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필이면 지금인가요” 윤문식, 충격 시한부 판정에 절망..재혼한 부인마저 결국..


친숙한 유행으로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은 배우 윤문식

그가 최근 한 방송에서 고백하길 

“나는 이 나이 되도록 50년 동안 담배를 입에서 뗀 적이 없었고 겨울만 되면 기침을 달고 살았다”


“어느 날 기침이 멈추지를 않아 아내와 병원에 의사가 나보고 ‘암입니다’라고 했다”

“왜 하필이면..나한테 내가 뭘 잘못했길래 싶어 온몸이 떨렸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듣고도 믿을 수 없었던 폐암 3기 진단으로 당시 수술하면 1년 더 살 수 있을 거란 시한부 선고를 받아야 했고 

설상가상 그때  남편이 아프면 보필해야 했던 18살 연하의 아내마저 뇌수막염에 걸리고 1년 있다가 갑상선암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돌이켜보면 모든 게 자신의 탓 같아 그저 마음속으로 회한의 눈물을 흘려야 했던 배우 윤문식의 파란만장한 인생에 대해 말해보고자 합니다. 

불행은 예고없이..


윤문식은 1943년 충남에서 태어납니다.

그의 아버지는 술과 풍류를 즐기던 한량이었는데요.

윤문식이 7살 때 술 취한 상태에서 길에서 잠을 자다 그대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7명의 자식을 덩그러니 남겨 놓은 채 부친이 세상을 떠나버리자, 그의 어머니는 당시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시장에 나가 장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나중에는 어머니가 돈을 벌어 논도 사고 하면서 당시 동네에서 같이 뛰어 놀던 애들 중 훗날 대학까지 나온 애는 본인 포함 두 명밖에 없었다고 했습니다.

한편 학창 시절 윤문식은 어느 날 동네를 돌아다니던 악극단을 보고 혼을 빼앗길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고 이후 ‘극단이 언제 공연을 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며칠 전부터 밥도 못 먹을 만큼 설렜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들이 연극영화과에 진학하려 하자 어머니는 “네가 배우가 되면 동네 개들이 다 웃는다”라며 연극영화과 진학을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자식에게는 부모 없듯 이후 미군 부대에서 스스로 돈을 벌어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한 아들이 대학생이 되어 예술극장에서 공연을 하는데요.

사람들이 박수 치고 신나 하니까 당시 제일 앞에 앉아 있던 그의 어머니는 “저게 우리 아들이오”라고 자랑하며 좋아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행복한 순간도 잠시 불행은 예고 없이 찾아오게 되는데요.

그가 대학을 졸업 하기 전, 시장에서 장사하시던 어머니가 차 위에서 80kg짜리 미역을 옮기다 떨어뜨려 목이 심하게 다치고 말았습니다. 


병원에서 전화가 와 가보니까 벌써 이미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라 말도 못하고 눈만 뜨고 있었고 그때 그가 “엄마 나 누군지 알아?” 물으니 눈만 깜빡이고 난 뒤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후 오랜 시간 무명 연극배우로 활동하던 그는 어느 날 선배로부터 “내 여동생 친구라는데 공연 팜플렛을 보고 너를 찍었다 한 번 만나보지 않을래?”라며 훗날 첫 번째 아내를 소개받게 되었습니다.

 
당시 지독하게 가난한 연극배우였던 그는 결혼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맘편히 술이나 얻어 먹기 위해 선뜻 약속 장소로 향했는데요.

그의 아내가 “제가 살 테니 드시고 싶은 안주를 고르라”고 하자 이게 웬 떡이나 싶어 간만에 아주 맛있게 술을 들이켰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술을 마시면서 윤문식은 집안 재산을 다 날린 아버지, 돌아가신 어머니 등 자신의 얘기를 허심탄회하게 털어놓기 시작했고 그때 말 없이 고개만 끄덕이던 그의 아내를 다음 날 다시 만나면서 두 사람의 사랑이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첫 번째 아내가 초등학교 교사였고 장인어른 될 사람이 교장 선생님이였는데요.

빈털터리였던 그에게 딸을 시집 보낼 수 없다며 집안의 반대가 보통 반대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알뜰살뜰 저축했던 아내 덕분에 살 집을 미리 마련하면서 두 사람은 장인어른의 허가도 없이 결혼을 강행했는데요.

그의 고백에 따르면 결혼한 지 3년 정도 지나서야 장인어른의 용서를 받았으며 또한 40살이 되기 전까지는 집에 돈 한 번 벌어다 준 적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40살 이후에는 그가 80년대 한국 마당놀이의 중흥기를 이끌며 그때부터 아내에게 돈을 고스란히 갖다 주기 시작했죠.

그런 행복도 잠시 신혼 초부터 건강에 좋지 않았던 아내가 병이 더욱 악화되고 말았습니다.

그의 아내는 당뇨 합병증으로 이후 15년 동안 병원을 전전하는데 온 몸에서 농이 나와 하루의 기저귀를 100장 넘게 써야 했습니다.

결국 간병인도 버티지 못하고 나가는 상황이 되자 윤문식과 그의 딸이 번갈아가며 간호해야만 했습니다. 

당시 딸이 결혼 날짜를 잡아 사위 될 사람을 “엄마 내 남편 될 사람 데리고 왔어” 라며 병원에 데리고 왔는데요.

아내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사위에게 보여주는 것이 창피해 “병실에 불을 꺼라”고 말한 후 

사위의 손을 꼭 잡고 “내 딸 부탁하네” 그 한 마디를 남긴 채 이후 끝내 딸의 결혼식엔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윤문식은 15년 동안이나 간병하며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막상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또한 당시 아내의 대소변을 받아내면서 정신은 멀쩡하던 아내가 그런 모습을 보이기 싫어하며 외면하던 모습이 지금까지도 가슴이 미어진다고 했습니다. 

끝내 아내와 사별한 윤문식은 “돌이켜 보니 모든 게 자신의 탓 같다”며

“만약 자신이 딴따라가 아니라 버젓한 직장에 있었으면 아내가 살지 않았을까” 하는 죄책감에 힘들어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아내가 사별한 지 1년 만에 18살 연하의 두 번째 아내를 만나게 됩니다. 

두번째 아내

두 번째 아내는 같은 아파트의 이웃 주민으로 마주치며 인사를 하다 가까워지게 되었고 그러던 어느 날 지방에 내려갈 일이 생긴 윤문식이 차가 없자 지금의 아내가 직접 운전을 하여 데려다 주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느 3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두 번째 아내와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매 맞을 일”이라며 거절했는데요.

하지만 이내 아내가 주민등록증을 보여주며 50세인 것을 확인한 후 두 사람은 함께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두 사람은 운전을 안 하던 윤문식이 공연이 굉장히 늦게 끝나 한 번 자고 간 것이 인연이 되어, 동거부터 하게됩니다.

이후 2011년에 결혼식을 올리는데 참고로 장인은 윤문식보다 12살 장모는 4살 연상이었습니다.

역시나 장인어른의 반대가 보통 반대가 아니었는데요.

하지만 윤문식의 팬이었던 장모의 도움을 받아 두 사람은 마침내 결혼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바람이 거치고 행복한 꽃길만 걸을 거라 생각했던 그에게 청천 병력으로 또다시 시련이 찾아오게 되는데요.

시한부 판정

두 번째 아내마저 당시 뇌수막염에 걸리며 고생하다 1년 후 갑상샘암까지 걸리게 되는데요.

비교적 나이 많은 윤문식을 그녀가 보필해야 하는데 거꾸로 그녀가 아픈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겨울만 되면 기침이 끊이지 않았던 그가 어느 날 너무 심하다 싶어 병원에 갔더니 폐암 3기 진단과 함께 1년 시한부 선고를 받고 말았습니다. 

그는 1년 시한부라는 말에 “그럼 치료와 관련된 어떠한 것도 아무것도 안 하겠다”고 했으며 또한 그때 지방 공연이 잡혀 있던 터라 차라리 연기를 하다 생을 마감하기로 마음먹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아내가 다른 병원에서 한 번만 더 검사해보자며 그를 설득했고 마지막 가는 길에 뭘 못하겠냐고 생각해 받아봤더니 놀랍게도 거기서는 폐암 3기가 아닌 1기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폐암 1기를 다시 선고받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그는 수술한 지 20일 만에 공연장에서 마지막에 박수를 받는데요.


‘희로애락을 다 견디고 나니까 인생 별거 아니구나, 나는 이제 다 이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윤문식 그가 고백하길 

“암은 스트레스 때문에 온다고 하는데 그래서 나는 스트레스 받을 일이 있어도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

“예전에는 원망스러운 것도 많았고 원수 같은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지금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내가 그들보다 잘못한 게 더 많다”


“그래서 그동안 화냈던 게 미안하다, 이제 저 세상 갈 때 되니까 깨달은 게 후회된다”고 했습니다. 

윤문식 그가 부디 앞으로 오래도록 건강하게 활동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