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재산도 목소리까지 다 바람처럼..” 결국 다 잃은 김범룡의 충격 근황, 그가 ‘바람바람바람’을 싫어하는 이유

오늘 얘기할 사람은 바람하면 생각나는 그 사람 ‘바람 바람 바람’의 주인공 김범룡인데요.


1985년 자신이 직접 작사 작곡한 ‘바람 바람 바람’으로 데뷔하자마자 엄청난 히트를 기록하며 그 당시 조용필 전영록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했었죠. 

이후 가수와 제작자로 승승장구하던 그가 2006년 앨범 발표 이후 돌연 가요계에서 바람처럼 사라지게 되는데요.

훗날 그가 고백하길 “가수는 노래 제목 따라간다고 하는데 나는 바람 바람 바람을 잘못 지었다” 

“내 인생은 바람처럼 스쳐만 지나가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한 때 대한민국 최고의 가수와 제작자였던 그가 왜 갑자기 방송에서 사라지게 되었을까요?

극심한 스트레스로 목소리마저 잃어버려 방송은 엄두도 못 냈다고 하는 김범룡,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에 대해 말해보고자 합니다. 

원하지 않았던 가수 데뷔

1959년에 태어난 김범룡은 어린 시절 찢어지게 가난하게 자랐다고 했습니다. 

그는 어려운 가정 형편 탓에 초등학교 시절부터 신문 배달, 아이스케키 장사, 메밀묵과 찹쌀떡 장사까지 하며 남들보다 힘들고 바쁜 학창 시절을 보내야했습니다.

변변치 않은 집안 형편에 항상 주눅 들어 살았던 김범룡이 중학생이 되면서 그의 인생의 첫사랑이자 은인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국사 선생님이었습니다. 

학생들의 우상이자 항상 단아한 모습의 국사 선생님을 보고 첫 눈에 반한 김범룡은 결국 호기심에 하교하는 선생님을 뒤쫓아 미행까지 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선생님에게 발각되었는데 크게 꾸짖을 줄 알았던 국사 선생님은 오히려 김범룡에게 빵을 사주었다고 했습니다. 

선생님이 빵을 사주며 타이르자 김범룡도 마음을 열고 가난했던 집안 사정에 대해 이야기하자 선생님이 말하길

“네가 가난한 게 아니라 부모님이 가난한 것거야”

“기죽지 말고 꿈을 잃지 말라”고 말하며 당시 고급 음식이었던 통닭 2마리까지 사주며 집으로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그날 이후로 새벽이면 신문을 돌리고 밤이면 찹쌀떡을 팔며 공부해야 했던 시절이었지만, 주눅들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한편 그는 어려운 가정 형편에도 미술과 음악에 소질이 있었는데 특히 미술은 전국 대회를 휩쓸며 미술하는 또래 중 김범룡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했습니다. 


엄청난 실력을 자랑하며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 합격했지만 55만 원의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결국 입학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장학금 제도가 있던 충북대학교에 들어가게 되어 미술을 계속 열심히 하고 싶었지만 원래 좋지 않았던 가정 형편이 군 제대 후 더욱 나빠졌는데요.

가족의 생계를 위해 결단을 내려야 했던 그는 그림을 그려서 당장 돈을 번다는 것은 힘들다고 판단해, 학창 시절부터 취미로 써온 100여 곡의 자작곡이 있어 노래를 선택하게 됩니다. 

그는 빨리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 100여 곡을 10곡으로 추려 데모 테이프를 만들어 여러 음반사에 보냈지만 처음에는 그의 목소리가 이상하다며 모두 거절당했는데요.

하지만 이내 독특한 애가 있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한 기획사에서 연락이 왔다고 했습니다. 


연락을 받고 사무실로 찾아간 그가 노래를 부르니까 사장이 말하길 “너 원하는 게 뭐니?”라고 했다는데요.

그 때 큰 금액을 불렀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김범룡이 가수가 되기 위해 준비하던 중 당시 함께 자취하던 룸메이트가 있었는데 여자친구 몰래 바람을 피다 걸려 관계를 정리하는 현장을 자취방에서 직접 보게 됩니다.

그 사연을 가사로 쓰며 노래로 만들었는데 그게 ‘바람 바람 바람’이었다고 하는데요.

그렇게 친구의 이별을 직접 목격하고 쓴 ‘바람 바람 바람’으로 데뷔한 김범룡은 데뷔와 동시에 공전의 히트를 쳤죠.

그의 전성기 시절에 집 앞 공원에 팬들이 전부 텐트를 치고 그를 기다렸으며, 그의 콘서트 티켓을 사기 위해 줄을 섰던 팬들 때문에 인근 도로가 마비될 정도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김범룡은 가장 싫어하는 노래가 바로 ‘바람 바람 바람’이였다고 하는데요.

당시 20대 때 너무 많이 불러 내가 왜 그 노래만 불러야하는지 불만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발표한 1집 앨범부터 연이은 히트 행진으로 활발하게 활동했고 90년대에 들어서는 제작자로서도 활약하게 됩니다.

특히 그는 90년대 최고의 남성 듀오 녹색지대 1집 전체를 작곡, 제작에 참여했고 그가 ‘녹색 지대’와 ‘진시몬’을 제작하여 성공 가도를 달렸죠.

당시 hot의 문희준 역시 그에게 와서 오디션을 보러 올 정도였다고 하는데요.

그렇게 김범룡은 가수뿐만 아니라 제작자로서의 성공까지 하며 모든 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며 탄탄대로의 길을 가는 듯했지만 그가 음악 외에 다른 일에 욕심을 내기 시작하며 그의 인생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순식간에 바람처럼 늘어난 빚

그는 낯선 분야인 건설 시행사업에 뛰어들었다가 순식간에 빚을 지게 되었는데요.

한 번 진 빚은 빠르게 불고 불어 결국 40억 원의 빚을 지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방송 ‘인생 다큐 마이웨이’에서 절친 유현상이 김범룡에게 어떻게 그런 빚을 지게되었는지 묻자 그는

“한 사람을 만나서 도와준다는 게 결국 내 코가 깨지고 말았다” 

“돈을 빌려주다가 빚을 안게 된 케이스며 빌려준 것 받을 것까지 안게 되었다” 

“보니까 모두 내 책임이 되었고 내가 벌었던 거 외에 나머지도 갚아야 되더라”라며 그때부터 사업 실패로 채무와 압류에 시달리게 됩니다.

가수로도 제작자로도 성공했던 그는 한순간에 모든 게 무너지며 집, 적금은 물론 그가 쓴 수많은 노래들의 저작권료까지 모두 압류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빚을 다 갚지 못해, 당시 그에게 채권자로부터 자꾸 전화가 오며 계속 압박이 와서 전화번호를 세 번이나 바꿨다는데요.

녹화 도중에도 빚 독촉 전화는 계속 왔고 이로 인해 방송에 전혀 집중할 수 없었던 그는 더 이상 방송국의 스케줄은 소화 불가능했고 12년간 방송은 엄두도 못 내게 되었죠.

이때 그가 모든 섭외 전화에 ‘죄송합니다’라고 거절하자, 한 때 방송국에서는 ‘김범룡이 배가 불렀다, 건방지다’ 등의 소문까지 돌 정도였다고 했습니다.

목소리도 안 나오는데 밤무대에..

방송은 못하더라도 빚을 갚아야 했기에, 닥치는 대로 돈을 벌어야 했고 시골 무대 사과 궤짝 위에서라도 노래하라면 노래를 했다고 합니다.

채무를 갚기 위해 하루 5개 이상 밤 무대에 서야했고, 당시의 엄청난 스트레스로 노래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목소리까지 잃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병원을 가봐도, 침도 맞고, 약도 지어도 목소리는 전혀 나오지 않았는데요.

이때 그의 아내가 “여보 괜찮아 할 수 있어 내가 있잖아”라며 그를 믿고 기다려 주었습니다.

한때 김범룡이 채권자들의 빚 독촉 전화, 나오지 않는 목소리에 극단적 생각까지 할 때 아내가  “당신이 잘못되면 나도 잘못될 거니까 절대 나쁜 생각하지 말라”고 하며 그를 붙잡아주었다고 했습니다.

결국 그는 목소리를 회복한 후, 믿고 기다려준 아내와 가족들을 위해 12년 만에 그는 그 빚을 모두 갚게됬습니다.

빚 갚는 동안 곡을 전혀 못 쓴 게 가장 힘들고 괴로웠다고 합니다.


빚을 갚자마자 가장 먼저 작업실로 달려가 기타를 잡았으며 아내가 세상에서 가장 고마운 사람이라며 ‘아내’라는 노래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훗날 김범룡이 이때 자신이 쓰러지지 않고 시련을 극복하게 된 힘에 대해 말하길

“사랑인 것 같다”

“특히 아내의 힘이 있었고 또 선배 친구 후배들이 주변을 늘 떠나지 않았고 날 항상 끌어내줬다”

또한 그는 아내에 대해서도 말하길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친구, 나에게 약점까지도 다 지적해주는 친구, 욕 먹어도 그냥 할 말 없는 정말 고마운 친구”라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