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엄앵란 집에 도망까지..” 남자 잘못 만나 인생 꼬인 현미, 70년만에 밝히는 그녀의 눈물 고백

못마땅한 밴드마스터가 남편이 되기까지..


21살의 현미는 덕성여대 무용과 2학년에 재학 중인 여대생 가수로서 절대적 인기를 누리던 쇼단의 메인 가수였다면

이봉조는 26살의 패기만만하지만 아직은 무명 뮤지션이었죠.


현미 입장에서는 자신 월급의 반도 채 안 되는 신출내기 밴드 마스터가 당연히 눈에 들어오지 않았죠.

이봉조 역시 콧대 높고 도도한 현미가 도무지 못마땅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쇼 단장 입장에서는 쇼의 간판인 마스터와 메인 가수 사이가 자칫 틀어져 쇼를 망치지 않을까 늘 노심초사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구상해낸 것이 ‘이봉조 현미 사이 좋게 만들기 작전’이었고 그 작전 중 하나가 바로 ‘나이트 클럽에 함께 들어가 분위기 띄우기’였는데요.

당시엔 남녀가 춤을 출 때 손바닥 사이에 손수건을 끼우는 게 신사 숙녀가 갖추어야 할 예의로 여겼던 시절이었죠.

그런데 남녀가 유별한데 어떻게 맨손을 잡고 춤을 출 수 있느냐는 의미로 당연히 남자 쪽에서 손수건을 준비하는 게 상례였는데요.


그러나 이러한 관례를 비웃기라도 하듯 고 이봉조는 현미의 손을 덥석 잡고 마구잡이로 춤을 췄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얼마나 춤이 서툴던지 매번 그녀의 발을 밟기 일쑤였지만 솔직하고 어딘가 순수한 매력이 있는 사람이었죠. 


이렇게 시작된 둘 사이는 급격히 가까워지면서 오히려 쇼단의 운영이 위협받을 정도로 늘 붙어다녔는데요.

결국 단장은 둘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밴드 마스터 교체 조짐을 내비치자 아예 둘은 함께 미련 없이 쇼단을 나오게 됩니다.


그렇게 이봉조와 함께 가수와 작곡가로서 일과 사랑을 모두 이루며 꿈 같은 시간이 영원할 것만 같았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수상한 남편

당시 6.25 직후라 호적 같은 것도 없는 시절 사랑하는 남자가 결혼하자니까 그대로 믿은 현미는 모든 것을 주었고 그래서 임신까지 하게 되었으며 결혼식 날짜도 잡았는데요.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봉조는 결혼식 날짜를 계속 연기했고 그러던 와중 어느 날 한 여인이 두루마기를 입고 현미를 찾아와서 자신이 이봉조 부인이라고 말하며 딸도 둘이 있다고 하자 현미는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현미 역시 임신 8개월 때였고 유산도 할 수 없는 노릇이라 “일단 나는 모르겠고 이봉조 씨와 얘기하라 나도 지금 임신 8개월이 됐다”고 말한 후 그 자리를 떠났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봉조는 “본처와 다 정리했다”며 이혼 서류까지 보여주면서 현미를 안심시켰고 임신 8개월의 다른 선택이 없었던 현미는 이혼했다고 하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믿고 살림을 차리게 되었는데요.

 
하지만 이혼 서류는 현미를 놓치기 싫었던 이봉조가 가짜로 만든 서류였고 본처와 왔다갔다 하면서 두 집 살림을 했습니다.

현미는 이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전화 한 통이 왔는데 전화를 한 사람이 다짜고짜 “이봉조가 지금 애가 넷이다”라고 했는데요.

그래서 현미가 “무슨 말이냐 이혼할 당시 딸만 둘이라고 하지 않았나?” 물어보니 

“아니다. 알아보라며 자신은 현미의 팬인데 현미 씨가 속고 있는 게 너무 안쓰럽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정말 알아봤더니 75년도에 현미와 살면서 본 부인과의 사이에도 또 자녀를 출산하며 두 집 살림을 했던 것이었고 이혼한 줄만 알았던 현미에게는 청천병력 같은 소식이었습니다.


이제는 안 되겠다 싶은 현미가 “당신 참 나쁘다”며 이별을 요구하자 이에 이봉조가 술을 잔뜩 마시고 흉기를 들고 와

“나는 너와 헤어지면 못 산다”


“너나 나나 다 죽자 헤어질 수 없으니 다 같이 죽자”고 했으며 그 바람에 맨발로 잠옷 바람에 아이들을 붙들고 엄앵란 집으로 도망가게 됩니다. 


하지만 이봉조는 그곳까지 쫓아왔는데 이 과정에서 신성일과의 물리적 다툼이 있었으며 이후 현미가 관계를 정리하고 본처에게 돌아갈 것을 정식으로 요구했고 그렇게 13년간 왕래가 없었다고 합니다.

13년만에 만난 남편 그러나..


그렇게 이봉조와 헤어지고 세월이 흘러 현미가 아들 때문에 영주권을 받으러 미국에 3개월 정도 있을 때 전화 한 통에 왔는데요.

다름 아닌 그녀의 시누였고 “이봉조가 당뇨로 아파 입이 돌아갔고 고려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그녀에게 잠깐만 와줄 수 없냐”는 연락이었습니다.


그렇게 헤어진 후 13년 만에 이봉조를 만난 현미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정말 당당했던 이봉조는 어디 가고 당뇨가 와서 몰라보게 수척해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본처 와도 진작에 헤어지고 홀애비로 살고 있었으며 그때 이미 이가 다 빠져 틀니를 하고 있었는데요 그 모습을 본 현미가 “왜 당신이 이렇게 됐냐 어떤 이봉조인데”라며 땅을 치고 울었다고 합니다.


울컥 솟아오르는 안타까움에 미국에 있는 아들에게 연락해 

“나와라 아무래도 너희 아버지 다시 모셔야 될 것 같다”

“저렇게 이대로 두었다가는 안 되겠다”라고 했으며 현미 곁에 있기를 원했던 이봉조 역시 그녀와 함께 미국에 가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약속을 한 지 며칠 안 돼서 시누로부터 다시 전화가 왔는데 그녀가 말하길 “영권 애미야 봉조 심장마비로 죽었다”


그 순간 실감이 나지 않았고 tv를 트니까 뉴스로 비보가 나오고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현미는 모든 것이 자신의 죄인 것 같고 자신의 탓인 것 같았다고 하는데요.

그때 이봉조의 나이가 56세였는데 그 나이에 아무도 없는 데서 혼자 눈을 감았다는 게 너무 불쌍하고 곁에서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이봉조가 세상을 떠나고 어느 날 현미에게 연락이 와 이봉조의 본 처가에서 “우리는 이봉조와 부부 합장을 원하는데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는데요.

현미는 “이제 다 괜찮으니까 해드리라”고 했으며

당시 그녀가 말하길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원수가 어디 있는가”

“나는 그래도 이봉조 씨와 20년 동안은 정말 행복하게 살았지만 그 여인은 얼마나 힘들게 숨어서 나타나지도 않고 살았겠나”

“그러니까 같은 여자로서 참 안쓰럽고 불쌍하다”고 말하며 합창을 흔쾌히 승낙했고

“자신이 세상을 떠나는 날에는 아들이 살고 있는 미국에 묻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녀가 말하길

“내가 이봉조 씨와 함께 살 때는 전화 하나 내 명의로 된 게 없었고 모든 것이 남편 명의로 돼 있었다”


“그런 와중에 내가 맨발로 아이들 손을 잡고 도망 나왔는데 사람들이 ‘억울하지도 않냐 분하지도 않냐?’라고 하는데 내가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하고 20년을 살았고 두 아들을 낳았고 평생 부를 노래를 선물해 준 사람이 왜 밉겠냐고”

“나는 오히려 그 사람이 불쌍하고 너무 가슴이 아프다”

“나와 헤어지고 본처에게도 돌아가지 않고 13년을 혼자 살다가 그렇게 아무도 없는 데서 눈을 감은 거다”


“옆에 누군가가 있었다면 살았을 텐데 너무너무 불쌍하다”고 했습니다.


한편 현미는 젊었던 시절, 전성기 대스타 때도 후배들에게 따뜻한 선배이자 이야기도 잘 들어주며 도움도 잘 주는 선배였다고 합니다.


중년 이후에도 젊은 후배들이 어려워하지 않아 교류하는 데 무리가 없었고 ,노년이 된 후에도 어머니 같은 선배로 중견 가수나 연예인 후배들에게 늘 귀감이 되었다고 합니다. 


단 그런 성향이 때문인지, 과거 사기를 당하거나 80~90년대 지인들을 도와주다가 돈을 못 돌려받는 등 금전 피해를 당한 적이 많습니다.

제발 그분들이 현미 선생님에게 단 얼마라도 갚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