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바쳤는데..” 조국에 아버지를 잃고, 17살 딸과도 생이별한 배우 이정길의 안타까운 사연

이정길은 1944년에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났습니다.


이정길이 태어나고 우리나라는 해방되었지만 당시 대한민국은 해방의 기쁨보다는 혼돈의 시간이었습니다.

당시 아버지는 광복 후 일본인으로 오해받아 마녀사냥 당해, 안타깝게 사망하게 되었는데요.


이후 6.25가 터지면서 그의 어머니는 유일한 자식인 이정길 하나만을 들쳐업고 단신으로 월남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필연적으로 고생이 뒤따를 수 밖에 없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가난과 함께 시대를 보내며 모두가 끼니조차 챙기기도 어려웠던 60년대 이정길은 학교를 다니면서 꿈은 커녕, 하루하루 적응해서 산다는 게 어려웠던 시절을 보내는데요.


취업을 위해 기술자의 길을 선택하고 한양공고에 진학한 이정길은 1학년 때 세계적인 예술가들의 작품을 보게 된 후 가슴이 터질 듯한 흥분에 잠을 이루지 못하게 됩니다.

이후 연기자의 꿈이 강렬하게 자라나며 어머니 몰래 서라벌예고로 전학을 가게 됩니다.

이정길의 어머니는 2대 독자인 아들이 기술을 배워 좋은 회사에 다니기를 원했는데요.


이정길은 집에서 나올 때는 한양 공고 교복을 입고 나왔다가 근처 가게에서 몰래 다시 서라벌 예고 교복을 갈아입고 등교를 했습니다.

그러다 나중에 죄책감에 어머니께 솔직하게 말씀드렸더니 어머니는 깜짝 놀라시며 혼절하시게 됩니다.


이후 그는 대학 1학년이었던 63년에 이순재, 여운계, 오연경 등 후에 국민 배우가 된 대다수가 활동하고 있었던 실험극장에 입단해, 연극 배우로 활동을 하게 되는데요.

당시 국립극장 대기실에 들어가면 연극 주연급 배우들의 개인 라커 옷장이 하나씩 쫙 입고 신인 이정길은 동기들과 맨 끝에 있던 한 칸을 함께 써야 해서 옷을 넣을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당시 그는 ‘내가 옷장 맨 앞까지 가려면 얼마나 걸릴까’ 하며 무명 시절을 보내게 됩니다.


이후 이정길은 열심히 활동에 임했고 입단 후 고작 23년 만에 초스피드로 주인공 발탁까지 해내고 맙니다.


그러던 그는 대학 2학년 때 용돈도 벌고 학비도 벌기 위해 tv 연기자 공채 시험에 지원을 하게 되었고 4차 시험을 모두 단번에 통과하면서 연극 배우를 하면서 방송 탤런트로도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방송은 녹화기가 없어, 모든 방송을 생방송으로 송출하던 시절이었는데요.


드라마도 역시 무조건 생방송일 정도로, 방송 환경이 열악해습니다.

그러다보니 탤런트 기준 1조에는 ‘임기응변에 능해야 한다’가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데뷔한 신인 이정길에게는 드라마 출연 기회가 쉽게 오지 않았습니다.

한 달에 한두 번 단역이 들어오면 도면에 그림까지 그려가며 동선을 체크하며 보름이나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보름을 고생해도 출연료를 고작 500원 받는 게 다였을 뿐이었습니다.

당시는 5급 공무원의 월급이 4800원 하던 시기였죠.

그때는 현장에서 경리가 출연료를 현금으로 바로 줬는데 500원을 받고 보니 용돈이 되지않았다고 합니다.


6~70년대에는 대사 개수에 따라 출연료가 정해지던 시절이라 기계적으로 대사 몇마디로서 과연 얼마나 좋은 배우가 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이정길


그는 20대 후반을 향해가면서 배우로서의 꿈, 병역 문제, 가난했던 국가의 비전 등 너무나 많은 인생의 숙제와 고민 속에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그렇게 연기 열정을 불태우던 그는 7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탄력을 받으며 왕성하게 활동하게 되는데요.

그는 시대극 사극 멜로 등 장르를 넘나들며 수많은 작품에 출연했습니다

한 가지 연기만 하면 시청자들이 2~3번은 봐주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다양하게 변신하며 연기를 펼쳤는데요.

영화 쪽에서도 여러 곳에서 섭외 요청이 오게 되었고 한 번에 4편의 영화에 출연 계약까지 하게 됩니다.

그렇게 영화 계약을 하고 첫 작품을 찍으러 간 이정길은 당시 중3 학생이던 임예진을 상대역으로 만나게 됩니다.

당시 갓 데뷔해서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이미지는 어머니가 매니저처럼 현장에 동행해서 머리를 비겨줄 정도로 어렵다.


보니 그 모습을 본 이정길은 저렇게 어린 배우가 연기를 잘 할 수나 있을까 이거 계약을 취소해야 하나 걱정까지 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촬영 첫날 둘이 첫 신을 찍게 되는데 카메라를 들이대니까 이미지는 똘망똘망하게 의외로 연기를 어찌나 잘하던지 이정길은 칭찬도 해주었을 정도로 깜짝 놀라게 됩니다.


훗날 이정길은 수십 년 후 임예진과 드라마에서 중년의 부부 역할로도 출연하게 되는데 이혜진은 그런 이정길에게

“자신과 부부 역할을 계속하시려면 덜 늙으셔야 한다”고 우스갯 소리도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젊은 시절 인기 배우로 여러 작품에 겹치기 출연까지 하며 바쁘게 활동하던 이정길,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딱 떠올리는 대표작 암행어사를 빼놓을 수가 없는데요.


그 작품은 암행어사 이정길과 갑봉이 임현식의 찰떡 호흡이 빛났던 인기 드라마로 80년대 무려 3년 7개월이나 매주 방영이 되며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였습니다.

하지만 이정길은 당시 인기도 얻었지만 마음 속으로는 “하루 빨리 이 드라마에서 빠져나와야 하는데” 라고도 생각했다는데요.


지금은 사극 세트장이 전국 도처에 많이 있지만 그때만 해도 대궐 신을 찍으려면 무조건 용인민속촌까지 가야 했고 산골을 돌아다니는 신을 찍으려면 남원 등지로 가야 했습니다.

그렇게 전국을 돌아다니다 보니 대단히 강행군의 일정이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당시엔 카메라 단 한 대만으로 여러 장면을 반복해서 찍었기 때문에 액션 파트 10분짜리를 밤을 새고 찍었고 나중에 먼동이 트면 급기야 해가 비치지 않는 숙소까지 이동해서 찍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을 너무 많이 뺏기고 육체적으로도 너무 고달픈데, 다른 주말 드라마와 일일 드라마까지도 함께 출연했기에 몇 번은 스케줄이 도저히 안 돼서 촬영을 못 가기도 하게 됩니다.

그럴 때면 이정길이 아닌 대역을 세우기도 했었는데 시청자들은 당시 이정길이 워낙에 많은 드라마에 출연했기에 대역 배우를 보고 이정길이 아니라고 곧바로 알아차리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이정길은 배우로 수십 년을 꾸준히 활동했고 그 결과 어느덧 중년 신사의 대표 주자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어느 날 인생에서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닥치게 되는데요.

그는 결혼 후에도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한 집에서 살았고 홀로 드신 장모님까지 한 집에서 함께 모셨을 정도로 가족에 대한 사랑이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결혼 후 1남1녀를 낳았는데 그 중 딸이 바이올린을 시작해서 17살 때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됩니다.

그로 인해 이정길은 무려 13년이나 딸과 떨어져 살게 되었고 때문에 딸에 대해서는 더 애틋한 감정을 가지게 됩니다.


10대 어린 나이의 딸을 홀로 타국으로 보낼 당시에 아버지의 심정은 얼마나 걱정이 되고 많이 보고 싶기도 했을까요?

더구나 이정길은 과거 ‘mbc 사람이 좋다’에 출연했을 당시 젊은 시절 함께 활동했지만 세상을 먼저 떠난 김자옥과 김영애의 납골당을 찾아가기도 했는데요.


한 작품에 출연해 스타가 되었고 오랫동안 상대역으로 호흡을 맞췄는데 유명을 달리하는 바람에 이정길은

“애틋했던 과거 한 편으로 묻히고 말았다”며

“옛날 일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지고 부디 편안하게 있으라”는 메시지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어느덧 세월은 그렇게나 흘러가 버렸고 이정길도 벌써 팔순을 코앞에 둔 황혼의 나이가 되어버린 것인데요.

참으로 힘겨운 인생을 살아온 배우 이정길에게 여러분의 따뜻한 응원을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