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저렇게 뻔뻔하게..” 뒤늦게 밝혀진 진미령, 전유성 이혼한 충격적인 이유

가수 진미령은 데뷔 이후부터 지금까지 40년간 체중 관리 등을 하며 여전히 외모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진미령은 갑작스러운 사고로 목숨을 잃을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지낼 때 미국 언니 집에서 놀러갔여요


“그런데 담배가 피우고 싶어서 언니 방으로 들어갔어요”

“20년 전 당시에 권총 모양에 라이터가 굉장히 유행했었어요”

  
“방에 들어갔는데 화장대에 권총 한 자루가 있더라고요”

” 형부가 LA세관원이어서 항상 권총을 소지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게 라이터라고만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담배를 물고 22구경 총을 얼굴에 겨눴어요”

“라이터로 착각하고 불을 붙이려 두 차례 시도했지만 불이 나오지 않자 진미령은 화가 나서 다른 곳을 향해 쐈고 총알은 화장대를 향해 발사됐습니다”

“너무 놀라서 뭐야 이러고 있었는데 마루에 있던 사람들이 총소리를 듣고 다 들어왔어요”


“상상해 봐요 얼굴 다 날아갈 뻔했어요”


젊은 시절 여러 일을 겪었던 진미령의 일생은 돌아보면 참 우여곡절이 많은 삶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진미령의 아버지는 미국 정부가 선정한 한국전쟁 4대 영웅으로 한국전쟁의 참전 이후 북파 공작원으로도 활약했던 김동석 예비역 대령입니다. 


육사 8기 출신인 진미령의 아버지는 제17연대 101중대장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해 박성철이 지휘한 15사단을 전멸시켰고 1950년 9월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소속 미군 연락장교로 발령받아 첩보 세계에 입문합니다. 


이후 인천 상륙 작전과 서울 탈환 작전에서 결정적인 첩보를 입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전쟁 도중 이북의 최고 권력자 생포 작전에 투입되기도 했습니다.

진미령은 화교라는 설이 있지만 부모님 양쪽 모두 한국인이며 진미령 아버지가 중국 대사와 개인적 친분이 있어 중국어를 배우기 위해 서울에 있는 화교 학교를 졸업했다고 합니다. 

데뷔 후 유일하게 중국어를 하는 연예인이었던 진미령은 방한한 중국 스타들의 동시 통역을 맡았습니다. 

당시 방한한 홍금보의 통역을 담당했던 진미령은 “홍금보에게 중국어로 이야기를 했는데 홍금보가 능통한 한국어로 ‘한국말로 해도 돼’라고 너스레를 떨어 당황했다”고 이야기해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습니다.

가수로 데뷔하면서 쓰게 된 진씨 성은 몸이 약한 어머니를 대신해 11살까지 그녀를 키워준 외할머니의 성을 따른 것입니다. 


김미령 아닌 진미령으로 활동하게 된 데는 연예인 자식은 필요 없다던 아버지의 반대도 큰 몫을 했다고 하죠. 

진미령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자랑스러움을 느낀다고 자주 표현했었습니다.

가물가물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돌이키며 진미령은 아버지를 무뚝뚝하지만 눈빛이 형형하게 살아있던 분으로 회상했습니다. 

사실 진미령은 가수라는 꿈을 가진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제가 화교 학교를 3월에 졸업하고 8월에 대만으로 교환 학생을 갈 예정이었어요”

“그 전까지 놀기는 뭐해서 오아시스 레코드라는 곳에 가서 노래 연습을 했어요”

“그 때 타미 아저씨가 저를 보시고 가수로 데뷔시키겠다”고 하셨어요. 

“저는 대만을 가야 한다고 말씀드렸는데 타미 아저씨가 대만 가기 전까지 가수로 데뷔시키겠다”고 하셨어요.

“대만으로 가기 전에 가수로 확 떴어요”

“그래서 대학교는 못 가고 가수가 됐어요” 

진미령은 아버지의 반대에도 1977년 제1회 mbc 서울 가요제에 장덕이 작곡한 ‘소녀와 가로등’으로 데뷔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린 나이에 상당한 인기를 얻게 되죠.

하지만 그렇게 가수 활동을 하던 진미령은 1980년 홀연히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됩니다. 

진미령은 미국에서 일만 했습니다. 

“제가 조용필 이주일 선생님과 친했어요”

“두 분이 미국에 오셨을 때 얼굴을 보러 갔어요”

“조용필 씨가 제가 한국을 떠난 게 아쉽다고 곡을 만들어 주시겠다고 하더라고요 이주일 선생님도 제가 활동하시길 바라시더라고요”

“미국에서 일하면서 공석이 생겨 가구 매장 쇼룸에 출근하게 됐어요”


“그렇게 10년 정도 내 삶을 살았어요”

“공부를 많이 해서 미국에서의 제 삶이 값졌어요”

“그러다가 보험설계사 자격증까지 땄는데 조용필, 이주일 선생님이 그런 이야기를 하셔서 고민을 많이 했어요”

“어렸을 때 제가 너무 설렁설렁 가수를 했기 때문에 오인할 수 있는 자리를 다시 한 번 만들고 싶더라고요”

“내가 미국에서 일한 에너지를 다시 쏟아보고 싶더라고요”

“그렇게 어렵게 정리를 하고 한국으로 귀국했어요”

“김창남 씨가 곡을 만들어 주겠다고 했던 게 생각나서 찾아갔어요”

“그렇게 탄생한 곡이 ‘아하’예요”

임영웅과의 듀엣 무대로 역주행에 성공한 ‘미운 사랑’에 얽힌 일화도 있는데요.

 
“트로트 풍의 노래는 처음. 해본 거예요”

” ‘아하’ 뒷곡이 필요했어요. 트로트는 나훈아 아니에요?”


“무작정 선생님을 찾아가서 인사를 한 뒤 곡을 받아보고 싶어 찾아왔다고 했어요”

“100일 동안 아침 10시면 나훈아 선생님의 사무실에 찾아갔어요”

“그때 한 앨범 전체를 만들어 줬어요”

“그 덕에 나훈아 선생님의 디너쇼 게스트로도 올라가게 됐어요”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인지 알게 된 진미령은 이후 서울 올림픽 때 잠깐 통역으로 자원봉사를 했고 1990년 귀국해 다시 가수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방송 활동을 하던 중 전 남편 전유성을 만나게 됩니다. 

진미령은 지난 2001년 개그맨 전유성과 결혼해 연예계 최고의 잉꼬 부부로 불리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후 이혼 소식을 전합니다.

과거 진미령은 전유성과 혼인신고를 하지 않고 사실혼 관계였는데요.

이에 대해 진미령은 “전유성의 호적에 두번째 부인으로 들어가는 것이 싫었다”

“또 전유성의 아이도 낳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결국 헤어지게 되고 시간이 좀 더 지난 후 그 소식이 알려집니다. 

여기에 이혼 사유를 둘은 이렇게 밝힙니다. 

먼저 진미령의 이야기는 이러 했는데요.

 
“냉면이 먹고 싶어 남편과 만나기로 한 적이 있어요”


“냉면 집에 도착했을 때 남편은 이미 혼자 냉면을 다 먹고 난 후였어요”


“하지만 함께 있어주겠다고 해서 제가 주문한 냉면을 먹으려는데 갑자기’ 난 다 먹었고 보는 건 지루하니 먼저 가겠다’는 거예요”

  
“당황해서 순간 아무 말 못하고 있는데 정말 가버리더라고요 그때 헤어져야겠다고 결심했어요”


“냉면을 먹는 이 짧은 순간도 기다려주지 못하는데 앞으로 어떻게 인생을 함께 살아나가겠어요”


“10년 동안 참아왔던 것이 표출된 계기였어요”


전유성은 이에 대해 자책하며 

“진미령과 관련된 이야기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

“난 단란한 가정을 하기에는 자격이 없는 사람인 것 같다”


“돈 벌이도 그렇고 가정적인 성격도 못 된다.  많은 면에서 부족했다”

“먼저 진미령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남편 전유성은 굉장히 배려가 없는 사람입니다”

“냉면 먹는 동안도 기다려주지 못하는 남자니까요”


“배려 없는 부부란 남남보다 못한 존재죠”


전유성은 젊은 때나 지금이나 이런 기인 같은 행동을 했지만 젊은 시절의 진미령은 아마 그런 모습까지도 매력적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삼계탕 집에 대한 엉뚱한 기획이나 책을 내고 다양한 공연을 기획하는 전유성의 모습을 보고 실제로 진미령 역시 자극을 많이 받았죠. 

진미령은 헤어지기로 작정한 결정적 이유로 ‘경제 관념 차이’를 꼽았습니다. 

“그 사람은 착하고 좋은 남자예요”

“갈라서기로 한 건 경제 관념의 차이 때문이에요”

“모든 이권을 남한테 줘요”

“노후에 쓸 돈이 없으면 사람들한테 가서 달라고 하겠다더라고요”

“본인은 좋은 마음에서 남들에게 다 베풀지만 사람 일이라는 건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잖아요”

“저는 뭐든지 정확하고 분명한 것이 좋고 신세 지기 싫어서 밥값도 제가 내야 편한 성격인데 그런 점들이 맞지 않았던 거예요”  

최근에는 김치 사업가로 변신해 진미령은 또 다른 삶의 페이지를 넘기는 중입니다.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진미령의 앞으로의 모습도 기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