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보통 인생에서 유독 힘든 일을 많이 겪고 굴곡이 심한 삶을 살았던 사람을 일컬어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내지는 우여곡절이 심하다 라는 말을 하곤 합니다.
오늘의 주인공인 사미자 씨는 파란만장 우여곡절이란 말이 너무나 딱 들어맞을 정도로 정말 힘든 인생길을 걸어왔습니다.
배우 사미자 씨의 과거 인생사와 더불어 최근에 전해진 근황을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불우한 어린 시절

사미자 씨의 파란만장한 삶은 태어났을 때부터 시작이었습니다.
어떤 연예인들은 풍족하게 살다가 갑자기 가세가 기울어 힘든 삶을 살던 경우도 덜어 있지만 사미자 씨의 경우에는 그냥 처음부터 가난함 그 자체였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미자 씨가 10살 때 6.25 전쟁을 겪으며 가족들과 함께 피난 생활을 하게 됩니다.
거기다 사미자 씨가 13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그때부터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라게 됩니다.
워낙 가난한 가정 형편에 어린 그녀가 이화여중 입학 시험에 합격을 하게 되었을 때도 등록금 때문에 가족들은 기뻐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서울에 재학 중이었던 친오빠의 학비 대기도 벅찬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미자 씨의 어머니는 딸이 이화여중에 입학하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 교장실에 직접 찾아가 90도로 절을 하며 등록금을 가을 추수 때까지 미뤄달라고 부탁하게 됩니다.
결국 그녀는 이화여중에 입학할 수 있었고 훗날 사미자 씨는
“고등학교도 쌀 세 가마니 값을 외상으로 해서 가까스로 입학을 했다”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그 시절에 공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라는 말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그녀는 이화여대 영문학과를 1학년 1학기까지 몰래 수업을 듣기도 하였지만 끝내 학비를 마련하지 못해 대학교에 입학을 하지는 못합니다.
사미자 씨는 이화여중에 합격할 정도로 머리도 좋았고 이화여대 영문학과 수업을 도강할 만큼 배움에 대한 갈망도 누구보다 컸습니다.
만약 이때 형편이 괜찮아서 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면 아마 그녀의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판자촌 생활

사미자 씨는 23살이란 어린 나이에 kbs 탤런트 1기생인 김관수 씨를 남편으로 만나게 됩니다.
당시 김관수 씨는 별다른 재산도 없고 가난한 탤런트였기에 그녀의 집에서는 결혼을 반대합니다.
그러나 사미자 씨는 김관수 씨와의 결혼을 위해 아이를 가졌다는 거짓말까지 하였으며 심지어 얼마 뒤에 실제 임신을 하여 어머니의 극심한 반대에도 결국 결혼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가난한 신혼생활이 시작되었는데요.
90만 원짜리 13평짜리 국민주택을 구입할 때까지 무려 9년 동안 마포구 판자촌 사글세로 결혼 생활을 이어나갔습니다.
연예계 데뷔

당시 수입이 거의 없었던 남편과 아이까지 출산한 상황이라 사미자 씨는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당시 인기 있는 직업이었던 성우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나 성우를 모집하는 채용 조건에는 ‘미혼이어야한다’ 라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결국 그녀는 결혼 사실을 모두 숨기고 1963년에 성우로 데뷔하게 됩니다.
그러다 당시 같은 성우 동료였던 전원주 씨에게 우연히 이 사실을 들키고 사미자 씨가 유부녀라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됩니다.

사미자 씨는 “당시 큰 딸이 6개월이었는데 아이가 하루 종일 울어서 어머니가 스튜디오로 딸을 데리고 왔어요”
“우유 살 돈이 없어서 물만 먹였더니 배가 고파서 울었던 모양이에요”
“처음에는 어머니에게 ‘나 여기서 잘릴 텐데 왜 아이를 데리고 왔냐’ 난리를 쳤지만 방법이 없었어요”
“결국 어머니와 딸 아이를 화장실로 데려가서 우는 아이에게 수유를 했어요”
“그런데 너무 긴장한 나머지 모유가 나오지 않는 거예요”
“그러다 나를 찾으라는 말을 들은 전원주가 화장실로 들어와서 제 모습을 보고 소문을 낸 거죠” 라며 당시를 회상하기도 하였습니다.
원칙대로라면 성우를 그만두게 될 상황이었지만 사미자 씨는 오히려 첫째 딸을 직접 안고 연출자 앞에 나타나는 과감한 행동으로 이 위기를 모면하고 성우 일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성우로 활동하던 사미자 씨는 배우로 전향하게 되는데요.
처음 배우로 데뷔하였을 때 그녀는 대중들의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당시 대한민국 여배우 중에서도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미인이었고 성우 출신답게 발음과 목소리가 좋았기 때문이었죠.
그야말로 사미자 씨는 데뷔하자마자 스타가 될 일만 남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분위기와는 다르게 그 시대 때는 결혼한 여배우에 대한 차별 섞인 시선이 존재하였기에 안타깝게도 사미자 씨에게는 여주인공 역할은 아예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사모님 역할이나 할머니 역할만 들어오게 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사미자 씨는 그 당시 특히나 깐깐한 시어머니나 깍쟁이 장모 역을 주로 맡았는데 그녀가 유부녀였다는 사실을 퍼뜨린 전원주 씨는 주로 가정부 역할을 했으며 같은 작품에서 만나기도 했습니다.
훗날 전원주 씨는 웃으며 이것을 “인과응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억대 사기

비록 빼어난 미모와 젊은 나이에 맞는 여주인공 역할은 한 번도 맡지 못했지만 사미자 씨는 안정된 연기력으로 많은 작품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가기 시작합니다.
1980년대에는 수입 많은 배우 타5에 뽑힐 정도로 그야말로 그녀의 전성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사미자 씨는 충격적인 일을 당하고 맙니다.

사미자 씨는 남편 회사로부터 이자를 줄 테니 돈을 빌려달라고 해서 빌려준 금액이 5억까지 가게 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1년이 넘게 빌려간 돈을 주지 않자 불안한 마음에 이자는 고사하고 원금만이라도 돌려달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돈을 받기로 한 날 새벽에 돈을 빌린 사람이 미국으로 도주해버리고 맙니다.
이 사실을 안 사미자 씨는 당시 충격이 너무 커서 일주일 동안 급성 척추 협착증을 앓으면서 일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가장 역할을 해야 했던 사미자 씨는 아픈 몸이었음에도 섭외 전화를 받고 1주일 만에 촬영장으로 복귀하였습니다.

사미자 씨는 젊었을 때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해야 했기에 일만 하며 쉴 새 없이 바쁘게 지냈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주인공도 하지 않았는데 사미자 씨가 1980년대 수입 많은 배우 탑5 안에 뽑힌 이유는 그만큼 다작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지내다 보니 당연히 본인의 건강을 돌볼 새도 없었습니다.
2005년 어느 날 지방의 한 촬영장에서 촬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사미자 씨는 비 오듯이 식은땀을 흘리며 가슴에 묵직한 통증을 느끼게 됩니다.
그 후 사미자 씨는 겨우 촬영을 끝낸 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쓰러지고 맙니다.
사미자씨는 당시 고통은 ‘차라리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의 고통이었다고 하는데요.

알고 봤더니 그녀는 심근경색이라는 병을 얻게 되었으며 심장으로 가는 3개의 동맥혈관 중 2개가 막혀서 심장마비로 이어질 수 있는 심각한 상황이라 수술을 서둘러 진행해야 했습니다.
당시 수술을 마치고 담당 간호사는 사미자 씨에게 “피의 반이 찌꺼기라고 보면 돼요” 라는 이야기를 건네요.
그녀는 큰 충격에 빠지기도 하였습니다.
그 후 퇴원 후 운동도 하고 체중 관리도 하며 건강을 회복하고 다시 활동을 이어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어 더 큰 불행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최대 위기

2018년 아침마당 출연 도중 사미자 씨는 몸에 이상을 느껴 갑자기 병원으로 향하게 됩니다.
병원에서 뇌경색이라는 판정을 받게 되어 급하게 수술을 하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됩니다.
나중에 걷기 힘들 만큼 다리에 후유증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당시 남편도 선반을 딛고 작업을 하다가 다리가 미끄러져서 코가 으스러지고 눈 시신경을 다치는 중상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불행한 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동안 건강했던 큰아들은 후두암 진단을 받고 병원에서 암 투병을 하게 됩니다.
심각한 사고가 연이어 세 번이 터져버린 것이죠.
이때가 사미자 씨의 가장 큰 인생의 고비였고 당시 사미자 씨의 첫째 며느리는 무려 2년 동안 시어머니와 남편의 병수발을 들어야 했습니다.
망중한

올해로 82살이 된 사미자 씨는 1년 전 본인의 근황을 전한 적이 있었습니다.
“뇌경색은 많이 회복됬어요”
“요즘 ‘내일은 뭐하지?’ 라는 생각을 하면서 한껏 망중한을 누리고 있어요”
이어 그녀는 “과거 계속 일을 했어요. 가장으로써 ‘난 한 달에 이거 안 벌면 안 돼’ “
“항상 그런 조바심 속에서 살아서 하고 싶은 거 하나도 못하고 살았어요” 라며 앞만 보며 열심히 달려온 시절을 떠올리기도 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그동안의 고생한 세월을 잊고 건강하고 행복하게만 여생을 즐기시길 진심으로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