 

실제로 배우들의 어색한 사투리는 사투리를 쓰는 현지인들이 작품에 몰입하는데 방해 요소가 되기도 합니다. 

아무튼 김지영 님은 자신의 어색한 사투리로 인해 시청자들의 몰입이 깨지지 않도록 무던히 노력합니다. 

특히 지방 촬영을 갈 때면 일부러 현지 전통시장을 들리곤 했다고 하죠. 

그곳에서 현지들의 생활 언어를 듣고 외우고 따라하기까지 한 김지영 님은 개인 교습까지 받는 등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참 연기에 대한 그녀의 열정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느껴지네요. 


그렇다고 김지영 님이 사투리만 잘하는 배우였던 것은 아닙니다. 

김지영 님은 연기 자체를 잘하는 배우였습니다. 

사투리는 연기를 잘하기 위한 요소 중 하나였던 것이죠. 

“배역 이름이나 내 이름 석자로 불리는 것보다 ‘저 분 연기 잘하는 분’ 이라고 불리는 게 더 좋아요”라고 말했던 김지영 님은 후배들에게 스타가 되려고 하지 말고 연기자가 되라 라는 말을 종종 남기곤 했다고 합니다. 


이름을 알리는 것보다 더 좋은 연기를 하기 위해 힘썼던 그녀는 자신의 숨이 다 닿을 때까지 연기를 했던 참 배우였습니다. 

길고 먼 여행을 떠나다..

김지영 님이 폐암을 앓고 있었고 결국 급성 폐렴으로 인해 2017년 2월 19일 향년 79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실 이러한 소식은 너무나 갑작스럽게 전해졌는데요.

함께 일을 하던 동료들조차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합니다.

김지영 님이 폐암 투병 사실을 숨겨왔기 때문입니다.

무려 2년 동안이나 투병 사실을 숨긴 채 연기 활동을 하던 김지영 님은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차기작을 논의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차기작 작가에게 “2주만 누워 있으면 다시 일할 수 있을 것 같아 이제 내가 밥을 먹을 수 있어” 라고 이야기하며 걷기 운동을 하는 등등 의지를 불태웠다고 하는데요. 

고인의 아들 임상호 씨는

“어머니가 처음에는 폐암 1기 판정을 받으셨다”

(폐암 1기는 발견해서 수술을 받으면 생존율이 약 80%에 달해서 완치율이 높습니다)

“그동안 간단한 치료를 받으시면서 드라마를 계속 하셨는데 얼마 전에 몸에 전이가 되면서 폐암 4기 판정을 받았다”라고 했죠.

“그 아프고 힘든 와중에도, 어머니는 ‘2월에 드라마 하나, 5월에도 드라마를 찍어야된다’라면서 계속 기침을 하며 연기에 대한 의지를 보이셨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떠나셨다”며 안타까움을 내비쳤습니다.

고인의 딸은 인터뷰에서

“폐암 투병하면서 주변에 알리지 않고, 연기 활동을 이어가셨다. 그러다 갑자기 급성폐렴이 오면서 오늘 숨을 거두셨다”

“마지막에 연기활동을 하면서 굉장히 힘들어하셨고, 드라마에서 유난히 얼굴이 부어보이게 나온 것도 그 때문”이라고 말하며 안타까운 감정을 드러냈습니다.

안타깝게도 김지영 님의 차기작은 영영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워하는 이들

김지영 님의 부고를 들은 수많은 후배들은 

“선생님의 다정한 연기를 잊지 않겠습니다”

“선생님은 하늘에서도 연기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으실 것 같아요”


“배우로서 정말 존경합니다”라며 애도를 표현했습니다. 

참 후배들이 김지영 님을 이토록 따른 이유를 확실히 알 것 같습니다. 

배우 김나운 씨는 김지영 님의 빈소 앞에서부터 오열하며 비통한 감정을 숨기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어디에선가 짠 하고 나타나실 것 같아요” 라고 김지영 님의 별세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김나운 씨는 김지영 님의 투병 사실을 아는 몇 안 되는 동료였다고 하죠.


그런데 사실 김나운 씨에게 김지영 님은 좋은 연기자 선배 그 이상의 존재였다고 합니다. 

김지영 님의 딸들이 어머니의 유품을 추스리며 “이건 나운이 줘야 해” 라고 할 정도라고 하니 김지영 님이 김나운 씨의 제2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게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김나운 씨는 나눠 받은 김지영 님의 유품을 여전히 자신의 머리맡에 두고 잠든다고 합니다. 

얼마나 그리움이 사무치면 그럴까요?


지금도 김지영 님의 이야기를 하면 눈시울이 붉어지는 김나운 씨 그 마음을 김지영 님도 충분히 아실 것이라 생각됩니다. 

한편 배우 김지영을 그리워하는 인물이 또 있습니다. 

바로 원로 배우 이순재 님이죠. 이순재 님은 동년배 중 연기력이 가장 뛰어난 여배우로 김지영 님을 꼽은 적이 있습니다.

같은 작품에서 대본을 분석하는 김지영 님의 능력을 보고 크게 감탄했다고 하는데요.

 
“배우가 연기력을 키워서 성공한다는 건 김지영처럼 해서 이루는 것이다” 라고 느끼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이런 엄청난 평을 듣기까지 사란 생전 김지영 님은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해왔을까요. 

새삼 김지영 님의 또 다른 작품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하나 확실한 것은 김지영 님의 새로운 연기는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녀의 연기 혼은 후배들에게 전해져서 살아 숨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