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 이유가 없었다” 父,동생,남편을 차례로 사별 후 남편 빚마저 떠안은 양수경, 갑자기 아이 2명을 입양한 이유?

1990년 ‘사랑은 창밖의 빗물 같아요’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가수 양수경은 당시 이 노래를 따라 부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누렸습니다. 


이후에도 그녀가 부른 수많은 곡들이 대박을 치며 90년대 초반을 대표하는 여성 가수로 발돋움했습니다.

또한 국내 뿐만 아니라 1991년부터는 해외에도 진출하여 한류라는 단어가 생소했을 그 당시에도 여러 나라에서 많은 사랑을 받으며 양수경 그녀의 가수 인생은 불꽃처럼 화려했습니다.

그렇게 가수 양수경을 빼고는 90년대 초반 가요계를 논할 수 없을 정도로 누구보다 화려했던 그녀였지만 그러나 인생사 호사다마라고 했던가요

가수로서 잘 나갔던 그녀의 삶과 달리 그 뒤에 숨어 있는 정작 인간 양수경의 삶은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는 깊은 슬픔으로 희극보다는 비극이 더 많이 쏟아져야 했습니다. 

그녀는 한때 대한민국에서 가장 성공한 음반 제작자이자 소속사 회장이었던 변두섭과 결혼하여 주식 부자로 불리며 연예인 주식 부자 3위까지 올랐는데요.

그러나 그 큰 돈을 하루아침에 모두 날리며 설상 가상 남편마저 스스로 생을 마감한 후 이웃 채권자들의 입에서 참아 담을 수 없는 험한 말이 나오자 자신의 재산이 0원이라고 호소해야만 했습니다.


또한 자신의 집에서 함께 살던 동생마저도 스스로 생을 마감하자 남은 두 조카들을 입양하며 하루 아침에 3명의 아이를 둔 미망인이 되어버린 양수경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에 대해 말해보고자 합니다.

그녀의 전성기

시간을 거슬러 그녀는 1965년 전남 순천시에서 2남 2녀 중 맏이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가게도 없이 리어카에 생선을 싣고 다니며 장사를 할 정도로 찢어지게 가난했고 이후 한참 후에야 고생 끝에 작은 생선 가게를 차릴 수 있었습니다. 

그때는 부모님이 생선 장사하는 게 너무 부끄럽고 싫어서 훗날 그녀가 데뷔하자마자 부모님의 생선 장사를 그만두게 하였는데요.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땐 그게 왜 부끄러워서 그만두게 했는지 후회가 된다고 했습니다. 

한편 어릴 때부터 남들보다 예뻐 주목을 많이 받는다는 걸 알았던 그녀는 그때부터 가수와 톱스타를 꿈꾸었는데요.

중학교 이후부터는 그 어린 나이에 ‘가수는 신비로워야 한다’며 자신의 신비로운 이미지를 위해 남들 나가는 떡볶이 먹으러 가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카페도 훗날 나이 50이 다 돼서야 처음 가봤다고 했습니다.

아무튼 가수를 꿈꿨던 그녀가 19살 때 이선희가 ‘J에게’로 대상을 탔던 1984년 강변가요제에 참가했지만 예선에서 떨어졌고 이후 고3의 나이로 앨범도 발표했지만 그것마저 망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1986년 kbs가 주최한 ‘신인 무대’라는 프로에서 그녀가 사람들에게 주목받기 시작했고 이후 가수 박강성이 작곡한 ‘바라볼 수 없는 그대’가 마침내 대박을 내며 가수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후에도 ‘사랑은 창밖의 빗물 같아요’ ‘사랑은 차가운 유혹’ 등 수많은 곡들이 당시 가요TOP10에서 5주 이상 1위를 하는 등 1990년대 초반을 대표하는 여자 가수로 발돋움했습니다.

또한 앞서 얘기한 대로 당시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상당한 인기를 가질 정도로 그렇게 가수로서 양수경은 가요계를 휩쓸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90년대를 주름 잡으며 남부러울 것 없는 인기를 누렸던 그녀는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소속사 사장이었던 변두섭과 깜짝 결혼 발표를 하고는 돌연 연예계를 떠나버리게 됩니다. 


이후 남편의 회사 주식을 취득하며 부잣집 사모님으로 변신해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고 또한 이때 이 두 부부가 52억을 투자해 1년 3개월 만에 303억 원의 수익을 남기는 등 한때 연예인 주식 부자 3위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가수로서뿐만 아니라 모든 것들이 탄탄대로 꽃길만 펼쳐지던 그 시기 그녀에게 갑작스레 여러 가지 악재가 일어나면서 영원할 것 같던 그녀의 꽃길이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잇다른 가족의 죽음


당시 유난히 딸 바보였던 그녀의 아버지가 어느 날 병원에서 진단을 받은 뒤 갑자기 보름 만에 세상을 떠나면서 너무나도 충격을 받았던 그녀가 이를 극복하고자 하와이로 떠나게 되었는데요.

설상가상 이때 그녀와 함께 살던 친동생마저 평소 우울증으로 너무 힘들어하자 하와이에 있던 그녀가 전화로 다독인 지 불과 몇 시간 만에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비극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당시 그녀는 사랑하는 가족을 연달아 잃자 죽음 앞에서는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결국 심한 공황장애가 오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공황장애를 너무나도 심하게 겪어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힘들어 마치 기억 상실증이라도 걸린 것처럼 몇 년간의 기억이 좀처럼 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 후 남겨진 조카 2명을 입양해 원래 아들 하나에서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으며 당시 그녀의 일기장에는 ‘잠든 세 아이를 눕히고 미친 여자처럼 밤 하늘만 바라본다’라고 적혀 있을 정도로 힘든 시간들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래도 그나마 남편의 사업은 날로 승승장구하여 그녀는 여전히 부자였는데요.

그러나 욕심이 과했던 건지 당시 이들 부부를 둘러싼 각종 여러 가지 의혹과 논란들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2013년 설상가상 그녀의 남편마저 자신의 사무실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고 이러한 선택의 배경에 대해서는 막연히 경제적인 문제로 인한 추측만 있었을 뿐이었는데요.

결국 이것은 현실로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당시 그녀의 남편은 사업이 힘들어지자 천문학적인 금액의 채무와 횡령을 하고 말았는데요.

또한 경제적인 것뿐만 아니라 평소 약을 먹어도 2시간밖에 못 잤던 그는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들로 결국 가족들을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인생의 울타리였던 남편마저 세상을 떠나게 되자 이후 그녀는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큰 충격을 받았고 또한 이때 남편의 빚까지 일부를 떠안게 되면서 너무나도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채권자들에게 “미안하지만 현재는 재산이 0원”이라고도 했습니다.

당시에 대해 양수경은

“남편이 사라지고 나서 내 곁엔 아무도 남지 않았다”

“그 사람이 있을 때와 없을 땐 정말 다른 세상이었다”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는 게 힘들었고 말을 꺼내기가 무서웠다”


“나도 인생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몇 번이나 들었지만 세 아이의 엄마이기에 차마 나만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앞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게 되었다”

“처음엔 사업을 할까도 생각했지만 그것보다는 내가 잘하는 일이 뭘까  눈 감는 날까지 후회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뭘까?를 고민했다”

“그 결과 답은 노래였고 난 가수 양수경이야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20년만의 복귀

이후 그녀는 가수 활동을 중단한지 20년 만인 2016년 7월 KBS ‘불후의 명곡’에서 전설로 출연하며 복귀했는데요.

그녀는 ‘사랑은 창밖의 빗물 같아요’를 부르다 반가운 마음에 눈물을 흘리는 한 관객과 눈을 마주치고서 감정이 북받쳐 울먹이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후 그녀는 ‘불타는 청춘’에 새 친구로 출연하는 등 TV를 통해서도 간간히 얼굴을 비췄습니다. 

올해도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지방 투어 콘서트, 디녀쇼 등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양수경 씨에게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