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황을 평생 괴롭힌 ○○” 공백기가 유독 길었던 나훈아의 믿을 수 없는 고백, +근황과 재산

트로트의 황제 가황 나훈아 씨 그러나 그가 가장 원하는 호칭은 그냥 나훈아 씨였습니다.

보통 나훈아 하기도 힘든데 왜 자꾸 뭘 갖다 붙이냐 하면서 가황이라는 타이틀에 부담을 드러냈죠.


그래서 그런지 50여 년의 가수 인생 중 거의 20년 가까이 노래를 접기도 했습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어린시절 그리고 가수 데뷔


나훈아 씨는 아직까지 나이 논란이 있는 미스터리한 가수인데요.


1947년생으로 익히 알려져 있지만 호적상에는 1951년생이라고 합니다.


그는 매우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다고 해요.


그 당시 밥 먹기도 힘든 50년대에 집에 축음기가 있을 정도였죠.


어렸을 때부터 주먹이 세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는데요.

중학생 시절 야구부 4번 타자였는데 야구 방망이로 동네 아이들을 정리하기도 했다고 하죠.

그는 겉으로는 거칠게 보였지만 감수성이 아주 뛰어났고 노래의 놀라운 재능을 보였습니다.


초등학교 때 부산시 교육위원회에서 개최한 콩쿠르 대회에서 2년 연속으로 1등을 했을 정도였죠.

형제 중에 가장 공부를 잘해 아버지는 그가 의사나 판검사를 해주기를 바랬어요.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갑자기 너무나 쉽게 가수가 되어 버립니다.


알고보니 고등학교 2학년 때 작곡가 심형섭 씨가 학교 바로 옆 정릉에서 음악학원을 열고 있었어요.


그 학원에 친구 따라 놀러 다니고, 가끔 노래도 불렀는데 이를 들은 심형섭 씨는 탐이나 침을 꿀꺽 삼킬 정도였다고 합니다.


심형섭 씨의 주선으로 오아시스 레코드사와 인연이 닿게 되어 한국 가요사의 대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1968년 ‘내사랑’ 1969년 ‘천리길’을 냈는데 히트했고, ‘사랑은 눈물의 씨앗’ 등 연이어 다른 곡들도 줄줄이 성공하며 거의 신인 시절이 없었다고 합니다.

묵직하고 중후함이 느껴지는 저음과 특유의 절묘한 고음, 이를 활용하면서 나오는 전매특허인 꺾기로 대표되는 나훈아 특유의 창법은 큰 인기를 끌었죠.

이로 인해 수많은 가짜 나훈아가 생기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잘 나가고 있었지만 부모님 몰래 가수가 되었기 때문에 집에서는 전혀 몰랐다고 합니다.


예명 나훈아로 활동했고 더구나 아버지는 외국에 가 계셨기에 들키지 않을 수 있었죠.


오아시스 사장은 나훈아 씨가 집안 얘기를 안 해서 못 사는 줄 알고 쌀 한 가마를 집에 싣고 돈 50만 원을 봉투에 넣어, 그의 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리기 위해 부산 집으로 내려갔습니다.


그제서야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난리를 치셨고 사장은 쫓겨나듯이 서울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어요.

또한 아버지는 나훈아 씨를 아버지 친구가 경영하는 병원에 집어넣어버립니다.

가수 활동을 못하게 하려고 그런데 입원해서 검사해 보니 놀랍게도 그의 폐가 심각한 상태였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됩니다.

그 때 강제로 입원한 김에 치료를 받아서 다 나았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가수 활동을 죽어라 반대하셨지만 그때 폐가 안 좋은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의 가수 생활이 불가능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의 아버지는 나훈아 씨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정신적인 트라우마를 남기게 됩니다.

최다 히트곡 보유자


그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히트곡과 앨범을 냈는데요.

히트곡만 무려 120곡이 넘고 앨범 발표 수만 해도 무려 200장 이상 800곡 이상의 자작곡을 포함해서 2600곡 정도의 취입곡을 자랑합니다


게다가 나훈아는 대부분 곡을 직접 작사 작곡해, 저작권료만 따져도 일 년이면 6억에서 12억에 달한다고 합니다.

아무리 인기 작곡가라고 해도 1년에 1억 나오기도 힘든데 정말 대단합니다.


그런 그가 1980년대 후반이 되자 그는 tv 출연을 거의 하지 않고 연말 특집이나 공연에서만 볼 수 있게 되었어요.


2006년 공연을 끝으로 그는 잠정적인 은퇴 상태가 되며 10년 넘게 잠행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잠행 이유1 : 끊임없는 사생활 구설수


1972년 나훈아 씨는 한 공연에서 ‘찻집의 고독’을 부르다 한 괴한에 의해 얼굴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가지게 됩니다.


정신적으로 너무 힘든 상태에서 바로 다음 해인 1973년 전격적으로 공군에 입대하는데요.


입대 직전 이 모 씨와 결혼했어요. 그녀는 당시 유명 영화배우 고은아 씨의 사촌이었죠.

2년 뒤 1975년 이혼하는데요.


첫 번째 결혼은 군 생활 중으로 결혼 생활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 같아요.

첫 번째 이혼을 하자마자 그 다음 해에 바로 두 번째 결혼을 합니다.


1976년 부대 전역 후 당대 최고의 영화 배우 김지미 씨와 결혼 발표를 해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죠.


두 사람은 함께 사는 동안 연예계 생활을 접고 김지미 씨의 고향이었던 대전에서 ‘초혼’이라는 식당을 운영하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어요.


그러나 나훈아 씨가 1981년 ‘대동강 편지’를 발표하면서 가요계에 복귀한 그 다음 해인 1982년 이혼합니다.


그녀와 이혼 후 1년 만에 세 번째 결혼을 합니다.


후배 가수였던 정수경 씨와 동거를 하다 첫 아들을 얻은 후 1983년 세 번째 결혼을 한 것이죠.


정수경 씨는 결혼 당시 25살이었으며 나훈아 씨와 14살 차이였습니다.


이 당시 나온 노래가 나훈아 씨의 대표곡 중 하나인 ‘사랑’이죠.


슬하에 1남 1녀를 두며 단란하게 사는 듯 보였지만 2011년 시작된 이혼 소송은 무려 5년 만에 종지부를 찍으며 결국 이혼하게 되었습니다.

이 당시 나훈아 씨는 잠행 중이었어요.


2006년 데뷔 40주년 공연을 마친 후 대중은 더 이상 마이크를 잡은 나훈아 씨의 모습을 볼 수 없었습니다.


투병설부터 후배 여배우와의 염문설 강도 높은 루머가 판쳤죠.

결국 2008년 초 그는 대중과 언론 앞에 다시 섰어요.


공식 기자회견을 열고 각종 의혹에 조목조목 반박하며 바지 지퍼를 내리겠다는 초강수를 두며 모든 루머를 잠재워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도 10여 년의 잠행을 이어갔어요.


이렇게 그의 사생활은 순탄치 않아 가수로서 긴 공백기를 가지게 된 점이 있는 것 같은데요.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잠행 이유2 : 노래를 싫어하는 나훈아


그는 예전에 이에 관해 속마음을 털어놓은 적이 있는데요.

그는 2002년 월간조선 인터뷰에서 나는 노래 부르는 걸 싫다는 폭탄 고백을 합니다.

“노래하기 싫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이해 못하겠지만, 제가 다시 태어난다면 노래는 죽어도 안 부를겁니다”

또한 남자로 태어나 얼굴에 분칠하는 것조차 싫었다고 합니다.


나훈아 씨는 자신의 노래를 히트시켜준 대중들에게 너무나 감사하다고 방송에서 말해왔지만 한편으로 마음 한 구석은 굉장히 괴롭다는 속마음을 털어놓았습니다.

“저는 이 직업이 싫습니다”

“제가 인기 속에 빠져 있으면요 자기 관리가 안 됩니다”

“전 제가 노래를 잘하는지 못하는지도 몰라요”

그래서 그런지 그는 다른 가수들과 달랐습니다.


공연을 앞두고 밴드와 함께 철두철미하게 연습하는 것은 물론이고 며칠씩 하는 공연이 끝날 때까지 연습하고 또 연습한다고 해요.


그는 “자기는 노래를 못하니까 더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연습해야 한다”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천재가 재능만 믿지 않고 연습까지 남보다 더 많이 해버리니 이를 덮을 자가 없죠.

그러나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너무나 과도하게 최선을 다하다 보면 사람은 기가 다 빠져 기진맥진해질 수가 있죠.


그도 인간인지라 이런 생활에 지친 나머지 에너지가 고갈되어 다시 부활하기 위해 긴 휴식이 필요했던 측면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또한 그는 진짜 좋아하는 것을 털어놓기도 했죠.

“저는 비즈니스가 좋았어요”

“김지미 씨랑 대전에서 식당을 했는데 아침 일찍 일어나서 작업복 입고 뚝딱거리는게 참 좋았어요”

그는 이렇게 노래보다 사업이 더 좋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실제로 회사를 차리죠 86년에 자신의 기획사 ‘아라 기획’을 세워 본격적으로 레코드 제작 판매업을 시작한 것은 89년부터였습니다.


이 사업으로 벌어들이는 수입이 가수 수입만큼 들어온다고 밝혀, 당시 재산이 수백억에 달했었죠.

잠행 이유3 : 아버지


그는 아버지에 대해 죄스러운 마음을 떨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천하의 나훈아가 되었지만 73세에 돌아가실 때까지 가수가 된 자식을 용서하지 않으셨어요.


그런 사실이 나훈아 씨에게 평생 한으로 남아 경기도 이천에 있는 아버지의 산소에 일년에도 몇 번씩이나 들려 푹푹 울고 온다고 합니다.


최근 내놓은 신곡 테스 형이 나오는 테스 형이 바로 돌아가신 자신의 아버지를 뜻한다고 하죠.

그가 가끔 더욱 노래를 부르기 싫어하는 것이 아버지의 영향도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남자는 같은 남자인 아버지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평생 간다고 하잖아요.


그러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도 이제는 나훈아 씨가 대중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를 주고 존경을 받는지 아셨을 거고 그래서 아들을 인정할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앞으로 아버지 무덤에 가서 울지 마시고 웃으셨으면 합니다.

인생은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노래에 가장 큰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노래 부르는 것을 싫어했다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훈아의 노래는 가장 아름다운 예술로 꼽혀왔습니다.


그가 고통을 참고 찬란하게 승화시킨 예술에 대해 더욱 경의를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