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모든 것이 무너졌어요” ‘국민 어머니’ 김혜자가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충격 유서까지 쓰게 된 이유

김혜자는 1941년에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19살 때 17살이었던 아버지에게 시집을 왔는데요.

어머니가 딸 둘을 낳은 뒤 아버지는 훌쩍 유학을 떠나 무려 17년 만에야 돌아오셨고 그 다음에 김혜자가 태어나게 됩니다.


그렇게 태어난 김혜자는 아버지가 미 군정 시절 재무부 장관에 해당되는 일을 해서 200평이나되는 사택에 살 수 있었습니다.

그 집에는 항상 손님들이 와서 파티를 했고 공원인 줄 알고 놀러 들어오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집이 커서 영화 촬영지로도 빌려줬었고 항상 서양 사람들이 모임에 와서 김혜자의 아버지를 부르는 등 음악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김혜자는 바쁜 어머니를 대신한 17살 터울의 언니 손에서 그렇게 또래 형제도 없이 외로이 자라게 됩니다.

이후 성인이 되어 1961년 kbs에서 뽑은 한국 최초의 tv 탤런트 공채 시험에 합격해서 데뷔하게 된 김혜자


하지만 그녀는 데뷔 직후 자신의 연기력에 실망해 배우를 그만두게 됩니다.

김혜자는 배우가 되고자 하는 열망만 크지 연기에 소질이 없다고 생각했는데요.


이후 결혼하여 임신을 하게 된 김혜자는 입덧이 너무 심해 힘들어했습니다.

남편이 담배를 피면 좀 나을 거라는 말에 담배를 조금씩 피웠는데, 나중에는 완전 골초의 경지에 올랐다고 합니다.


그렇게 김혜자는 흡연자가 되어 이후 34년이나 흡연자로 살게 되는데요.

한 가정의 어머니로 살던 그녀는 아들이 4~5살이 되자 놀다가도 중간에 젖 먹고 나가서 놀던 애가 어느 날부터 친구가 놀자면 미련 없이 나가는 걸 보며 갑자기 서운함과 고독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어릴 적 부터 지워버렸던 연기자의 꿈이 27세의 나이에 되살아나기 시작했는데요.


그러던 차에 우연히 연극을 하던 고등학교 선배와 마주친 김혜자는 “연극을 하면 연기의 기초를 배울 수 있다”는 선배의 말에 연극으로 다시 연기를 시작하게 됩니다.

이후 3년 동안 연극 밖에 모르고 살았던 김혜자

그녀는 연극계에서 당시 최고의 배우였던 백성희와 나옥주의 계보를 잇는 배우라는 평판까지 듣는 스타가 되게 되는데요.


이후 그녀는 1969년 방송을 개국한 mbc에 전격 스카우트 되며 본격적으로 방송 배우로 활동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후 김혜자는 다수의 작품에 출연하면서 mbc의 간판 스타이자 연기파 배우로 이름을 올렸고

연기 대상을 여덟 차례나 수상하는 대기록까지 세우게 되는데요.


특히 그녀는 1980년에 시작한 전원일기로 90년대까지 최불암과 함께 남녀 연기자 순위 1위를 기록하는 등 명실상부한 국민 배우로 굳건히 자리 잡게 됩니다.

하지만 그녀는 전원일기 출연 당시 PD에게 자신을 도중 하차시켜달라고 한 적이 있는데요.


40% 이상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국민 드라마로 자리 잡았던 전원 일기는 90년대 중반 무렵 점차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해,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원래는 택시 타면 택시 기사가

“전원일기 최고” 이랬었는데

90년대 이후에는

“그거 요새 무슨 요일 날 방송하나” 물을 정도로 변하게 된 것인데요.


그것이 너무 마음 아팠던 김혜자는 시간이 흐를수록 전원일기의 아버지, 어머니 캐릭터가 시청자들이 바라던 부모님 상과 멀어져감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PD에게 ‘막내 딸 만나러 가다 교통사고 나서 죽는 걸로 하차시켜달라’고까지 부탁하게 됩니다.


당시 김수미 역시 자신의 캐릭터가 일용 엄니로만 굳어져가는 현실을 피디에게 하차시켜달라고도 했다는데요.

하지만 제작진은 이런 출연자들에게 진심을 담아 계속 출연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결국 이들도 마음을 고쳐먹어 결국 2002년까지 무려 22년간 188회의 최장수 기록을 남기며 대단원의 마무리를 짓게 됩니다.

사실 이 드라마가 있었기에 김혜자는 국민 엄마의 칭호를 얻을 수 있었죠.


또한 제일제당 다시다의 cf 모델로 ‘그래 이 맛이야’라는 유행어를 남기며 20여 년이나 활약을 하게 되기도 했는데요.


또한 전원일기를 함께한 김수미는 한때 심각한 우울증의 남편이 사업 실패를 겪으면서 빚더미에까지 올라앉게 되었는데요.

그 사실을 안 김혜자가 김수미에게 정색을 하며

“넌 왜 나한테 돈 빌려달라는 소리 안하니”

“추접스럽게 몇 백씩 꾸지 말고 필요한 돈이 얼마나 되니?” 하며 김수미 앞에 통장을 꺼내놓게 되는데요.


김혜자는

“이거 내 전재산이야 나는 돈 쓸일 없어”

“다음 달에 아프리카 가려고 했는데 아프리카가 여기 있네”

“다 찾아서 해결하고 갚지 마”

“혹시 돈이 넘쳐나면 그때 주든가” 라고 말했고


김수미는 그 통장을 받아 그때 지고 있던 빚을 모두 청산하게 됩니다.

피를 이어받은 사람도 아니고 친해 봐야 남인 자신에게 자신의 전 재산을 내어준 것에 김수미는 큰 감동을 받게 되는데요.


입장이 바뀌어 김혜자가 그렇게 어려웠다면 자신은 그럴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 김수미는 그런 김혜자에게

“언니가 아프리카에 포로로 납치되면 내가 나서서 포로 교환하자고 말할 거야”

“나 꼭 언니를 구할 거야” 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김혜자는 수십 년간 월드비전의 친선대사로도 활동하며 죽음을 걸고 국경을 넘으며 빈곤국을 돌며 봉사활동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김수미는 김혜자의 그런 모습이 보여주기식의 연기가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본래의 모습이라고 말했는데요.

하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삶을 살아온 김혜자에게 어느 날 청천병력 같은 소식이 닥치게 됩니다.


바로 김혜자가 평생 연기에 집중할 수 있도록 아낌없이 지원을 해준 그의 남편 임종찬 씨가 그만 췌장암에 걸리게 된 것인데요.

섬유업 사업가였던 남편이 암에 걸리자, 남편을 그동안 챙겨주지 못했던 것이 너무 괴로워진 김혜자

그녀는 병원 침대 옆에서 남편과 한 달 반이나 같이 먹고 자고 하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담당 이사가 김혜자가 먼저 죽을 것 같다며 거울 좀 보라고 해서 봤더니 그녀는 정말 거울 안에서 입술이 검게 변해버린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남편이 하루만이라도 집에 가서 자라고 하기에 망설이다, 집에 도착한 순간 그만 그때 운명했다는 전화가 걸려오게 됩니다.


연기자로 국민적인 사랑을 받았지만 정작 바쁜 스케줄로 가족은 돌보지 못했던 김혜자는 남편을 그렇게 임종도 지켜주지 못하고 하늘로 떠나보내게 되는데요.

게다가 이후 아끼던 후배였던 최진실 등 함께 활동했던 동료들도 떠나보내며 김혜자는 더 깊은 슬픔에 빠지게 됩니다.

결국 이런 김혜자는 자신 역시 유서를 쓰게 되는데요.

매년마다 내용을 조금씩 수정하며 자신의 죽음을 준비한다고 밝혔습니다.


자식들이 말 안 들을까 봐 인감 도장도 찍어놓고 사인도 했다는 그 유서의 내용에는

“자신이 아프거나 사고거나 즉사하지 않으면 한 달 동안 병원에 넣어두고 실컷 봐라”

“그러나 그 이상 인위적인 생명 연장은 하지 말아라”

“그렇게 안 해주면 너희 정말 불효야” 라고 쓰여 있다고 합니다.


게다가 영정사진은 제일 배우같고 아름다운 사진이었다면 해야한다며, 이를 정한 그녀는 어느덧 자신의 죽음 역시 멀지 않았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장례식에 대해 물론 슬프겠지만, 그동안 자신과 함께 했던 기억을 떠올리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고 밝혔는데요.

이제는 자신의 인생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까지 느끼고 있는 김혜자에게 여러분의 따뜻한 응원을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