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웃는 얼굴이라 몰랐어..”아침마당 김재원 아나운서가 돌연 외국으로 잠적한 속사정, 그의 굴곡진 인생

김재원 아나운서는 따뜻한 마음으로 듣기를 누구보다 잘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현재 그는 아침마당이라는 프로를 통해 우리는 사는 얘기에 귀 기울이고 공감하고 때로는 위로가 돼 주기도 합니다.

그런 그가 과거 반신불수 아버지를 6년간 간호하다 돌아가신 다음 날에도 노래 자랑을 진행한 적도 있고,

돌연 가족들과 캐나다로 떠난 뒤 아침마당을 마지막으로 하던 날 “아나운서라는 직업이 내 삶이 정제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구나” 라고 고백했죠. 

오늘은 김재원의 파란만장한 인생에 대해 말해보고자 합니다. 

아나운서로 데뷔하기까지..

1967년 외동아들로 태어난 김재원은 중학교 1학년 시절 어머니가 간암으로 갑자기 돌아가시게 됩니다.

당시 어린 김재원은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많이 당황하고 방황하게 됩니다.

아버지와 단둘이 살게 된 그는 아버지가 말씀이 많은 편이 아니라서 당시 대화를 거의 나누지 못하고 항상 아버지의 표정과 몸짓을 보고 마음을 읽어야 했다고 하는데요.

훗날 그는 그 당시를 뼈저리게 후회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그의 아버지는 당시 궂은 집안일도 혼자 도맡아 하시며 아들 김재원을 정말 헌신적으로 키웠는데요.

그가 18살이 되던 해에는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가 나 아주 작은 집으로 이사를 가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아버지의 헌신은 멈추지 않았고 이후 그를 미국 유학까지 보내게 됩니다.

한편 이 무렵 그는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인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되는데요

사실 그의 아내는 초등학교 6학년 때 만난 짝꿍으로 당시 책상에 금을 그어놓고 아웅다웅하던 친구였습니다. 

그러다 성인이 된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게 소개팅을 해주겠다고 나설 정도로 말 그대로 친한 친구였는데 어느 날 김재원은  “네가 제일 낫더라” 라고 고백한 뒤 두 사람은 본격적인 연애를 시작하게 됩니다. 


그는 당시 아내와 1년간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사랑을 나누다가 이후 아내의 방학에 맞춰서 마침내 결혼까지 하며 두 사람은 신혼생활을 미국에서 시작하게 됩니다. 

6년의 간병

그렇게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던 1994년 어느 날 하루는 새벽 2시쯤 한국에서 전화오게 되는데요.

전화를 받아보니 그의 아버지가 힘없는 목소리로 “재원아 내가 아프다 네가 한국 들어와서 아버지 장례 치르고 가야겠다” 라고 하시고 아무 말씀도 없이 전화가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알고 보니 아버지는 당시 뇌경색으로 쓰러졌던 것이였는데요.

그래서 다시 전화를 걸어봤지만 계속 통화 중 신호만 가자 사촌과 친구들에게 급히 전화를 걸어 집에 가봐달라는 부탁을 하며 그는 그 길로 공항으로 향하게 됩니다. 

신혼 2달만에 두 사람은 급히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고,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비행기에서의 10시간이 10년보다 더 길게 느껴졌다고 했습니다. 

천만다행으로 아버지는 의식은 되찾았지만 신체의 반쪽이 마비가 돼 거동이 불편해지면서 결국 유학 생활을 완전히 접고 이 날부로 아버지의 보호자가 되어야만 했습니다. 

이후부터는 밤낮으로 아버지를 간호하는 병원 생활이 이어지게 되는데요

당시 그가 아버지의 기저귀를 갈아드리고 밥을 떠먹여 드리고 또한 걸음마도 가르치며 마치 갓난아기 때 아버지가 그에게 해주었던 일들을 되감는 일들을 하게 됩니다. 

밤낮으로 아버지를 간호하던 중 하루는 병원에서 TV를 보고 있는데 손범수 아나운서가 헬리콥터에서 내리더니 손을 쫙 뻗으며 “kbs 21기 신입사원을 모집합니다” 라고 외치자 그는 아나운서를 한번 해볼까 생각을 하게됩니다.  

사실 그가 아나운서의 꿈을 가졌던 건 초등학교 때부터였는데 하지만 자신의 꿈이 과하다고 판단해 잠시 아나운서라는 꿈을 내려놓았는데요. 

이때부터 본격적인 입사 공부가 시작되게 됩니다. 

당시 그는 낮에는 아버지를 간호하고 아버지가 주무시면 철야 공부를 시작했는데 이때 장인어른이 일간지를 오려서 그에게 시사 상식을 퍼나르고 또한 병실 보호자들은 채널 선택권을 그에게 모두 양보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의사, 간호사, 보호자 심지어 환자들의 염원까지 담아 목숨 걸고 공부했더니 단 두 달 만에 kbs 아나운서 시험을 합격하게 됩니다. 

이처럼 그는 28살의 늦은 나이로 방송사에 입사했고 또한 그런 아들을 아버지는 무척이나 자랑스러워 했었는데

“당시 방송이 끝나고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라는 그의 엔딩 멘트는 시청자를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아들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을 챙겨보는 아버지를 향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는 아들이 나오는 tv를 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고 그리고 이때 그는 방송이 끝나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아버지에게로 달려가 살가운 아들이 되곤 했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그가 지방 발령을 받은 후에도 계속됐는데 사실 말이 쉽지 당시 서울과 춘천을 오가며 직장생활과 병간호를 병행한다는 게 보통 의지로 되는 일은 아니었죠.

그렇게 무려 6년간을 아버지를 간호했는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때를 그가 고백하길

“신입사원 연수 받는 3달 동안도 병원 간호사 방에서 양복으로 갈아입고 출근을 했다”

“오후에 퇴근하면 2시간 청량리행 기차를 타고 왔다가 막차 타고 다시 가서 몇 시간 쪽잠 자고 새벽에 출근했다”

“이 생활을 1년간 반복했다”

“아버지가 숨을 거두실 때는 내가 평일 아침마당을 대타로 진행하고 있었는데, 방송 끝나니까 아버지 돌아가셨다는 전화가 오더라”

“한 때는 아버지의 병간호가 길어지다 보니 ‘긴 병에 효자 없나보다’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잠시나마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너무 죄송스럽다” 

 
“내가 6년간 아버지를 간호하면서 어린 시절에 나누지 못했던 대화를 이때 정말 많이 나눴다.

“하지만 그렇게 떠나실 줄 알았다면 더 일찍 아버지와 얘기하고 마음을 표현할 거라는 후회를 지금까지도 한다”

갑작스러운 아침마당 하차, 그리고..

이후 아나운서로 활발히 활동하던 그는 2005년 회사에 무급 휴가를 내고 가족들과 돌연 캐나다로 떠나게 됩니다.

이 때를 그가 고백하길

“내가 10년간 방송을 하고 나니 이대로 가다가는 매너리즘에 빠지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스스로를 재충전해서 인생의 후반전을 준비하자는 생각에 가족들과 함께 캐나다로 떠났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아들하고 아내를 다 데리고 과감하게 정리하고 떠났다”

“퇴직금과 내가 일식집과 샌드위치 가게에서 설거지와 배달을 해서 버는 돈으로 생활비를 충당했다”

 
“그렇게 캐나다에서 일상에서 벗어난 순간 행복을 느꼈다” 

그렇게 그는 원래 1년을 생각했다가 3년을 채우고 한국으로 돌아왔는데요.

돌아와서는 박사 논문을 쓰면서 아침마당을 진행하고 또한 대학 강의도 나가면서 가장 밀도 있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김재원 그는 자신의 일에 대해

“한 번은 내가 사랑의 리퀘스트를 진행한 적이 있는데 그때 나를 캐스팅하신 감독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

“적어도 사랑의 리퀘스트를 하는 동안만큼은 유흥을 하지 마시고 꼬투리 잡힐 만한 일은 안 하시면 좋겠습니다” 

“이 일은 단순한 방송이 아닙니다. 일종의 구제 사역이고 성직자들이 하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라고 하더라 ” 

“이때 느낀 게 아 아나운서라는 직업은 내 삶이 정제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구나라는 걸 깨달았다”

“흔히 아나운서라고 하면 말을 조리 있게 하고 상대방을 잘 설득할 거라 생각하지만 사실 대화란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모두 필요하다”

“나는 소통 강의를 할 때면 소 그림과 통 그림을 사람들한테 보여준다 그러면 일단 웃는다 소통이라는 게 이렇게 터무니 없는 거다” 

“소와 통이 무슨 연관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저 통이 소에게 여물통이 되어 줄 때 그 둘은 뗄 수 없는 관계가 된다” 

“이처럼 소한테 여물통이 되어야 소의 마음을 살 수 있는 거다”

“이렇게 나와 다른 사람과의 연관 고리를 찾아나가는 것 그게 소통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라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