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해서 어쩌나” 전 재산 잃은 가수 김혜연 끝내 유서까지 써야 했던…충격 상황, 혜은이 미안함에 눈물 흘려..

김혜연 그녀는 느린 템포의 트로트가 주를 이루던 1990년대 중반에 파격적인 의상을 입고 댄스 가수처럼 춤을 추며 혜성같이 등장했는데요.

이후 그녀는 1994년 ‘서울, 대전, 대구, 부산을 기점으로 6살짜리 아이부터 80대 어머니까지 모두에게 사랑받는 트로트계의 아이돌이 되었죠.   

TV에 보이는 가수 김혜연의 삶은 웃음 가득해 보였지만 화려한 조명 뒤에 숨겨왔던 인간 김혜연의 삶은 그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던 너무나 아프고 어두운 삶이었습니다. 

모두가 트로트 여왕이라 부르며 그녀의 성공을 부러워할 때 하지만 정작 그녀는 전 재산을 잃고 임신 9개월 몸 상태에도 무대에 올라야 했는데요.

심지어 불행의 그림자로 시한부 인생을 살며 생애 마지막 순간을 준비하고 남은 가족들에게 유서까지 써야 했던 김혜연

그녀의 상처 가득한 인생에 대해 말해보고자 합니다.

더불어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혜은이 씨의 사연도 알아보겠습니다.

지독한 가난

1971년에 태어난 김혜연은 어릴 때부터 가수의 꿈이 있었으며 그때도 그냥 노래를 부른 것이 아니라 주로 관객 앞에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누군가가 그녀에게 노래를 시키면 용돈을 받기 위해 듣는 사람이 좋아하는 노래를 불러야 한다는 걸 알았고 ‘봄날은 간다’, ‘여자의 일생’ 등 항상 어른들이 좋아하는 트로트를 불렀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노래를 부르며 해맑았던 어린 김혜연은 사실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던 지독한 가난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하루는 집에 들어갔더니 빨간 압류 딱지가 온통 붙어 있어 어머니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더니

어머니는 “나 너희 아빠 때문에 진짜 못 살겠다”라고 했는데요.

짐 가져가시는 분과 엄마가 몸싸움을 하면서 오열하시는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초등학교 입학할 때부터 그녀의 가족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지내야 했는데요.

그녀는 외숙모 집에, 오빠는 다른 친척 집에서 지내야만 했습니다. 

한편 가난한 시절 배고픔이 싫어 살아남기 위해 그녀가 선택했던 운동이 육상이었는데요.

당시 학교에서 운동 선수한테는 점심도 제공되고 옷도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장의 끼니조차 제대로 해결되지 않는 상황.. 그녀는 ‘조금만 나태해지면 나는 아무것도 될 수 없다’는 생각으로 누구보다 독해져야 했습니다.

그 때 그녀는 안 해본 알바가 없었으며 누군가가 그녀에게 아르바이트 뭐 했냐고 물으면 “저는 아르바이트라는 아르바이트는 다 했어요”라고 할 정도로 정말 많은 걸 해야 했습니다. 

신문 배달, 우유 배달 심지어 구두 닦기까지 했다고 하는데요.


그렇게 힘든 학창 시절을 보내던 김혜연은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는 다시 노래가 하고 싶어지게 됩니다.

21살인 1991년에는 전국 노래자랑에 참가하여 인기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이후 신인 가요제에도 참가하여 발탁된 후 그녀는 댄스 가수로 데뷔하게 되었는데요.

하지만 댄스 가수 시절 별다른 호응이 없었고 이후 1년 만에 본인이 가장 원했던 트로트 가수로 전향하게 됩니다. 


얌전하게 부르는 전통 트로트가 주류였던 그 때 두건을 쓰고 가죽 바지를 입고 춤을 추면서 트로트를 부르는 그녀의 등장은 당시 가요계의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기 충분했습니다.

이후 ‘서울 대전 대구 부산 찍고’라는 가사로 유명한 그녀의 노래 ‘서울 대전 대구 부산’은 음반 호황기였던 1990년대 중반의 상승세를 얻고 100만 장이나 팔리게 되는데요. 

이때부터 김혜연이라는 이름은 대한민국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가수로 이름을 알려가기 시작할 무렵 그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뿔뿔이 흩어져 있던 가족들과 함께 사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아직은 매니저를 두고 운전기사를 두면서 노래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녀의 아버지가 운전을 하고 어머니가 코디네이터가 되어 셋이 같이 지방 공연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돈이 들어오면 그녀는 무조건 반은 적금을 하고 남은 반으로 어머니에게 생활비를 드리며 생활했습니다. 

하지만 사업 실패로 온 가족을 고난으로 이끈 그녀의 아버지는 그런 딸이 탐탁치 않았고 “네가 돈을 번다고 네가 관리하냐?”며 섭섭해하며 욕까지 했다고 했습니다.

이때를 그녀가 고백하길 “내가 번 돈을 내가 관리한다고 아버지가 나에게 욕을 많이 하셨다”

  
“그럴 때마다 나는 섭섭했지만 하지만 아버지를 잘 알기에 그러든가 말든가 내가 끝까지 갈려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오지랖이 되게 넓다”


“누구 어렵다고 하면 그냥 못 보내고 돈 지어주시고 보증 서시고 그리고 내가 한창 가수 생활할 때 아버지에게 집을 사드렸는데 역시나 보증을 잘못 서셔서 경매를 또 당했었다”

“한 때 아버지가 섭섭해하셨지만 ‘지금은 똑똑한 기지배’라고 하시면서 열심히 사는 걸 인정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생계형 가수가 되야했던 이유

아무튼 그렇게 트로트 가수로 많은 인기를 모으며 전성기를 누리던 그녀는 2000년도에 지금의 남편을 만나게 됩니다. 

그녀의 남편은 목포고등학교 체육 선생님이었는데 사업한다고 학교 선생님을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온 상황에서 김혜연을 만나 결혼까지 하였는데요.

안타깝게도 결혼 후 남편의 사업은 점점 힘들어졌습니다. 

이후 남편의 사업이 부도까지 나자,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엄청난 고생을 해야 했는데요.

그래서 그녀는 임신 9개월 몸 상태에도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를 정도로 또다시 생계형 가수가 돼야만 했습니다. 

이때를 그녀가 고백하길

“저희 남편도 나름대로 사업도 열심히 하고 능력도 있는 남자다 하지만 결혼하고 나서는 사업이 점점 힘들어졌다”

“둘째 아이를 가졌을 때는 굉장히 크게 부도가 나서 가지고 있던 업장이 다 없어지고 정말 너무 힘들었다”


“그 여파가 10년 이상 갔으며 최근까지도 너무 힘들었고 결국 내가 벌어온 돈으로만 생활했다”


“나중에 알았는데 내가 늘 바쁘니까 아이들이 아빠한테 ‘아빠 뭐 먹고 싶어요. 사과 먹고 싶어요 우유 떨어졌어요’라고 아빠한테 전화를 했었다. 그런데 남편은 그것마저 사다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데 남편은 나에게 손 벌리지 않았고 전당포에 시계를 맡겨서 아이들 학용품, 음식 등 사고 싶은 거 사다 줬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듣고 큰 감동을 받았다”라고 했습니다.

뇌종양과 혜은이 씨의 마음

한편 그녀는 2013년 5월 넷째를 출산하기 전 남편과 함께 건강 프로그램에 출연했다가 종양 2개를 발견하게 됩니다. 

당시 의사 선생님이 머리에 종양이 있다며 일주일 뒤에 정밀 검사를 했는데 그런데 혈관을 못 찾았다고 했고 “혈관을 못 찾으면 뇌를 뚫어서 포일로 머리를 싸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쓰러질지 내일 쓰러질지 모릅니다”라고 하면서 최고로 빠르게 수술 날짜를 잡아주었는데 그게 한 달 뒤였다고 합니다.


그녀는 그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시한부 인생을 살아야만 했는데요.

그녀에게 갑자기 닥쳐온 시련에 ‘왜 나한테 이런 역경이 왔을까’라며 아이와 식구들을 생각하면서 유서까지 써야만 했습니다.

이때를 그녀가 고백하길 “내 병 소식을 듣고 일주일 정도는 되게 많이 울었다”


“그리고 유서를 썼는데 우리 남편에게 아이들 잘 부탁하고 너무 감사했고 고마웠다.  ‘좋은 여자 만나서 당신은 다시 결혼했으면 좋겠고 우리 아이들은 예쁘게 키워줘’라고 유서를 써서 넣어뒀다”

  
“그리고 가장 마음에 걸리는 건 역시나 아이들이었다”


“내가 바쁘다는 핑계로 아이들에게 따뜻하게 대해주지도 못했고 아이들에게 좋은 기억을 남겨준 것도 없었다”

“아이들은 정말 엄마 품이 그리웠을 텐데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주지 못했다” 고 했습니다. 

그렇게 모든 욕심을 내려놓고 오직 아이들의 엄마로 좀 더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했던 그녀의 간절한 바람은 끝내 기적이 일어나게 됩니다.

수술 날짜를 며칠 안 남기고 갑자기 병원에서 연락이 왔으며 기존에 예정되어 있던 그녀의 머리를 뚫는 수술을 대신해서 약물 치료를 하자는 연락이었습니다. 

이후 그녀는 열심히 몸 관리를 하며 하나를 먹더라도 몸에 좋은 걸 먹기 시작했고 그러다 보니까 위도 건강해졌고, 너무 건강하다 보니까 넷째까지 생겨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약물 치료와 식이요법으로 기적적으로 뇌종양 2개가 사라진 그녀는 아이들이 커가는 걸 옆에서 지켜볼 수 있다는 것 그 하나만으로도 모든 것에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하는데요.

2020년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에 출연해, 이와 같은 내용을 밝히자 혜은이는 “너 그런 일이 있었어? 세상에..”라며 울먹이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혜은이와 김혜연은 절친한 관계로 알려져있는데요.

방송에서 혜은이 씨는 “워낙 사는게 힘들다보니 주위를 살피지 못했다”

“‘언제 그랬지?’ ‘어떻게 내가 그렇게 모를수가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너무 미안했다”라며 절친 김혜연의 사정을 몰랐던 것에 대한 미안한 심정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고백하길 

“내가 이렇게 살아 있는 것도 감사하고, 우리 내 아이가 아프지 않고 이렇게 건강하게 옆에 있는 것도 감사하고, 내가 무대에서 열심히 노래할 때 여러분이 박수 함성 보내주시는 것도 너무 감사하고, 지금 이 순간 모든 것이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그녀가 앞으로 건강한 모습을 활동하기를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