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취급 못 받아..” 70년대 가수왕 조경수 가족들에게 쫓겨난 충격 근황, 그를 용서하지않는 아들 조승우

가수 조경수는 지금은 영화 배우 조승우의 아버지라는 수식어가 더 적절하겠지만 사실 그는 70년대 후반 시대를 주름 잡았던 최고의 스타였습니다. 


1976년 ‘아니야’라는 노래로 데뷔한 후 당시 코흘리게 아이들까지 흥얼거렸던 징기스칸, YMCA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남겼죠

심지어 그가 한창 잘 나가던 때는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가요 프로그램에서 맞붙어 조용필을 꺾고 그가 1위를 할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정상의 인기를 누렸던 그였지만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을 버리고 한국에 3살 아들과 6살의 딸을 남겨둔 채 돌연 미국으로 떠나게 됩니다.

이후 19년간 미국에서 지내며 새 살림까지 차렸는데, 두 번째 아내마저 버리고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그러나 또다시 두 번째 아내에게 돌아가야했던 최고의 스타 조승우의 아버지인 왕년의 스타 조경수

그의 부끄럽고 엇나간 인생에 대해 말해보고자 합니다. 

가수왕 조경수

그룹으로 활동하다가 1976년에 솔로로 데뷔한 조경수는 1979년 당시 KBS와 TBC의 남자 최고 가수상을 동시에 수상할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습니다.

그리고 그 해 마지막 행사인 mbc 가수왕상에서도 그가 수상자로 확정됐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그때부터 그의 인생이 삐덕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시상식 하루 전날인 10월 26일 대통령 시해 사건이 터지면서 시상식이 12월로 연기되더니 수상자가 다른 가수로 갑작스레 바뀌었다고 했습니다. 

당시 방송 3사 가수상을 모두 수상하면 새해 첫날인 1월 1일 세종문화회관에서 리사이틀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데요

그 꿈이 갑작스럽게 무산이 되자 그는 노래 부를 의욕을 잃었습니다.

결국 가수라는 직업에 불안감을 느끼며 홧김에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 음반 사업에 뛰어들었는데 그것이 끝내 화근이 되고 말았습니다. 

가수를 못한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생각에 다른 가수의 판을 제작하는 기획사 사무실을 차렸지만 생각처럼 잘 안 됐고 그렇게 사업 실패 후 조경수의 인생은 180도 달라졌습니다.

미국으로의 이민 생활

그가 고백하길

“당시 빚이 1억 8600이었는데 강남 아파트가 당시 2300만 원 정도였으니 지금으로 따지면 아마 100억 원은 될 것 같다” 

“돈을 못 갚으니까 채권자들에게 내가 타고 다니는 차도 뺏기고 신중현 씨와 차린 대한민국에서 제일 좋은 녹음 스튜디오도 뺏겼다 “

“그런데도 돈을 다 못 갚으니까 자꾸 와서 나를 괴롭혔다”


“근데 마침 미국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거기가 마지막 탈출구라 생각하고 채권자들이 너무 귀찮게 하니까 도피 아닌 도피를 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채권자들의 등살을 견디다 못한 그는 잠깐 피한다는 생각으로 82년 미국 하와이로 건너가게 됩니다.

본인의 주장으로는 당시 아내와 위장 이혼을 하고 자신이 미국에 먼저 가서 영주권을 딴 후에 다시 식구들을 다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살아야겠다는 어찌 보면 아메리칸 드림이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영주권을 따는 것이 하루아침에 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처 자식을 한국에 둔 채 본격적인 미국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미국에서도 노래를 했지만, 한국 가수가 노래 부를 곳은 정해져 있었고 같은 얼굴이 계속 나오면 식상하다 보니 한 1년을 하고 나니 더 이상 설 무대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결국 먹고 살기 위해 다른 일을 해야 했으며 그는 구두 가게도 하고 세탁소도 해보았지만, 경험 없이 뛰어든 터라 손해만 본 채 접어야만 했습니다.

게다가 홀로 미국 이민을 떠난 지 2년 정도 지나자 부부 사이가 서먹서먹해지기 시작했으며 위장으로 했던 이혼이 자연스럽게 이혼이 되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혼자가 된 그는 1985년 나이트 클럽을 운영하면서 조금씩 돈을 모으기 시작했고 그때 미국에서 홀로 생활하던 그에게 새로운 사랑이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mbc 6기 공채 탤런트 출신 배우 조혜석이었고 약 3년의 짧은 방송 활동을 뒤로 한 채 브라운관을 떠났던 그녀는 조경수와 미국에서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새 장가를 든 조경수는 모든 것을 잊고 새롭게 시작했으며 당시 가지고 있던 나이트클럽도 다른 사람에게 넘긴 후 40이 넘은 나이에 직접 학원을 다니며 일식을 배워 일식집을 차리게 됩니다.

돈만 갖고 시작한 가게가 아니라 조리사 자격증을 따고 밑바닥부터 배운 후 가게를 차렸기에 그의 일식집은 크게 성공을 거두었고 10년을 넘게 아내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렇게 아내와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던 어느 날 조경수는 우연히 신문을 보다가 자신이 아버지라는 사실을 떠올리게 되는데요. 

“우리 딸 조소현이 연극영화과에 수석으로 들어갔다는 기사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때 이게 아니구나..애들하고 합쳐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아내에게 미안하지만 나 애들하고 다시 합쳐야겠다고 하자 놀랍게도 지금의 아내가 흔쾌히 승락했다”

이때 당시 그의 아내가 말하길 

“어느 날 자고 일어났는데 남편이 없었다”

“그래서 화장실 갔나 하고 기다렸는데 안 오기에 보니까 소파에서 소리 안 나게 울고 있었다”


“자식들 문제 때문에 속에 있는 말을 함부로 못하고 혼자 우는데 굉장히 마음이 안 좋았다”

“남편이 심각하게 고민하면서 한국에 너무 가고 싶어 하니까 결국 그냥 내가 양보하겠다고 하고 보낼 수밖에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미국에서의 살림을 모두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원래 가족과 재결합하기 위해 조승우의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자식을 향한 들뜬 마음은 현실의 벽 앞에서 부딪히고 마는데요

그가 말하길 

“미국에서 짐을 싸서 애들이 있는 집으로 들어갔는데 딱 일주일 만에 나왔다”

“사실 그 집에 들어갈 때 내 모든 자존심을 다 내려놓고 들어가야 했는데 내가 남자이기 때문에 그렇지 못했다”

“딸이 집에 늦게 들어오면 나는 아버지니까 야단을 쳤는데, 그게 애들 입장에선 굉장히 싫은 거였다”


“왜 이제 와서 간섭하고 아빠 노릇을 한다고 했을 거고 그 얘기를 엄마한테 다 이를 것 아닌가?”

“그러면 엄마가 또 뭐라고 그럴 거고, 결국 3대 1이 되는 거고 나는 외톨이가 되었다. 


“일주일 지내보니, 이게 합쳐지지 않는구나라는 것을 깨닫고 내가 짐을 싸서 다시 나왔다”고 했습니다. 


결국 미국으로 다시 돌아온 그는 또 다시 두 번째 아내에게

“여보 내가 잘못했다”며 사정사정했고 다행히 그의 아내는 그를 받아 주었습니다.

그렇게 두 번째 아내에게 충실하며 미국 생활을 하던 그는 20여 년 만에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아내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는데요

그에게 다시 한번 시련이 찾아오게 됩니다

외로운 투병 생활

그는 불청객 대장암 진단을 받게 되는데요.


48시간씩 항암 주사 맞기를 12번이나 반복하며 힘겹게 견뎌냈고 특히 마지막 12번째 맞을 때는 너무너무 힘들어서 그의 딸에게 전화를 했지만 끝내 아이들 얼굴을 볼 수는 없었습니다. 

지금도 자식과의 재회를 기다리는 조경수

그가 말하길  “얼마 전 우리 딸이 결혼한다고 한번 찾아왔다”

“상황이 아버지가 손을 못 잡고 들어가니까 외삼촌이 잡고 들어가겠다고 해서 내가 그렇게 하라고 했다”

 
“인생을 살면서 그래도 딸이 시집 갈 때 내가 손을 잡고 들어갔어야 했는데 못 잡고 들어간 게 너무 안타까웠다”


“솔직히 승우도 몇 년 있다가 장가를 갈 건데 나는 참석을 할 수가 없다”


“이제 나타나서 내가 아버지다라며 결혼식장 가는 것도 이상하고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가 가족이라는 질문에 대답하길 

“가족이란 함께한 시간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

“부모와 자식 간에 같이 어울리고 같이 밥 먹고 같이 자고 같이 어울려야 가족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말만 부모지 그런 게 한 번도 없었다”


“아버지의 빈자리가 익숙한 아이들에게 이제 와 그 자리를 채우겠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게 지금 내가 자식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이라고 했습니다.

여기까지 읽어주셔 대단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