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은 전 세계에서 인정하는 쇼트트랙 강국입니다.
그중에서도 1500m는 남녀 모두 제일 자신 있는 종목입니다.
힘과 스피드를 앞세우는 서양 중국 선수들과 달리 전통적으로 기술, 체력이 좋은 대한민국 선수들은 올림픽뿐만 아니라 세계선수권 월드컵 등 각종 국제대회에서 우승을 휩쓸어왔습니다.
그 중에서도 잊을 수 없는 이름이 있습니다.

바로 노진규입니다.
그는 1500m의 독보적인 강자였습니다.
성실성과 열정을 바탕으로 강한 체력을 키운 그는 2011~2012 시즌 월드컵 대회 1500m 6연패라는 대기록을 세웠습니다.

2011년 상하이에서 열린 월드컵 4차 대회 결승에서는 안현수가 8년 전에 세웠던 세계 기록을 갈아치울 정도로 절대 강자로 군림했습니다.
노진규의 후배인 2022 베이징 올림픽 1500m 금메달리스트 황대헌은 “진규 형은 나의 롤모델이다, 항상 묵묵히 훈련을 열심히 하는 모습에 자극을 많이 받았다”라고 그에 대해 밝히기도 했죠.
하지만 노진규는 소치올림픽을 앞두고 왼쪽 어깨에 종양이 생겼습니다.
수술이 필요했지만 올림픽 출전을 위해 수술을 연기하고 월드컵 출전을 강행했습니다.
본인이 출전하지도 못하는 올림픽 개인전 출전권을 따내기 위해서 움직이지 않는 어깨를 부여잡고 악전고투하여 출전권을 따오는 그의 모습은 비장하다 못해 애처롭기까지 했습니다.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올림픽을 앞두고 태릉선수촌에서 훈련하다 왼쪽 팔꿈치 뼈가 골절돼 노진규의 올림픽 출전은 무산됐습니다.
엎친데 덮쳐 수술 중에 악성 골육종이 발견돼 생명까지 위협받았습니다.

수술 후 한때 회복되는 듯 했으나 다시 병세가 도져 2016년 4월 3일 짧고도 강렬했던 삶의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그의 별명인 어린 왕자처럼 순수함과 젊음을 간직한 채 영원의 별로 떠난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그가 영면한 날은 2016 쇼트트랙 국가대표 선발전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그의 대표팀 동료 선후배들은 대회 후 휴식을 취하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빈소로 향해야 했습니다.
특히 대학 동기인 서이라는 국가대표 선발전 종합 3연패를 하는 경사를 맞이했음에도 친구의 죽음에 비통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김동성의 빈소를 찾은 前 쇼트트랙 금메달리스트 김동성 또한 눈물을 훔쳤습니다.


그런데 2019년 3월 유족들은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노진규의 누나인 스피드 스케이트 국가대표 선수 출신 노선영은 노진규의 어깨에 종양이 발견됐지만 전명규 前 교수가 올림픽이 중요하다며 수술을 막았다고 주장했습니다.
파문은 컸습니다. 교육부가 전면 감사를 통해 전 前 교수를 중징계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한국체육대학교는 2019년 전 前 교수를 파면하면서 문제를 덮었습니다.

그러나 전 前 교수는 이를 전면 부정했는데요.
전 前 교수는 “노진규는 내가 진정으로 아끼던 제자입니다”
“그는 올림픽 출전을 위해 엄청난 정신력을 발휘했습니다”
“통증을 참아가며 여러 대회에 참가한 것은 병원의 진단에 따라 피해자와 그의 가족이 스스로 결정한 것입니다”
“대회 출전과 훈련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라고 항변했습니다.

그는 “노진규가 악성 종양이 될 확률이 낮으니 훈련을 하겠다고 해 허락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나는 당시 훈련과 대회 출전에 관여하지도 않았고 관여할 권한도 없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전 前 교수는 당시 대한빙상연맹 부회장이었습니다.
인권위는 전 전 교수와 코치 등 당시 코칭 스태프들이 고인의 투병 사실을 알고도 올림픽 메달 획득을 위해 혹사시키며 병원 치료를 늦췄기 때문이라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인권위가 공개한 익명 결정문에는
‘부상을 당한 피해자의 건강 상태를 고려하지 못한 채 과도한 훈련과 무리한 대회 출전을 지속한 사실이 있다’
‘이러한 배경에 피진정인들의 영향력 등이 있었다는 정황이 상당하며 과도한 훈련과 무리한 대회 출전으로 인해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해 피해자가 사망에 이르렀다고 볼 개연성도 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물론 국가인권위원회 법상 공소시효나 민사상 시효가 지난 사건은 피진정인에 대한 징계 권고를 할 수 없어 각하하도록 되어있습니다.
하지만, 인권위가 이 사건을 중요 사건으로 정해 약 1년 반 동안에 걸쳐 조사해 노진규의 사인을 혹사에 있었다는 걸 인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습니다.


인권위는
‘2013년 9월 30일이니 좌측 어깨에 종양이 발견돼 정밀 진단을 받아보라는 외부 병원의 조언을 받은 상태였으며
육안으로 보기에도 좌측 어깨가 돌출되는 등 상태가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노진규 선수는 일기장에 지속적으로 어깨가 아프다고 고통을 호소하였고 특히 훈련 중 빙판에 손을 짚는 것이 불편하다고도 기재했다’라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노진규 선수는 골육종이 발견되기 전인 2013년 4월 이미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4위를 하면서 국가별로 최대 3명이 출전할 수 있는 소치올림픽 개인전에 출전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무리하여 소치올림픽 개인전 출전권을 따기 위한 2013~2014 국제빙상연맹 쇼트트랙 월드컵 3 4차 대회에 참가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다’
‘피해자의 경력을 감안하면 부상 치료를 미뤄가며 참가할 만큼 의미가 있는 대회가 아니었다는 견해가 중론’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법원에서는 ‘노진규 선수를 진단한 건국대학교 병원 정형외과 박 모 의사가 의료상 주의 의무를 위반하여 망인으로 하여금 골육종의 조기 진단 및 치료를 받을 기회를 상실하게 하였다’
‘또한 설명 의무를 위반하여 망인의 진단 및 치료 방법에 관한 자기 결정권을 침해하였으며 그로 인해 망인의 생존 기간이 5년보다 단축되었다’라며 노진규 유족에게 2천500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습니다.

인권위는 ‘성적 지상주의나 구비 선향 등을 이유로 대회나 훈련 참가에 있어 건강 상태나 부상 정도에 대한 객관적인 심의를 받지 못한 채 참가해야 할 가능성이 크다’

‘이해 관계자를 배제한 상황에서 부상을 당한 국가대표의 대회 출전이나 훈련 참가에 대해 심의하는 절차를 만들고 관련 규정을 신설할 필요가 있다’
‘대한체육회가 국가대표 선발 및 운영 규정이나 국가대표 훈련 관리 지침에 국가대표 선수의 부상 예방 관리 보호 훈련 방안 등에 대한 규정을 마련하라’라고 의견을 표명했습니다.

안타깝게도 노진규가 세상을 떠나고 두 달 가량 뒤 2006년에 은퇴한 쇼트트랙 선수 출신 오세종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세종은 은퇴 후 고려대학교 링크장 쇼트트랙 강사로 근무하며 악착같이 돈을 모았습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청담동의 고깃집을 오픈합니다.

그는 30대 중반의 나이에 결혼도 미루면서 어머니에게 효도하고 싶어 고깃집을 개업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평소 선행도 잊지 않던 그였습니다.

저소득층을 위해 재능기부를 하고 빙상 체험도 하고 사회적 기부 활동도 굉장히 열심히 하는 청년이었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도 그는 동계 영재 빙상캠프에 지도자로 참여해 재능기부를 했으며 떠나기 한 달 전에도 저소득층 지역 어린이 100명을 대상으로 동계 스포츠 빙상 체험교실에 멘토로 참여하는 등 선행을 이어갔습니다.
그런 글을 보며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성실하고 꼼꼼한 친구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음식점을 개업하며 그는 밤낮으로 열심히 살았고 강의도 계속 이어갔습니다.

그는 고려대 강의를 마치고 귀가하던 중 그는 환풍기가 고장 났다는 연락을 받고 오토바이를 타고 가게로 가던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오후 7시 10분경 서울 마장동에서 맞은편에서 불법 유턴하는 차량과 정면으로 충돌해 그 자리에서 숨집니다.
연이은 젊은 청년들의 이른 부고에 가족 동료들은 물론 국민들도 함께 마음 아파했습니다.
먼 곳으로 떠났지만 그곳에서는 못 다 이룬 꿈 이루며 편히 쉬시길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