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나가도 돼요?” 개그우먼 절친 이성미가 실제 토크쇼에서 실수로 말해버린 조용필의 진짜 모습

연예인들이 웃음을 목적으로 과장되게 성대 모사를 해서 은근히 피해를 많이 본 사람이 가요계의 제왕 조용필 씨라고 해요.


전문가에 따르면 그의 가창력은 최정상이라고 합니다.

이런 가창력은 순전히 피를 토하는 듯한 노력으로 완성되었어요.


그는 가수로서 어마어마하게 성공했는데 자신의 인생은 실패했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성민 씨가 실수로 폭로한 말에서 그의 진짜 모습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


조용필 씨는 1950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형들의 영향으로 일찍이 음악을 좋아했고 기타를 즐겨 쳤다고 해요.


그런데 과거에는 음악하는 것을 딴따라라고 하며 천시하던 때라 아버지가 극심하게 반대를 했어요.


급기야 아버지가 조용필 씨가 치는 기타를 때려 부숴버리자 아버지에게 겁을 주기 위해 어린 마음에 약까지 먹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음악하는 것을 허락해 주지 않자 그는 음악을 하기 위해 가출해 버리고 맙니다.


이 후 거지와 다름없는 생활을 하면서도 음악을 포기하지 않았어요.


이리저리 밤무대를 떠돌면서도 열심히 기타를 연마했습니다.


입소문이 나자 1968년 미 8군 무대에서 록 밴드의 기타리스트로 음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보컬을 맡았던 멤버가 군 입대를 하는 바람에 노래를 부르게 되었어요.



당시 그는 밥 먹는 시간마저 아끼면서 음악을 공부했어요.


건반을 치고 싶었으나 돈이 없어 도화지를 붙인 다음 건반을 그려가지고 코드를 짚어가며 소리가 없는 음악 공부를 했습니다.


또한 악보조차 구하기 어려운 시대라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악보를 손으로 일일이 따면서 음악 공부를 했습니다.


이런 공부가 나중에 히트곡 대부분을 직접 만들게 해주죠.


1971년에는 3인조 록 그룹 김트리오의 멤버로 활동하며, 한 콘테스트에서 가수왕 상까지 받았습니다.


그러나 가수의 길은 쉽지 않았습니다.

가수 생활


1972년 처음으로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불렀으나 별 반응이 없었어요.

그러다 1975년 새 음반을 취입하는데 그 음반에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다시 넣게되는데요


1976년 조총련계 재일교포의 모국 방문이 허용되며, 시대적인 분위기와 맞아떨어진 그 노래는 조용필 씨를 삽시간에 인기 정상으로 올려 놓았어요.


그런데 마른 하늘에 날벼락 인기 가수가 되자마자 1977년 하면서 1979년까지 활동이 금지되고 말았어요.


당시 금지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아 절망에 빠져 음악을 그만두려고 했으나 도저히 음악을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행히 조용필 씨는 이 시기를 슬기롭게 극복하지만 이때 받은 충격은 그의 인생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쳐 결국 사람을 잃게 만듭니다.


한편 조용필 씨는 생계를 위해 몰래 밤 무대를 전전할 수밖에 없었어요.


무대에서 노래도 못 부르게 하고 출국 금지도 시킬 정도로 아주 살벌했습니다.


그러다 금지가 풀렸고 해금이 되자마자 나온 노래가 1980년 조용필 씨가 작곡한 ‘창밖의 여자’ 입니다.


이 앨범은 우리나라 최초로 100만 장을 판매하며 서럽고 외롭던 무명 시절 10년 만에 완전히 정상 궤도에 오른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실린 그가 작곡한 ‘단발머리’ 또한 그 인기가 대단했죠.


1집부터 이미 대한민국 최고의 대스타가 되었고 꾸준히 음반을 발매하는데요.


또한 조용필 씨로 인해 오빠 부대가 만들어지며 우리나라 최초로 조직적인 팬 문화가 형성되었습니다.

내놓는 음반마다 성공을 거듭하며 70년대에 남진 씨, 나훈아 씨의 뒤를 이어 80년대는 조용필 씨의 시대가 되었어요.


지금까지 무려 190곡이 넘는 히트곡을 자랑하고 있죠

그렇게 잘 나가고 있었는데 그는 사람들이 기함할 결정을 내립니다.


80년대에 나왔다 하면 1등, 연말 대상이었는데 1987년 공식적으로 연말 시상식 수상을 거부하는 결단을 내린 것이죠

더 이상 순위에 집착하지 않고 더 고차원의 음악을 하겠다는 의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에도 그의 노래는 계속해서 큰 사랑을 받았어요.


급기야 92년부터는 방송 활동 중단을 선언하며 tv 출연을 극도로 자제합니다.

이후 콘서트로 본인의 주 무대를 옮겼어요.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 콘서트의 무대 환경은 열악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조명 몇 개 반짝반짝하고 폭죽 터뜨리는 것이 거의 전부였죠.


그걸 개선하기 위해 해외 일류 공연들을 전부 공부하며 분석했고 무대 총 감독까지 직접 하며 모든 열정을 쏟아부었습니다.


모든 좌석에서 골고루 들릴 수 있는 사운드

어떤 각도에서든 화려한 조명

무빙 스테이지 등에 돈을 쏟아부어 무대에 30억을 쓰기까지 했다고

또한 1979년부터 결성된 ‘위대한 탄생’이라는 조용필 씨의 백업 밴드는 각 분야 최고의 멤버와 최고의 악기로 구성되 젊은 층들도 사운드가 엄청나다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초기 몇 년은 TV에서 안 보이니 사람들의 관심이 적었고

그때만 해도 가수를 직접 보러 콘서트에 간다는 문화가 대중화되지 않았을 때였어요.

점점 입소문을 타고 주목을 받으면서 그 이후로 현재까지 만석 행진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 와중에도 꾸준히 앨범 작업을 했죠.


게다가 보통 가수들은 한 장르를 하는 데 비해 그는 팝, 록, 발라드, 트로트 등 거의 모든 장르를 했고 심지어 민요, 오페라까지 했는데요.

더 무서운 것은 대부분 다 성공했다는 것이죠.

이렇게 뮤지션으로서 이룰 수 있는 거의 대부분을 이뤘는데도 그는 자기 인생은 실패작이라고 말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조용필의 진짜 모습

그는 음악을 너무나 지나치게 사랑했습니다.


대마초 파동 때 음악을 할 수 없다는 절망감은 그에게 큰 상처와 충격을 주었습니다.


과거에는 연예인이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무시 받던 시절이라 연예인 하나 정도는 기사로 언제든지 보내버릴 수 있었죠.


음악이라는 세상에서는 거칠 것이 없었지만 실제 성격은 소심했던 그는 언론을 굉장히 두려워했습니다.


자기의 목숨과도 같은 음악을 못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많았어요.

그런 두려움이 결국 사랑하는 여자마저 잃게 만들었습니다.


톱스타가 된 그는 1981년 박지숙 씨와의 약혼 사실을 공개했는데요.


약혼 기간 중 배우 이미숙 씨와 염문설이 나요.


그는 결혼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갑자기 1984년 극비리에 절에서 기자 7명만 초대해서 깜짝 결혼식을 올렸어요.


이미숙 씨와의 스캔들 기사를 터뜨리려 한다는 제보를 받고 그 기사를 막으려고 급하게 결혼했다는 말이 있었어요.

훗날 조용필 씨는 그 당시에 대해 이런 말을 합니다.

“그때는 매스컴이 너무나 무서웠다”


그런데 결혼 후에도 조용필 씨는 언제나 음악이 최우선이었습니다.

그는 오로지 음악 활동 위주로 행동해 그녀를 외롭게 했고 그녀에게 “당신은 나보다 음악을 더 사랑하는 것 같다”는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결국 4년 만에 성격 차이를 이유로 합의 이혼했죠.


이혼 당시 조용필 씨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비겁하게 인기를 위해 사랑을 버렸고 음악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남겼다”

이렇게 그는 젊은 시절 두 여자에게 상처를 주고 말았습니다.


그는 세상도 잘 모르고 돈 개념도 없었지만 오로지 음악만큼은 욕심이 너무 많은 사람이었어요.


1992년 ‘밤으로 가는 쇼’ 방송에 조용필 씨는 주인공으로 출연했고 개그우먼 이성미 씨도 함께 나왔어요.

그때 그는 아직 재혼을 하지 않았죠.


그녀는 “조용필 씨가 외로움 때문에 술과 담배를 많이 하는 것 같다”고 하며 자신도 모르게 실수로 조용필 씨의 진짜 속마음을 폭로하고 말았습니다.


이성민은 “오빠 말해도 되요?”라며 주저주저하다가 이렇게 말했어요.

” 조용필 씨가 술만 마시면 취해서 ‘자신의 인생은 실패다’ ‘노래는 성공했지만 나는 마이너스가수나 다름이 없다’ 너는 애라도 있지 않냐?’ ” 하며 한탄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그 당시 조용필 씨는 자기에게 또 한 번 결혼할 기회가 생긴다면 아이를 가지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우연히 쇼핑하다가 아기 신발을 보고 너무 예뻐서 사다가 TV 장식장에 올려놓고 들여다본다는 얘기까지 했어요.


그렇게 아이를 원했던 그는 1994년 45살에 자기보다 1살 더 많은 안진현 씨와 결혼합니다.

더구나 그녀는 전 남편에게 아이까지 보낸 이혼녀였죠.


그러나 그녀는 너무나 조용필 씨를 위해 모든 것을 다 해주는 엄마 같은 여성이었어요.


안진현 씨는 그가 음악 작업을 할 경우 그의 근처에 접근조차 하지 않으며 그가 마음껏 작업에 몰두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고 해요.

음악하는 사람들의 스타일을 이해해 준 것이고 특히 음악에 완전히 미쳐 있는 조용필 씨에게 정말 좋은 배우자였던 것이죠.

이런 그녀가 결혼 10여 년 만에 갑자기 황망하게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조용필 씨는 식음을 전폐하고 통곡하고 통곡하다 쓰러지고 말았어요.


자식에 대한 간절한 바람마저 포기하고 선택한 사랑이었는데 그 심정이 어땠을까요?

2003년 안진현 씨가 세상을 떠나자 무려 10년간 신곡을 내지 않았어요.


그리고 마침내 내놓은 2013년 19집 앨범에서 내놓은 노래가 bounce였죠.


그의 나이 60대에 발매한 bounce는 나오자마자 젊은 아이돌 가수를 제치고 1등을 했고 당시 초등학생들도 따라 불렀을 정도로 인기가 있었어요.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조용필 씨는 지금도 현재 나오는 국내 아이돌 음악뿐만 아니라 전 세계 아티스트들의 음악을 항상 듣고 분석하기 때문입니다.

상처를 딛고 다시 음악의 세계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하는 음악의 장인이 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최근 근황으로는 또 정말 오랜만인 9년 만에 신곡을 선보였죠.


‘찰나’와 ‘세렝게티’처럼 두 곡 모두 김이나 작사가와 함께 작업했어요.

또 4년 만인 올해 11월 12월에 공연을 했고, 내년 말에 정규 앨범도 발매한다고 합니다..

그가 외로움을 음악으로 승화시킨다고 생각하니 왠지 짠하네요.

지금이라도 좋은 사람 만나면 안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