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회장 아내 변중석 여사의 삶, 그녀가 현대家의 정신적 지주인 이유?

변중석 여사의 고향은 강원도 통천군입니다. 

농사를 짓는 아버지 밑에서 맏딸로 태어난 변 여사는 여자라는 이유로 보통 학교에 들어가지 못하고 서당과 교회 야학을 다녔습니다. 

정 회장과 변여사를 이어준 건 정 회장의 넷째 숙부였습니다.

성품이 고운 그녀를 어릴 때부터 눈여겨보았다가, 정주영이 결혼 적령기에 이르자 맞선을 주선했죠. 

그러나 변 여사 집안 쪽에서 반대가 있었는데 남자 쪽 집안이 너무 가난했고 시동생도 너무 많아 딸 고생이 눈에 훤했기 때문이죠. 

당시 청년 정주영은 서울 쌀가게에서 배달일을 하는 점원에 불과했습니다.

친정 어머니가 딸을 결혼시키기로 마음 먹은 것은 몇 년 사이 큰 오빠가 정주영 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예비 신랑이 믿을 만한 사람이라 어머니를 설득했었죠. 

그렇게 21살 정주영 회장, 15살 변중석 여사는 얼굴 한 번 제대로 보지 못하고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결혼 직후 정 회장은 “신부에게 3개월만 기다리고 있어라 곧 서울로 데려가겠다”는 말을 남긴 채 서울로 떠났습니다. 

3개월 뒤 남편을 따라간 곳은 낙산이라는 산동네 꼭대기 허름한 판잣집이 거처였습니다. 

변 여사는 당시에 대해 “시골에서는 아무리 못 살아도 작은 초가집에서라도 살았는데 어찌나 서글프던지..”라고 회고했죠. 

정주영 회장은 “서울에선 다들 이렇게 산다. 얼마 동안만 참자”고 달랬다고 합니다.

그러나 남편의 사업은 굴곡이 많았습니다. 

쌀가게가 자리를 잡을 만 하니 일제가 자율판매를 전면 금지하고 배급제를 시행했죠. 

이후 자동차 수리 공장을 차렸는데 직원의 실수로 불이 나면서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정 회장은 굴하지 않고 평소 신용이 두터웠던 고리대금업자로부터 돈을 빌려 재기에 성공했죠. 

변 여사는 서울로 올라온 뒤로 친정 식구들을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친정이 강원도 통천에서 함경북도 청진으로 이사를 갔는데 이후 분단이 되면서 소식이 끊긴 것이죠. 

정 회장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해방 전인 일제 때라도 아내를 친정에 보내주지 그랬냐”라는 질문에 

“내가 못 가게 했어요”

“돈 벌어서 가자고 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너무 미안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청운동 자택의 일과

평소 정주영 회장은 청운동 자택을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했습니다. 

현대그룹을 이끄는 중에 잠시나마 여유를 주는 집에 대한 애정이 컸죠.

이 자택은 재벌이라는 명성을 무색하게 하는 집으로 정 회장의 검소한 삶을 엿볼 수 있죠.

청운동 자택의 하루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오전 5시 정 회장의 방에 불이 켜지며 하루가 시작되고 오전 6시부터 해외 지사에서 보고 전화가 걸려옵니다. 

그리고 6시 반 정 회장은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합니다. 

아무리 바빠도 아침을 함께 먹는다는 원칙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오전 7시 정 회장이 현관문을 나서는데요.

정 회장은 “나는 일찍 일어난다 그날 할 일이 즐거워서 기대와 흥분으로 마음이 설레기 때문”이라고 말했었죠. 

그리고 정 회장이 이와 같은 삶을 살 수 있었던 배경에는 변 여사의 몫이 컸습니다. 

그녀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 남편에게 아침 식사를 차려주었죠. 

정 회장은 순두부를 좋아했는데요.

변 여사는 옛 두부 맛을 내기 위해 강릉에서 바닷물을 떠와 그 물로 순두부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정 회장과 변 여사는 2층에서 같이 머물다가 변 여사의 방이 1층으로 내려왔는데 재미있는 사연이 있습니다. 

변 여사는 아들 몽준의 결혼 패물을 보관하고 잠을 자고 있었는데 집으로 도둑이 들었습니다.

변 여사가 인기척에 잠에서 깨자 도둑은 휘발유를 뿌리면서 “소리 지르면 죽이겠다”며 협박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뉘 집인지 알고 들어온 모양인데 소리 안 지를 터이니 타협적으로 하자”며 도둑을 달랬었죠. 

그러나 도둑은 패물과 200만 원을 쥐고도 성에 차지 않은 듯 돈을 더 요구했으나 더 이상 없다며 맞섰습니다.

그러자 도둑이 “무슨 현대건설 회장 집이 이 따위냐”라며 그냥 갔다고 하죠. 

이튿날 변 여사가 정 회장에게 “회장님 나 죽을 뻔했어 도둑놈이 날 꽁꽁 묶어놓고 몽준이 패물 다 갖고 갔어요” 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정 회장은 아내의 걱정은 고사하고 

“왜 도둑놈을 내 방으로 안 데려왔느냐”

“내가 돈을 줘서 타일러 보냈을 것인데”라며 호통을 쳤다고 하죠. 

변 여사는 혹여 도둑이 남편에게 해코지 할까 봐 죽을 각오로 덤볐는데 그 마음도 몰라주고 타박을 받아 많이 서운했습니다. 

이후 2층은 꼴도 보기 싫어 아래층에서 잠을 자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현명한 내조

변 여사 또한 자신의 재봉틀에 대해 이렇게 말했었죠. 

“6.25 전의 것이라 구식입니다. 그래도 웬만한 옷은 이 재봉틀로 만들어 입을 수 있어요”

“취미라고는 재봉틀질 밖에는 없어요. 명절 때 손자들 옷을 만들어 입히는 게 큰 즐거움이죠” 

“이 재봉틀이 우리 집안 가보이고 저 사진첩은 내 밑천이죠”

변 여사가 얼마나 소박한 사람인지는 많은 일화로도 확인할 수 있죠. 

그녀가 단골로 다녔던 용산 청과물 시장에서는 이런 말도 돌았습니다.

“인심 좋게 보이는 어떤 할머니가 택시를 타고 와서 과일과 채소를 대량으로 산다”

“이후 용달차에 싣고 운전사 옆자리에 타고 사라지면 그 할머니가 바로 현대그룹 회장 부인이다” 

실제 변 여사는 “내 앞으로도 차가 한 대 있지에 시장 보고 용달차 타고 돌아오는 게 가장 편하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집에서는 언제나 몸빼바지 차림이어서 집에 찾아온 손님들이 일하는 아주머니로 착각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렇다고 그녀가 인색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끼니 걱정을 하던 시절에도 거지를 그냥 돌려보내는 법이 없었고 매년 고아원을 방문했습니다.

또한 그녀는 현대그룹 직원들의 식사를 책임진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공장 직원들의 밤참을 해다 먹였으며 그룹의 규모가 커졌을 때는 직원 식당의 주방장을 자처하며 구내식당을 책임졌었죠. 

이뿐 아니라 매년 메주를 나눠주기도 했습니다. 

나중에는 아예 메주 공장을 세워 40년간 운영하기도 했죠. 

현대家의 정신적 지주

한편 맏아들 정몽필은 현대그룹의 유력한 후계자였으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990년에는 4남인 정몽우 씨의 자살, 정몽필의 아내 이양자 씨마저 지병으로 사망했는데요.

그녀는 더 이상 버틸 힘을 잃었는지 이듬해 병원에 입원해 임종할 때까지 16년 동안 단 한 차례도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여기에 정몽헌 회장마저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지만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변 여사는 세 명의 자식을 먼저 보낸 불행한 어머니였습니다. 

그녀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 부부에게 가장 큰 슬픔은 아들을 먼저 보내야 했던 일이다”

“그 때마다 남편은 한동안 말이 없다가 ‘인과응보야 결국 돈은 인간의 목적도 행복도 아니야’ “라고 말하며 침통했습니다.

이후 인터뷰는 그녀의 울음이 그치지 않아 중단되었습니다.  

그리고 변중석 여사는 2007년 향년 86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습니다.

변중석 여사가 현대가의 정신적 지주였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실제 정 회장은 아내를 존경한다고 자주 말했었죠. 

“아내는 패물 하나 가진 적 없고 화장 한 번 한 적이 없다”

“그저 알뜰하게 간수하는 것은 재봉틀 한 대와 장통대의 항아리들 뿐이다” 

“어려웠던 고생을 하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집안을 꾸려준 내자가 그렇게 고마울 수 없다”

그녀가 남편에 대해 썼던 글을 읽으면서 이야기 마치겠습니다. 

“자동차를 처음 만들었을 때 참 대견스러웠다”

“다른 사람들 생각으로는 과연 될까 하는 일을 많이도 이루었다”

“예전 보트를 타다가 그 분의 서툰 노질로 강물에 빠져 죽을 뻔했다”

“그런 사람이 엄청난 조선소를 지었다니 마음 먹은 것은 꼭 달성하라는 의지와 밀어붙이는 힘이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남들이 성공했다고 말하는 남편을 옆에서 보면 비결은 간단하다”

“부지런함과 검소함이다”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