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나미 왜 갑자기 사라졌나? 유부남 만나 숨어살다, 역대급범죄에 연루..남편 최봉호와 두 아들&전처 아들의 근황

‘빙글빙글’, ‘슬픈 인연’, ‘인디언 인형처럼’이라는 노래로 80년대 원조 디바였던 나미는 1990년대 초반 자취를 감췄는데요.

이유는 남자 때문이고, 그 남자는 삼호기획 대표이자 연예계의 대부라고 불리던 최봉호 회장입니다.

나미는 20세나 많은 남자와 동거 임신 그리고 살인 청부 사건에 연루되었는데요.  

오늘은 남미의 파란만장한 인생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매력적인 비음의 댄스여왕 나미

가수 나미는 본명은 김명옥 1957년 동두천 출생으로 한국 나이 65세입니다. 


미군 부대 앞에서 레코드점을 하는 아버지 덕분에 음악과 친숙했던 나미는 6살 때부터 미8군 가수로 활동했는데 학교를 다닌 기록은 없습니다. 

1971년 15살에는 ‘해피돌스’라는 걸그룹으로 2년간 베트남 미문 공연을 했고 이후 미국행을 선택합니다.

 
미국과 캐나다에서 성공을 꿈꿨지만 7년간 무명이었던 나미는 1979년 23살의 나이에 귀국해 호텔 클럽을 중심으로 활동을 시작합니다. 

그녀는 당시 소공동 조선호텔에 출연하던 이탈리아 밴드뮤지션 프라크 로마노의 눈에 띄어 여성 보컬로 발탁되었는데요.

그가 제작에 나선 1980년 1집 앨범 ‘미운정 고운정’, ‘영원한 친구’가 히트하면서 가수로 이름을 알립니다.


하지만 프라크 로마노가 병사하면서 그녀의 활동은 시들해집니다. 


이후 삼호 기획에 전속되면서 1984년 발표한 4집 ‘빙글빙글’, 85년 5집 ‘슬픈 인연’, 89년 6집 ‘인디언 인형처럼’으로 나미는 한국가요사에 한 획을 긋습니다.


특히 독특한 음색으로 부른 ‘빙글빙글’은 한국에 불어닥친 마이클 잭슨의 인기에 맘먹을 정도로 높은 인기를 끌었고 발라드 일색이던 가요계의 댄스 열풍을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식을 줄 몰랐던 그녀의 인기는 1990년 살인사건 스캔들이 터지면서 멈추게 되고 그녀는 활동을 중단합니다. 

이후 한 남자와 가십 기사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나미는 여러 번 재기를 꿈꾸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다음은 그녀를 평생 발목 잡았던 스캔들 이야기입니다.

연예계 대부 최봉호와의 만남

나미는 ‘영원한 친구’를 발표하면서 정식 가수로 데뷔했는데 제작자가 별세하여 힘들 무렵 최봉호를 만납니다.


최봉호는 이주일, 조용필, 김수철, 하춘화 등 당대의 톱 스타들을 발굴하고 키워 연예계의 대부라고 불리던 삼호 기획의 대표였고 서울에서 제일 유명한 리버사이드 호텔 나이트 클럽 회장이었습니다. 

최 회장은 1937년생으로 나미와 20살의 나이차가 납니다.

한편 나미는 1997년 최 회장이 기획한 콘서트에 윤시내, 방미, 현숙과 함께 초대 가수로 공연했습니다. 

다음은 2002년 최봉호 회장의 인터뷰입니다. 

“출연 당시 초대 가수 모두에게 밤무대에서 노래를 못하도록 구두로 계약을 했어요”


“다른 가수들은 몰래 업소 출연을 하는데 나미는 추운 분장실에서 혼자 쭈구리고 앉아 있는 겁니다”

  
“그 모습에 ‘왜 그러냐 밤 업소라도 나가지’라고 말했더니 ‘밤 업소에 나가지 않는 게 계약 조건이라 이러고 있다’고 대답을 하더라고요”

“속으로 요령도 없고 융통성이 없는 가수라는 생각이 들면서 좋게 봤어요”


이후 최 회장이 사람을 통해 알아보니 나미는 부엌도 없는 산동네 단칸방에서 살고 있었는데요.

그녀를 가수로 스카웃 하면서 서울 반포동의 아파트 한 채를 마련해줍니다.

처음에 나미는 아파트를 거절하고 음반을 내어 달라고 부탁하는데 그런 나미의 모습에 반한 최봉호가 강하게 대시해서 둘은 연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최봉호는 당시 유부남이었고 전처와의 사이에서 아들 두 명이 있었는데요.

사랑에 빠진 나미는 내연녀를 자처하고 최봉호와 동거에 들어갑니다. 

이후 나미는 1984년 3월 큰 아들을 출산하는데 이상한 낌새친 기자들이 사실 확인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닙니다.

하지만 나미는 아들을 남동생으로 호적에 올리고 육아는 친정 어머니에게 맡긴 채 그 해 10월 4집 발매 후 댄스곡 ‘빙글빙글’로 소문을 잠재웁니다. 


이후 나미는 수 년간 최봉호의 숨겨진 여자로 살았는데 아들은 엄마를 집 밖에서는 ‘누나’라고 불러야 했습니다.

한 번은 세 가족이 백화점에 갔는데 어린 아들이 앞에 걸어가는 나미에게 ‘엄마’라고 부르자 점원들의 쏟아지는 눈초리에 가슴을 졸였던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어린애한테 밖에서는 절대로 엄마라고 부르지 말라고 교육시킬 수도 없어 난감하고 아팠던 시기라고 고백합니다. 

역대급 범죄에 연루


한편 89년 ‘인디언 인형처럼’으로 전성기였던 나미는 1991년 살인 청부 사건의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1989년 6월 서울 서초동에서 조직폭력배 4명이 반대파의 부두목인 정 모 씨를 흉기로 36곳을 찔러 살해합니다. 

그리고 1991년 1월 검찰은 3억 5천만 원의 살해를 교사하고 공범 4명에게 매달 도피 자금 400만 원을 준 혐의로 나미의 동거남인 최봉호를 구속했습니다. 

구속 당시 검찰은 최 씨에 대해

“서울 롯데월드호텔, 뉴월드 호텔, 캐피탈 호텔의 나이트 클럽을 운영하는 연예계 대부”

“1963년 슬롯머신을 국내에 최초로 도입했으며 연애 알선과 유흥업소 경영으로 추정 재산이 1천억 원에 이른다”는 발표를 했습니다. 


그리고 최봉호가 구속된 장소인 방배동 중앙하이츠빌라는 당시 유명 연예인과 기업인이 살았던 고급 주택으로 유명 가수 나미와 동거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이 일로 최 회장은 15년형을 받아 실형을 살았고 나미는 가수 생활을 접고 옥바라지에 나섭니다. 

나미는 ‘인디언 인형’으로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할 무렵인데요.

유부남과 동거하고 있다, 조폭과 동거한다는 기사가 터지면서 잠정 은퇴합니다.

 
하지만 이 사건을 알지 못한 대중들 사이에는 나미가 한동안 보이지 않자 가수 나미 사망이라는 루머가 생기는 해프닝도 있었습니다.

이후 1995년에 석방된 최봉호는 전처와 이혼하고 나미를 법적 아내로 맞이하는데 당시 나이는 39세 최봉호는 59세였습니다. 


그리고 큰 아들의 호적을 정정해 정식으로 모자 사이가 됩니다. 

두 아들, 전처 아들 근황


16년을 한 남자의 내연녀로 살다가 유부녀가 된 나미는 1996년 활동을 재개하지만 이내 접고 1997년 둘째 아들을 낳습니다.

한편 큰 아들 출산 당시의 최봉호는 이주일, 조용필과 파리에 가야 할 스케줄이었고 공항에서 출산 소식을 듣고 는 세 사람 모두 기뻐했다고 합니다. 

13살 차이나는 두 아들은 잘 자랐고 그중 큰 아들은 2002년 가수로 데뷔한 가수 최정철입니다.

게다가 나이가 두 아들 말고도 더 큰 아들이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는데 그는 남편 최봉호의 전처 소생인 뮤지컬 배우 최낙희였습니다. 

두 사람은 9살의 나이 차이입니다. 

게다가 아들의 배우 생활을 반대했던 아버지 때문에 나미와 최낙희의 관계는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2002년 고등학교 2학년이던 나미의 큰아들은 QOQ라는 오인조 댄스 그룹의 메인 보컬 정철로 데뷔합니다. 


한편 정철의 가수 데뷔를 반대했던 최봉호는 2002년 11월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나미와 함께 단독 인터뷰에 나서 오랜 기간 곁을 지킨 나미 그리고 두 아들을 공개하며 아들을 지원 사격합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인기에 비해 아들의 성적은 초라했고 몇 년간의 활동 후에 사업가로 변신합니다. 

최정철은 작년 보이스킹에 출연해 엄마 나미의 히트송 메들리를 부르며 가수로 활동을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 나미를 “어머니이기 전에 배울 점이 많고 존경하는 선배”라고 전합니다.

 
1980년대 가요계에 큰 족적을 남긴 나미는 후배 가수들을 통해 노래가 리메이크되고 영화 ost로도 사용되면서 지금까지도 추억으로 소환 중입니다. 


하지만 연인의 개인사로 활동을 이어나가지 못한 것이 안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