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같네..” 마지막 살 길마저 막히자 총 들고 방송국 돌진한 故 송재호의 가슴 아픈 인생, 전두환과의 관계

국민 아버지 배우 송재호 씨가 지병으로 별세했습니다. 

고인은 데뷔 후 반세기 넘게 150편이 넘는 작품에 출연하며 국민 배우로 자리매김했는데요. 

그런 그가 머리 끝까지 분노해, ‘너 죽고 나 죽자’식으로 트렁크에 총을 싣고 방송국에 돌진한 적이 있다고 하는데요.

또한 사채 빚 때문에 3번이나 극단적인 시도를 했고, 아들을 잃은 슬픔에 뇌 손상까지 발생했다는 사실에 많은 이들을 충격케 하고있습니다.

오늘은 굴곡있었던 故 송재호 씨의 인생에 대해 낱낱히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50년 쩐의 전쟁

그는 1939년 평양 출신으로 부산에서 자랐는데요.

언젠가는 영화 한 번 만들어 보겠다며 그는 고등학교 때부터 책가방에 카메라를 넣고 다녔죠.

송재호는 부산에서의 성우 생활을 정리하고 64년 상경해 충무로에 첫 발을 내딛습니다.

그곳에서 충무로 고전 다방에서 김기영 감독을 만나게되는데요.

감독에게 “신성일 같은 쌍꺼풀도 없는 니가 배우가 되겠다고?” 라는 핀잔을 받고

그 자리에서 바로 “째고 오면 되겠습니까?” 하고는 그 길로 눈을 째고 왔다고 하는데요.


오기로 바로 쌍꺼풀 수술까지 받을 만큼 영화에 대한 열망이 뜨거웠고 당시 그가 가진 건 배짱 뿐이었죠. 

송재호는 나이가 들어서는 인자한 아버지 역으로 대중에 친숙하지만 젊었을 때는 제임스 딘 같이 반항아 역도 제법 했고 전쟁 영화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송재호는 자신의 인생 역정이 드라마 ‘쩐의 전쟁’과 같았다며 사채로 인해 세 번이나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고 50년간 사채 빚을 갚으며 살아왔다는 충격 고백을 했죠. 


영화 제작의 뜻을 품고 30대 초반에 영화 제작사를 차렸지만 곧 바로 망해 1억 원이 넘는 빚을 지게 됐는데요.

엄청난 빚을 진 송재호는 은행을 이용하는 것에 한계를 느껴 사채를 쓰기 시작했고 사채로 빚을 갚는 등 빚으로 빚을 갚는 악순환이 계속됐는데요. 


송재호는 한때는 사채업자에게 하도 시달려 칼을 빼 자신의 배에 대고 “오지마 한 발자국만 더 오면 확 그어버릴 거야” 하고 위협을 가해 사채업자들의 봉변을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빚을 갚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연기 활동을 해왔던 송재호에게 너무나 큰 시련이 닥치게 되는데요.

연기 활동 정지

그는 전두환 대통령 시절, 정권의 반대 세력에 대한 홍보 프로그램 MC를 맡았다는 이유로 2년 간 방송활동을 할수없게 됩니다.

처음에 송재호는 ‘시청자들이 나를 싫어해 방송국에서 배역을 주지 않는구나’라고 생각하며 마음의 위안을 삼고있었습니다. 

그러나 전두환 대통령이 “저 사람은 당분간 TV에 안 봤으면 좋겠다”라고 얘기해서 일을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 후 크게 분노했다고 합니다.

특히 당시 송재호는 5명의 자녀를 뒀던 탓에 사채 빚을 감당하기에 더욱 벅찬 상황이였는데요. 

그래서 그는 소지하고 있던 총을 트렁크에 싣고 방송국에 갔습니다.

‘죽을 결심을 했지만, 나 혼자는 죽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갔다고 하는데요.

막상 방송국에 도착해 트렁크에서 총을 꺼내려하는데 세 번을 시도해도 트렁크가 안 열렸다고 합니다.

이에 송재호는 ‘아 신이 나를 막는구나..’라는 생각에 마음을 접었다고 합니다. 

송재호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빚에 대한 심정을 얘기했는데요.

“너무 괴로웠고 삶의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늘 쫓기듯 찌들어 사는 인생이 너무 힘든 나머지 극단적 선택을 세 번이나 시도했었다”


“약도 먹어봤지만 실패했다”고 밝혔죠.

그러나 송재호는 신앙 생활을 시작하면서 인생관이 바뀌고 희망을 찾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유명한 주당에 담배도 하루 5갑을 피웠던 송재호는 1980년 고정 출연하던 한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 만난 패널에 의해 교회에 나가게 됐고 차츰 안정을 찾아갔죠. 

뇌손상까지…


그러나 경제적인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는 않아 고통은 계속됐는데 특히 2000년 영화사를 차렸다가 9.11 테러로 인해 뉴욕 로케 영화가 무산되고, 막내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는 등 또 다시 고난이 찾아옵니다. 

그는 4남 1녀의 자녀가 있었는데 2000년 결혼을 앞둔 28살의 애지중지하던 막내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고 마는데요. 

그때의 충격으로 그는 한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 할 정도로 아들을 잃은 아픔의 충격은 그렇게 컸습니다. 

부실한 고속도로 관리와 국산 승용차의 엉성한 품질이 빚은 참사였던 까닭에 그에 대한 분노까지 겹쳐 자신을 추스르기 힘들었죠. 


그때 심혜진 씨와 ‘여비서’라는 드라마에 출연 중이었는데 고작 2줄짜리 대사가 외워지지 않았고 삼성의료원 신경과 나덕렬 교수로부터 진찰을 받았는데 뇌세포가 급속하게 사멸되고 있다는 진단을 받게 될 정도로 충격이 심했습니다. 

그러나 막내 아들의 사고는 가족을 다시 뭉치게 했고 비뚤어진 생활을 하던 큰 아들도 마흔이 넘어 성직자가 되면서 다시 용기를 얻었죠. 

50년만에 드디어…

결국 송재호는 2005년 께 이자까지 모두 갚았는데

“한 50년동안 빛만 갚았다. 내가 지나온 세상을 돌아보면 참 희한하게 산 것 같다”

  
“내가 한 50억쯤 벌어놓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던데 실제론 50억이 아니라 5억도 없고 50만 원도 없다”

“다 빚 갚고 이자까지 주고 하다 보니 나한테 남는 건 아무것도 없더라”고 고백했습니다.

송재호는 기독교로 귀의 후 근육이 몸에 배어 은총 같은 건강을 얻었지만 60~70년대부터 연기 마당을 누볐던 이들이 그렇듯 그도 따로 건강을 챙길 형편은 아니었습니다. 


먹고 살기 버거운 때인지라 그나마 돈 좀 주면 술 먹기 바빴고 조니 워커 2병쯤은 앉은 자리에서 해치웠다고 합니다.


또 그는 연예계에 내로라 하는 골초였는데 81년 교회 금식 기도로 끊기 전까지 체인스모커였죠. 

그런 그가 사흘간의 금식 기도로 담배를 딱 끊었고 그 후에도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가 건강을 위해 클레이 사격의 일가를 이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인데요.

호형호제했던 박종규 전 경호실장과의 인연이 계기가 돼 78년 처음 총을 잡았다고 하죠.

사격은 연기에 힘을 보탠 원동기 같은 에너지원이었는데요.

뭐든 시작하면 끝을 보는 천성 탓에 그는 틈만 나면 사격장으로 달려갔다고 합니다.


그가 사격에 일가를 이뤘다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닌데 85년부터 내리 3년 동안 전국 체전 금메달을 거머쥐었는가 하면 세계 사격연맹에 등록된 국제 심판으로 88 올림픽 때는 결승전 주심을 맡아 세계 사격사의 이름을 남기기도 합니다. 

치열했던 연기자의 삶

연기자로서 송재호 그의 삶은 치열했는데요.

지난 64년 영화계에 데뷔해 60~70년 영화 ‘아로운’의 주인공 공모에서 무려 87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발탁된 이후 시작된 그의 연기 행로 이면에는 끊임없이 자기 완성을 추구한 한 ‘연기 장인’의 고뇌와 자기 연민이 똬리를 틀고 있었습니다.


사투리 연기에 능하여 표준어, 부산 사투리 심지어 평양사투리까지 현지인도 고향 사람으로 착각할 만큼 자연스러운 사투리를 구사하였다고 합니다.


늦은 나이에 데뷔해 나이가 꽤 많았음에도 어려 보이는 외모 덕에 많은 영화 주연을 맡으며 1970년대 중후반에 청춘 스타로 큰 인기를 누렸습니다.

그는 2012년에는 한국방송연기자노조의 일원으로서 kbs를 대상으로 밀린 출연료 지급을 촉구하며 촬영 거부 투쟁에도 참여했는데요. 

그는 당시 라디오 인터뷰에서 “나 스스로는 생계 걱정을 안 하지만 돈을 받아야 생활할 수 있는 후배 연기자들을 위해서 결심했다”며 후배들을 격려하기도 했습니다.

 
배우로든 탤런트로든 그는 많은 후배들에게 기둥 같은 존재였습니다.

TV를 통해 항상 깊은 연기를 선보이던 그는 2010년 11월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데요

숙환을 1년간 앓다 향년 83세에 세상을 떠나며 많은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습니다.


언제나 옆에서 친근한 모습으로 있을 것 같던 국민 아버지의 별세 소식에 많은 이들이 슬퍼했는데요. 

하늘에서는 그가 원하는 바를 다 이루며 행복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