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적 디바 이은하 “○○ 때문에 인생 망가져..” 급성 악화 끝에 극단시도까지, 혜은이마저 눈물..

가수 이은하 씨를 기억하시나요?


‘전설의 디바’라 불릴 정도로, 독보적인 가창력으로 70~80년대를 가요계를 평정한 가수인데요.


특히 감성을 자극하는 매력적인 허스키 보이스를 통해 이은하는 당대 최고의 가수로 손꼽히죠.

그런데 그런 그녀가 수십억의 빚을 지고 불치병과 싸우며 가슴 아픈 시련들이 가득한 굴곡진 인생을 치열하게 견뎌내고 있다고 하는데요.

지금부터 이은하 씨의 최근 충격적인 근황에 대해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어린시절

이은하는 1961년에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원래 본명이 이효순인데 가수로 데뷔하고 이은하로 이름을 개명한 것인데요.


이은하의 아버지는 유명한 아코디언 연주자로 그녀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로부터 직접 음악을 가르침 받게 됩니다.

그녀가 학교를 갔다 오면 다른 친구들은 다 뛰어노는데 자신은 매일 아버지와 노래 연습을 해야 했다고 합니다.


그 영향을 받아 이은하는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나이트 클럽에까지 나가서 노래를 부르게 됩니다.

그리고 1973년 님마중이란 곡으로 데뷔하게 되는데 당시 만 17세 미만은 방송 출연을 할 수가 없었죠.


방송국에서 주민등록등본을 제출하라고 하자 57년생인 언니의 등본을 해서 나이를 속여서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녀는 나이를 들어 보이게 하려고 화장도 짙게 했으며 심지어 당시 발육도 안 되어 있다보니 가슴에 털실이나 천 조각을 넣고 다니며 20대 아가씨처럼 위장하여 가수로 활동하게 됩니다.


그녀는 데뷔했을 때만 해도 큰 인기를 끌지 못하다가 나중에 발표했던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본격적인 이은하 시대를 열게 되는데요.


허스키한 보이스로 내지르는 시원한 가창력에 연예계는 이은하에게 관심이 집중되었죠

이 후 밤차 활동 때 선보인 찌르기 춤으로 선풍적인 인기 몰이를 하게 되면서, 당시 최고로 잘 나가는 여가수로 확실히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이은하에게 어느 날 갑자기 시련이 닥쳐오는데요.

출연 정지


당시만 하더라도 방송국이 하나의 소속사를 겸하던 시절이었기에 이은하는 사실상 동양방송 전속가수나 마찬가지였죠.

동양방송이 kbs로 강제 통폐합이 되면서 하루아침에 소속사가 사라진 이은하는 마지막 동양방송 고별 특집 방송에서 그만 사고를 치게 됩니다.


그녀는 고별 방송에서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을 부르다가 동양방송이 없어진다는 슬픔 때문에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목이 메어 결국 노래를 완창하지 못하게 되는데요.

생방송에서 노래를 다 부르지 못한 것 자체로도 큰 방송 사고나 다름없었던 데다가 당시 신군부의 입장에서 이은하의 행동은 하지 말았어야 하는 일종의 항거처럼 느꼈죠.


결국 이은하는 3개월간 방송 출연 정지를 당하게 되는데요.


그러나 이 후 출연이 재개된 후에는 보란듯이 슬픔을 딛고 일어서서 ‘겨울 장미’와 ‘바람에 구름 가득’ 등의 노래를 연이어 히트시키게 되는데요.


이은하는 1982년 연예인 인기 순위에서 남궁옥분에 이어 2위를 기록하며 이미자와 혜은이보다도 높은 순위에 오르기까지 하게 됩니다.

1982년 당시 서울 아파트 한 채 값이 1200만 원일 때 이은하가 종합소득으로 6천만 원을 신고하면서 당시 연예인 종합소득 순위에서 전체 8위를 차지하기도 했는데요.


‘밤차’ ‘아리송해’ 등 수많은 히트곡으로 7080년대 디스코의 여왕으로 불리며 이은하는 9년 연속 10대 가수상은 물론 가수왕도 3번이나 차지하게 됩니다.

그렇게 화려한 전성기를 보내던 이은하 그런 그녀에게도 인생에서 딱 한 번의 사랑이 찾아오게 되는데요.

그녀의 사랑과 아버지의 집착


자신보다 한 살 어린 연하 남자 친구를 사귀게 되면서 결혼을 허락받으러 아버지를 찾아갔지만 아버지는 재떨이를 던지며 그녀의 결혼을 극심하게 반대했고 눈이 돌아가서 흰자만 보일 정도였습니다.


남자친구는 무릎 꿇고 허락하실 때까지 버틴다고 했지만 이은하는 도저히 그 모습을 못 보겠어서 아버지 뜻대로 하겠다고 말하며 결혼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녀는 13살 때부터 노래하다 보니까 아버지 말이 사실상 법이 었습니다.

자신의 수입 또한 다 아버지가 관리하고, 연예계 시절 이은하 씨가 그 누구와 대화조차 하지 못하게 막았다고 합니다. 

이 정도면 사랑이 아니라 집착아닌가요?

이 후 이은하의 아버지는 ‘은하가 언젠가 떠나가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사업을 시작하게 됩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계약서도 볼 줄 모르면서 준비 없이 사업에 뛰어들었고, 주변에 속삭임에 넘어가 보증을 서며 어음 발행과 당좌 개설을 하며 모두 이은하의 이름으로 사인을 했습니다.

결국 사업이 망해, 90년도에 7억 원 정도의 빚이 생기며 이후 5층짜리 건물과 150평 집이 다 날아가게 됩니다.


부동산은 다 팔고 나머지 빚은 이은하가 다 감당해야 했는데요.

딸이기 때문에 아버지 빚을 책임질 의무는 사실 없었는데 그걸 그때는 알지 못했죠.

그녀의 아버지는 처음에는 자기가 빚진 거니 자신이 감당하겠다고 하다가,

아버지가 죄를 인정하고 감옥에 들어가면 해결이 되는데 “혀 깨물고 죽을 망정 안 들어간다고 이은하에게 모두 책임져”라고 하시며 그녀는 한순간에 모든 빚을 떠안게 됩니다.


그 때 아버지가 빌린 돈은 대부분이 사채 빚이어서 원금 7억이 이자 때문에 점점 크게 불어나게 되었고 설상가상 사채 측에서 ‘이자를 안 주면 방송국에 폭로한다’ 등 협박까지 당하게 되는데요.

1990년대 초반에 20억 원에 달하는 빚이 생기게 되면서 이은하는 매일 빚을 갚아야 하는 지옥 같은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녀는 매일 밤무대까지 가리지 않고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했지만 한계가 있어서 다른 곳에 빚을 얻어 빚을 해결하기도 했는데요.

열심히 일해 결국 아버지의 20억을 모두 갚게 되었지만, 2015년에 다시 아버지로 인해 생긴 사채 빚이 50억 원에 달하게 되면서 이은하는 결국 파산 선고를 받아 면책 절차까지 진행하게 됩니다.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에서 이은하의 이러한 소식을 들은 당시 라이벌 혜은이는 

” 은하가 주위의 어른들 때문에 지금까지 힘들게 고생하는게 너무 마음이 아프다”며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그녀는 이 상황에서 끝내 극단적인 선택까지 시도하게 되는데요.

“죽음을 위해 수면제까지 먹어보았지만 3일 만에 잘 깨어나더라”고 말하며 죽는 것도 쉽게 되지 않았다는 이은하

이렇게 지내게 되면서 결국 그녀는 건강이 크게 상하게 됩니다.

급격한 건강 악화


이은하는 빚을 갚기 위해 진통제를 맞아가면서 스케줄을 이어갔지만, 결국 크게 누적이 되고 호르몬도 변화하더니 ‘쿠싱증후군’이란 병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은하의 체중은 무려 30킬로나 증가하게 됩니다.


게다가 최근에는 유방암으로 투병하며 수술까지 받은 사실이 알려져 큰 충격을 주고 있는데요.

이은하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아버지를 용서했다”며

“한때는 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흘러 눈가에 주름이지고 눈 뜨기도 힘들어 하시는 모습을 보니 서글픈 마음뿐” 이라며 아픔을 털어놓게 됩니다.


그녀는 과거를 회상하면서

“처음에는 멍하다가 나중에는 왜 자기한테만 이런 일이 생기나 싶어 많이 울었다”고 하는데요.

“자신이 힘들면 주변이 더 힘드니까 그래서 참았고 참으니까 참아지더라”

“사실 살아오면서 많은 난관에 부딪혔지만 늘 극복해 왔고 이번에도 마찬가지”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대중들이 자신을 보시면서 힘 빠지는 거 싫다”

“내 직업이 대중 연예인이기에 눈물보다는 웃음과 희망을 드리고 싶다”

“때문에 변함없이 노래 잘하고 잘 사는 모습 보여드리고 싶다” 밝혔습니다.

가수가 된 것,

힘든 인생을 살게 된 것,

아직도 결혼도 못한 것까지

어떻게 보면 그녀의 아버지 때문이었던 것임에도 그녀는 이렇게 긍정과 희망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너무나 힘든 삶을 살아온 가수 이은하에게 따뜻한 응원을 부탁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