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국민 여동생 이재은, 월 2천을 벌며 택시 기사에게 병원비를 ‘구걸’해야했던 이유, 재혼 후 어쩌다 이렇게..

아역 배우들의 활동이 두드러지는 요즘, 그들의 활약을 보고 있으면 어린 나이에 어떻게 저리 잘할까 감탄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너무 이른 나이에 성공을 거두다 보니 성공이 얼마나 값진지 모르고, 패가망신하는 배우가 있기도 합니다.


오늘의 주인공 이재은 역시 아주 어린 나이에 데뷔해 원조 국민 여동생이라 불리며 일찍이 승승장구했습니다.


하지만, 일찍이 복이 들어온 만큼 불행도 빨리 찾아오며, 사람들이 부러워하던 성공은 오히려 독이 되어 돌아와 쉽게 치유될 수 없는 아픔으로 남고 말았습니다.

오늘은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할 만큼 힘들었던 그녀의 가슴 아픈 인생에 대해 말해보고자 합니다.


1980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난 이재은은 5살이 되던 해에 우연히 광고회사에 사진을 보냈다가 3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아역 모델이 되었습니다.

이 후부터는 안 찍은 아동복이 없을 정도로 많은 활동을 하게 됩니다.


한편 당시 그녀의 아버지는 원래 신문 기자였는데, 어린 딸이 모델 일로 돈을 벌어 오자 그때부터 가장의 역할을 5살 딸에게 넘겨주게 됩니다.


훗날 그녀가 이와 관련해 고백하길

“아빠가 결핵을 앓고 계셨다”


“결혼 이후 그런 몸으로 회사를 다니던 아빠가 불쌍했는지 엄마가 아빠의 병을 알고 회사를 그만두라고 했다”

“엄마의 권유로 신문사를 관두자 아빠는 경력이 단절되어 백수가 되었고 내가 아버지를 대신해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라고 했습니다.


5살의 나이로 데뷔한 그녀는 이후 수많은 광고와 아역 배우까지 하며 9살의 나이로 한 달에 2천만 원의 돈을 벌며 세금까지 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때부터 어린 이재은은 더 이상은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그녀는 길을 걷다 보면 10분마다 사람들이 “네가 걔구나” 하면서 만지고 귀엽다고 볼을 꼬집었습니다.

게다가 어린 시절부터 학교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다 보니 학교에만 가면 너무 힘든 시간들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를 가장 힘들게 했던 사람은 따로 있었는데 바로 아버지였습니다.

앞서 얘기한 대로 그녀의 아버지는 딸에게 가장의 역할을 넘겨주고 본인은 여기저기 사업을 벌였으나 손 대는 사업마다 모두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딸이 계속해서 돈을 벌어 오니 남에게 속고 사기를 당하면서도 사업을 계속 벌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그녀는 아버지의 연이은 사업 실패로 한 번도 넉넉하게 살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한 번 그녀가 집에서 머리를 말리다가 거울이 얼굴에 떨어져 크게 다쳤고 엄마와 함께 택시를 타고 외과에 갔습니다.


하지만 이때 그녀가 온 국민이 아는 배우인데도 불구하고 병원비조차 없어, 당시 택시 아저씨가 대신 치료비를 주시고 며칠 뒤 치료비를 갚기도 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능력만 없는 게 아니라 행여나 가족들이 무시할까 싶어 자격지심이 생겨 허구한 날 밥상을 없고 아무런 죄가 없는 엄마는 죄인이 되어 빌어야 했습니다.


딸이 집안의 가장이다 그녀에게는 직접적으로 화를 못 내고 애꿎은 엄마에게 늘 손찌검까지 하며 못살게 굴었습니다.


그러다 그녀의 나이 21살 때는 아버지가 사업들을 벌리며 집안 형편이 어렵자 심지어 성인 영화까지 출연하며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합니다.


한때는 국민 여동생이라 불렸던 그녀가 성인 영화까지 출연하다 보니 당시 대중들은 그녀를 향해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말들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아버지가 또 사업을 하다 날려 먹고 이번에는 그녀가 빚을 갚기 위해 누드집까지 찍게 됩니다.

결국 그녀는 이 짓을 끝내고 집에서 나올 수 있는 방법으로는 결혼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도피성 결혼을 결심하게 됩니다.


9살 연상의 첫 번째 남편을 만나 결혼을 준비했고, 그녀의 아버지가 돈줄이 떨어지는 걸 염려해 딸의 결혼을 극구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은 가족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던 그녀는 도망치듯 결혼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오죽하면 아빠한테 “내가 돈 찍어내는 기계야 나는 왜 공장의 기계처럼 그러고 살아야 해?”라고 얘기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당시 결혼만 하면 이제 자신은 일을 안 하고 남편이 가져다 주는 월급을 똑바로 아끼며 사는 현모양처가 될 수 있을 줄 알았으나, 결국 아빠에서 남편으로 바뀌었을 뿐 결혼 후에도 그렇게 살지못했다고 했습니다.


이후 그녀의 아버지는 딸의 결혼에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뇌출혈로 쓰러지게 됩니다.

그 바람에 담도에서 암도 시작해 이후 간까지 전이가 되어 그녀가 결혼한 지 딱 1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훗날 그녀의 고백에 따르면 아버지로 인해 너무 힘들어 장례식장에 갔는데 눈물 한 방울 나지 않고, 메마른 감정만 들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홀로 남은 어머니가 노후 대책을 세워보겠다고 상주에 집도 짓고 이것저것 하려 했으나 아는 사람한테 사기를 당하고 결국 이번에도 시집 간 딸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됩니다.


이때 그녀는 서러운 마음에 결국 엄마와도 무려 7년간이나 연락을 끊게 됩니다.


당시 그녀는 결혼과 동시에 우울증, 대인기피증에 시달렸고, 공허함을 폭식늘 하며, 급격하게 살이 쪄 방송 중단은 물론 3년간이나 집 밖에 나가지 않게 됩니다.

이 때 tv를 틀면 본인과 같이 활동했던 동료들은 여전히 잘 나오는 모습을 보고,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싶어 하루에도 수십 번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다고 합니다.


하루는 너무 힘이 들어서 7년 만에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그러자 7년 만에 딸의 전화를 받은 엄마가 막 울면서 하는 말이

“재은아 왜 이제 전화했어” 였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7년 만에 엄마에게 했던 말이

“엄마 나 너무 힘들어서 숨이 안 쉬어져”

“나 되게 심각하게 물어보는 건데 지금 내가 다시 밖에 나가서 무언가를 하고 시작할 수 있을까?”

“예전 인기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관심 받고 살아갈 수 있을까?”라고 하자


당시 엄마가 그녀에게 하는 말이 “너 바보 아니냐 너 아직 젊고 예쁜데 왜 못해”라는 응원의 말을 건네게 됩니다.


그녀는 당시 엄마의 응원을 받으니 하늘에서 빛이 내려오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이후 그녀는 엄마든 아빠든 더 이상 이제는 책임지는 인생이 싫어서 새로운 가족을 만들고 거기에 집중하려 했으나 첫 번째 남편과도 결혼 11년 만에 결국 이혼하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남편과 결혼 생활 10년 동안 따로 잤고 밥도 거의 같이 안 먹었다”


“당시에는 어떻게든 빨리 집을 나가서 독립하고 싶었는데, 결혼 생활은 오점 투성이었다는 생각이 든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후 홀로 지내던 그녀는 2022년 1월 우연한 기회로 소개팅을 받았다가 지금의 두 번째 남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전라도 광주 사람이라 자주 보기가 힘들어 두 사람은 하루에 기본 3시간씩 전화를 했다고 합니다.

당시 두 사람은 전화로 진지한 이야기를 많이 하며 마음이 깊어져 결혼 결심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서로가 한 차례씩 이혼을 한 아픔과 상처가 있음에도 두 사람 모두 아이를 너무 원했죠.

두 사람은 결혼식은 생략하고 반지 프러포즈를 받으며 정식 부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결혼과 동시에 그녀가 제일 걱정했던 게 자신밖에 모르던 엄마가 이제는 홀로 남겨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엄마만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졌는데, 두 번째 남편이 신혼집 근처에 엄마가 살 아파트까지 몰래 구해놓자 당시 엄마와 그녀는 감동을 받고 펑펑 울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다 지난 11월 22일 마침내 두 사람 사이에서 그토록 바라던 딸 태리가 태어났고 당시 그녀는 자신의 sns를 통해

“이래서 내 새끼 낳으면 다들 팔불출이 되나보다 나 정말 미쳐버리겠네”

“테리 대학생이면 엄마는 환갑인 거냐 최대한 안 늙도록 열심히 가꿔야겠네”

“노산맘에 현타가 잠시..그래도 좋아”라고 심정을 밝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