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뜨기 전 죄를 어떻게 씻을까” 갑자기 잠적한 87세 엄앵란의 안타까운 소식, 그녀의 파란만장했던 인생

부부 관계란 사람에 따라 행복이자 불행이 될 수 있죠.

오늘의 주인공 배우 엄앵란은 하객만 3천명이 몰렸던 세기의 결혼식을 올리며 54년 동안 부부로 살아왔지만

39년간 별거를 하고 또한 한때 신성일이 사랑했던 여인이 세상을 떠나자 두 사람은 함께 천도재를 지내며

마지막 가는 날까지 함께하지 못했던 엄앵란 그녀의 누구보다 파란만장한 인생에 대해 말해보고자 합니다.

우연한 데뷔

1936년 태어난 엄앵란은 부잣집 막내딸 같은 이미지와는 다르게 의외로 어려운 성장기를 보내야 했습니다. 

당시 가정을 돌보지 않은 유량 벽의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가 살림을 꾸렸는데요. 

판자촌에서 간신히 허기를 면할 정도로 어려웠고 중학생이던 시절 6.25 전쟁까지 발발하자 대구로 피난을 떠난 뒤 시장에서 어머니와 떡장사를 하는 등 갖은 고생들을 해야만 했지요.

심지어 당시 여유가 없었던 형편 때문에 어머니가 엄앵란의 대학 진학을 반대하며 차라리 딸이 대학에 낙방하기를 빌었다는데요.

어머니의 기대와는 다르게 숙명여자대학교에 합격하면서 1950년대 대학생이 됩니다. 

하지만 대학 등록금이 걱정이던 그녀는 어떻게든 돈을 구해야 했는데요.

마침 아르바이트생을 구하던 영화사 사무실에 방문하면서 그녀의 인생이 180도 변하게 됩니다.

사실 그녀가 하려고 했던 아르바이트는 영화사 사무보조 아르바이트였는데요.

엄앵란을 본 감독이 “너 영화 배우 안 해볼래?”라고했고, 그렇게 그녀는 1956년 영화 ‘단종애사’로 배우 엄앵란이 탄생하게 됩니다.

데뷔와 동시에 당대 최고의 스타가 되어 이후부터는 시대를 대표하는 여배우로 청춘 영화의 아이콘 그 자체가 되었죠.

미남 신성일과의 만남

그러다 그녀는 1960년 신인 배우 신성일과 처음 만나게 됩니다.

처음엔 그녀가 워낙 대스타이다 보니 신성일은 감히 말도 붙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하루는 촬영이 지루했던 그녀가 “미스터 신 나 너무 졸려 라고 했는데요.

갑자기 한강 모래밭에 오토바이를 끌고 오는 장면에서 신성일이 자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이튿날 병문안을 갔더니 그가 링거를 꽂고 그녀에게 윙크를 날렸다고 합니다.

알고 보니 촬영이 지겹다는 그녀에게 촬영 펑크를 내서 쉬게 해주려는 잔꾀를 냈던 것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이후에도 전무후무한 황금의 콤비 스타로 수많은 작품에서 함께 활동했는데요.

어느 날 호텔 옆방에 자던 신성일이 고층 홈통을 타고 남몰래 엄앵란의 방에 들어가면서 두 남녀는 부부의 연분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후 두 사람은 연예인 결혼 사상 가장 많은 3000여 명의 하객들 앞에서 결혼을 했습니다.

사실 신성일은 결혼 전 총각 시절부터 숱한 여배우와 염문을 뿌리는 바람둥이로 아주 유명했지만 그녀는 그걸 알면서도 결혼을 하게 됩니다. 


아무튼 결혼과 동시에 그녀는 연예계를 은퇴하고 이후 10년 동안은 오로지 집에서 살림만 하게 되었는데요.

당시 시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아 심각한 고부 갈등을 겪었다고 합니다.

당시 그녀는 그동안 번 돈을 모두 친정에 두고 왔는데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시어머니가 사사건건 개입을 했다는데요.

시어머니 때문에 3년동안 집 밖으로 외출도 못했고, 어느 날엔 “니네 집으로 가라”고 하는 바람에 아이를 데리고 무려 6개월을 친정에서 산 적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젊은 시절 마련해 놓은 돈으로 시어머니께 집을 사드리고 나서야 3년 만에 분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안도도 잠시 뿐 이후부터는 바람 잘 날 없는 신성일의 바람기로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이 시작되게 됩니다. 

그 중 가장 강력한 여인은 신성일의 34살 때 만난 동아방송 아나운서 故김영애입니다.


신성일의 자서전에는 두 사람의 밀애가 적나라하게 밝혀져 있는데요.

가장 충격적인 것은 김영애가 신성일의 아이를 가졌지만 톱스타인 신성일에게 피해가 갈 것을 염려해 스스로 지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신성일이 친구 영화사 사무실에서 국제전화를 받았는데 김영애가 임신했다는 소식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순간 머리가 띵해 아무말도 못했고 김영애는 “내가 알아서 할게요”라며 전화를 끊었다고 합니다.

그 후로 1년동안 연락을 안하다 신성일이 베를린 영화제에 참석했을 때, 김영애가 독일로 날아왔는데요.

당시 김영애가 삭발한 모습을 보고 신성일은 ‘내가 너무 남자답지 못했구나’라는 생각에 펑펑 울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그렇게 다시 만난 두 사람은 두 달동안 유럽을 휘저으며 이별 여행을 했다고 합니다.

이후 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 이미 두 사람의 사이를 알던 엄앵란에게 “김영애가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요.

충격받은 그가 “그렇게 떠날 줄 알았으면 더 잘해줄걸” 하고 혼잣말을 하자 엄앵란은 화를 내며 밖으로 나가버렸다고 합니다. 


신성일의 외도는 아내인 엄앵란에게는 당연히 불쾌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죠.

그럼에도 훗날 그녀는 신성일이 재미삼아 들어간 역술원 집에서 “구천을 떠돌고 애타는 영혼을 달래주는 천도재를 지내야 한다”고 하자 신성일의 옛 애인 김영애를 위해서 천도제까지 지내주곤 했습니다.


이후에도 남편 신성일은 다른 여자 만나느라 난리, 영화 제작한다고 난리, 극장 짓는다고 난리였는데요.

그 중에서도 제일 심각한 것은 바로 정치한다고 난리였습니다. 

배우라는 타이틀까지 버리고..


신성일은 5공화국 시절인 1981년 11대 국회의원 선거에 나갔지만 3위로 낙선합니다.


국회의원 낙선한 후폭풍으로 선거 바로 다음 날 돌아온 당좌 수표를 막지 못해 부도가 났습니다.

이들 부부는 하루아침에 쫄딱망해 빚쟁이들에게 쫓기게 되는데요.

남편 신성일은 너무 고통스러워 극단적 선택을 하기위해 한강변의 장소를 찾아다니기까지 했습니다. 


하루는 빚쟁이들이 그녀의 아파트에 몰려와 채무 지불 각서를 쓰라며 달려들었는데요. 

당시 혼자 집에 있던 엄앵란은 “그냥 제가 여기 15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리겠습니다”라고 담담히 말했다고 합니다.

결국 빚쟁이들 중 가장 나이 많은 분이 그녀의 말을 듣고는 오히려 “힘내라”고 위로하며 집 밖을 나섰다고 했습니다. 

아무튼 남편이 낙선하는 바람에 쫄딱 망한 그녀는 당장 생활고를 해결해야 하다보니 대구에 내려가 비빔밥 장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배우라는 타이틀을 완전히 버리고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무려 18년간 비빔밥 장사를 하게 됩니다. 

그녀는 1990년대가 되어서야 아침마당에서 부부 문제 상담 코너의 패널로 활동을 재개하게 됩니다. 

많은 시청자들이 후덕한 식당 아줌마의 모습으로 나타난 그녀를 보고 커다란 충격을 받았는데요.

왕년의 공주는 사라졌지만 사람들을 어르고 달래는 그녀의 수다솜씨는 일품이라 곧바로 제2의 전성기를 맞게 됩니다.

이것이 훗날 남편을 국회의원에 당선시켰던 주된 요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그녀의 토크의 배경에는 남편 신성일이 있었는데요.

훗날 신성일의 고백에 따르면 그는 아내 엄앵란에게 

“출연자들이 하나같이 남들이 다 아는 거짓말에 내숭을 떤다”

“제발 당신만은 그러지 말고 남편 험담 같은 것도 마음껏 하라”고 하자 그녀가 실제로 그렇게 했다는데요. 

그러다 보니 신성일은 어느 순간 국민 밉상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그녀가 tv에 나와 많은 공감과 사랑을 받자 남편 신성일도 마침내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국회의원 임기가 끝나가던 2004년 뇌물 수수를 하는 바람에 임기가 만료된 후 실형을 선고받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남편의 구속과 함께 아내인 그녀도 잠시 방송을 떠나게 됩니다.

하지만 이 무렵 평생을 남편의 바람기 때문에 고생하던 그녀는 교도소에 들어간 남편에게 생애 최고의 선물을 받게 됩니다.

신성일에 대한 애정

교도소 면회를 갔다가 교도관이 불쑥 그녀에게 장미꽃을 주었다는데요.

알고 보니 남편이 결혼 기념일을 위해 준비한 선물이었습니다. 


이처럼 남편은 자유롭지 못한 신분임에도 그녀를 위해 교도소 정원에 장미꽃을 꺾어 철창 너머 교도관을 통해 전해줬다는데요. 

이런 로맨틱한 행동에 감동한 그녀가 남편과 철창을 사이에 두고 오열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2015년에는 건강 프로그램 ‘나는 몸신이다’ 촬영 중 검진을 받다가 유방암을 발견하게 되는데요. 

천만 다행으로 조기에 발견돼 수술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무렵 두 사람은 그간 40년 가까이 별거를 하며 사실상 졸혼에 가까운 사이로 지냈는데 엄앵란이 아프다고 하자 남편 신성일이 미안했는지 손수 정성어린 뒷바라지를 해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동안의 행보에 대한 논란도 사그라지면서 대중들로부터 애증어린 공감까지 얻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2년 뒤 이번에는 남편 신성일이 폐암 3기라는 청천병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는 1년간 투병 생활을 하며 다행히도 빠르게 회복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지만 안타깝게도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엄앵란은 “남편 상태가 심각하다고 해서 급히 기차를 타고 내려가는데 문득 ‘나는 신성일에게 잘한 게 뭐 있나 내가 부족하니 밖으로 돌지 않았겠나’ 싶더라”


“그래서 그 죄를 어떻게 씻을까 하다가 발이라도 씻겨줘야겠다 싶어서 세상 뜨기 사흘 전 발을 씻겨주었는데 그게 마지막으로 본 거였다”

  
“그리고 남편이 세상을 뜨기 전 마지막으로 ‘우리 아들의 귀에 대고 엄마한테 수고했고 고마웠다고 전해줘’라고 했다더라”라고 심경을 고백하기도 했죠.

창피해서 못 나가는 엄앵란

그동안 방송에서 자주 볼 수 없었던 엄앵란의 근황 작년 10월 TV조선 ‘스타다큐 마이웨이’ 현미 편에서 공개됬습니다.

현미와 엄앵란은 수시로 전화통화를 할 만큼 각별한 사이로 알려져있죠.

목발을 짚으며 거동이 불편해보이는 상태로 나타난 엄앵란은

“촬영 도중 쓰러졌는데 못 일어났다”

“무릎수술을 했고, 목발을 짚게 됬다”라고 설명했습니다.

“4년 동안 집에만 있었다. 절뚝거리면서 나가는게 너무 창피해서 현미 집도 안갔다”라며 씁쓸해 했습니다.

그녀의 근황이 참 믿기지가 않고 안타까운데요..건강 잘 회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