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에..목소리까지..” 26년 째 별거 중인 아내에 전 재산 준 송창식의 안타까운 근황, 조영남의 오열

개성적이면서도 빼어난 가창력을 가진 가수 송창식 씨


자기의 곡 대부분을 직접 작사 작곡한 싱어송 라이터이기도 한데요.


한국 가요사의 굵은 획을 그은 천재로 남을 가수이자 예술가로 평가받고 있죠


그러나 그의 개인적인 삶은 한 평생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게다가 최근 안타까운 상황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어찌된 일인지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송창식 씨는 1947년 인천 신흥동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친은 그가 3~4살 무렵 한국전쟁 중 전사하셨어요.


이 골목 저 골목 행상을 다녔던 어머니는 송창식 씨가 7살 무렵 가출해서 행방불명됩니다.


어린 송창식은 또래들과 어울리지도 못해 동네 북처럼 얻어맞는 신세였죠.


이후 인천 신흥 초등학교에 들어갔는데 공부에 취미를 붙이고, 오락 시간에는 하모니카도 부르고 오르간을 더듬더듬 치며 노래도 부르면서 친구들한테 인기도 높아졌습니다.


음악 책을 보면서 가사로만 노래를 부르기 지겨워 도,레,미 등 음정으로 부르다 음계를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곡을 쓸 줄 알게 되면서 주변으로부터 모차르트라고 불리기도 했다고 해요.


그 때가 8살 9살 무렵 한마디로 그는 음악 천재였죠.


시간은 흘러 송창식 서울예술고등학교 성악과에 수석 입학합니다.

그러나 옥수수 죽으로 연명하는 형편으로는 개인 레슨비를 낼 수 없어 결국 성악을 포기하고 학교를 중퇴했습니다.

좀처럼 자기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그인데 이때는 죽을 만큼 괴로웠다고 표현했습니다.


꿈을 포기 당한 그는 또다시 가출을 해서 노숙자 생활을 하며 끝없는 방황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 와중에 친구들의 여행에 따라갔는데, 한 대학생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송창식은 난생 처음 본 기타라는 악기의 매력에 푹 빠지고 말았습니다.

목공소로 달려가 엉성한 소리를 내는 기타를 자신이 직접 만들어 밤낮없이 기타를 치며 혼자 독학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기타는 그의 평생 동반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 여기저기서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불러주며 식사를 해결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운명의 서막이 펼쳐지기 시작합니다.


그를 눈여겨보고 있던 유명 음악 감상실 ‘쎄시봉’에서 MC를 맡고있던 이상벽 씨가 세시봉 출연을 교섭해준 것입니다.


송창식 씨는 ‘밥 먹을 수 있겠다’ 생각해서 세시봉에 들어가 노래를 부르기로 했습니다.


당시 아주 남루한 거지 같은 사람이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입이 딱 벌어졌다고 합니다.


송창식의 친구였던 조영남 씨는 그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그는 애당초 외계인처럼 행동했기 때문에 통상적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은 불가능했다.”

“몇 년을 거의 매일 함께 밥 먹고 잠자면서 붙어 다녔지만 그의 정체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

“부모가 살아계신지 형제가 있는지 집이 부자인지 가난한지 모든 게 안갯속이었다.”


그러던 송창식은 자신과 전혀 다르게 생겨 먹은 귀족적인 친구와 만나 팀을 이루게 됩니다.

경희대 학장의 아들이며 윤동주의 6촌 동생인 윤형주와 불멸의 듀엣 ‘트윈폴리오’를 결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1968년 지금껏 애창되는 ‘하얀 손수건’ 등 주옥 같은 번한 곡들을 발표하며 가요계에 데뷔하게 됩니다.


2년 남짓 활동한 ‘트윈폴리오’는 윤형주 씨가 미국 유학을 가게 되어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그러다 27살 때 병무청에서 7개월 방위복무를 했는데요.


그때 미군 방송에서 흑인 아마추어 노래 경연 대회를 보게 되고, ‘아마추어인데 자기보다 노래를 잘한다’며 큰 충격을 받습니다.


또 tv에서 전주 대사습 놀이를 보는데 거기 가수가 또 자기보다 훨씬 잘하는 것을 보고 이제는 울지 않고 본격적인 분석을 시작합니다.


서양 음악과 국악을 분석해 자기만의 음악 이론을 만들었고 동양과 서양의 요소가 모두 있는 음악을 만들기 시작해 쇼킹한 음악들이 탄생합니다.


70년대 중 후반 당시 나온 노래들이 ‘피리 부는 사나이’ ‘한 번쯤’ ‘고래 사냥’ ‘왜 불러’ 이런 곡들로 엄청난 인기를 얻어 가요 부문에 여러 가지 상을 받으면서 한동안 가요계를 장악합니다.


승승장구하며 1978년부터 연속 3년 동안 계속해서 mbc 10대 가수상을 수상합니다.


이 때 발표된 곡으로는 ‘사랑이야’ ‘토함산’ ‘나의 기타 이야기’ 등이 있습니다.


서정적이고도 신명나며 자유로운 노랫가락들에 억눌려 지냈던 70년대 많은 젊은이들은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80년대엔 ‘가나다라’로 가요의 국악을 접목하는 시도를 했으며 미성이었던 목소리도 한을 표현하기 위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창법으로 변화를 주었습니다.


‘참새의 하루’와 ‘담배가게 아가씨’를 더블 타이틀로 한 앨범도 초 히트


그러나 이후에는 신곡을 발표하지 않고 있어요.


왜 천재 작곡가는 작곡을 그만 두어 버렸을까요?


90년대에 접어들자 음악 소비자 세대가 나이가 어린 사람들로 바뀌었고 그들이 좋아하는 음악은 스타일이 완전히 달라져 버렸습니다.


이제는 자기의 음악으로 제작자에게 이익을 주기 어렵다는 판단을 했고 이런 이유로 그는 작곡을 중단하며 가장 전성기 때 사라져버린 것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만들기만 하고 발표하지 않은 미발표곡이 천여 곡이나 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30년 넘게 신곡이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송창식 씨의 인기는 끊이지 않는 구설수와 당시 최고의 인기 탤런트 한혜숙 씨 등 여러 유명 여성 연예인들과의 염문설도 동반했죠.


77년 9월 고교 동창이자 스튜어디스 한성숙 씨와의 결혼으로 송창식 씨는 안정을 찾은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최근 송창식 씨는 방송에 출연해 아내는 사업을 한다며 그의 곁을 떠나 20년이 넘도록 별거를 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자신은 가정을 위해 희생할 생각이 없는 사람이며 가사에도 도움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아내가 떠났다고 말했습니다.


한편 아내의 사업 실패 외에도 돈도 많이 빌려주고 빚 보증도 많이 써주었는데 제대로 받은 게 없고 받을 생각조차 없어 많은 재산을 잃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대해 조영남이 회상하기를,

“송창식은 오열하는 내게 덤덤하게 말했다 ‘괜찮아. 벌어 갚으면 돼’ “

“누굴 원망하는 눈치는 눈꼽만큼도 없었다. 착하다는 말로 설명이 안 되는 사람이다”

또한 그의 저작권 수입이 1년에 1억 원쯤 되는데, 그건 평생을 아내가 사업하다고 다 쓰고 있는 상황이라 합니다.

송창식 자신은 오로지 공연 수입으로만 먹고사는데, 최근 코로나 시국 상황이 있었고 성대도 좋지않아 공연을 하지 못해, 걱정이라고 합니다..


그는 1976년에 이어 2017년 두 번째 성대 결절 수술을 받게됩니다.

그는 “성대를 수술한다는 건 그동안 닦았던 목소리 자체를 잃는 것”이라 정의한 뒤

“수술 후엔 다시 발성을 익히고 연습해서 목소리를 만들어야 하는데 이때 만든 목소리는 이전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2020년 ‘최일구의 허리케인 라디오’ 방송에서 ‘올해 신곡이 나오나요?’ 라는 청취자의 질문에


“올해 신곡 나오나요? 내가 오직 그걸 하고 싶겠어요? 내가 제일 하고 싶어요”

“일단 난 이 목이 좀 나아야 돼요 왜냐하면 몇 년 전에 성대 수술을 했어요.”

“평소에 연습을 많이 해뒀던 성대를 컨트롤 하는 능력 그것이 없어졌어요…”


홍창식 특유의 고래 같은 노래의 느낌은 여전했지만 안타깝게도 두 번의 성대 결절 수술은 그의 목소리를 많이 앗아간 느낌이 있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를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는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동안 경기도 하남시 미사에 위치한 라이브 카페 송아(현 : 록시)에서 관객과 노래로 소통했는데요.


데뷔한 지 무려 50여 년이 넘는 가수지만 매일 한 시간씩 발성 연습 또 한 시간은 기타 연습에 매진한다고 해요.


인생의 목표가 인기나 돈이 아니라 음악을 통해 어디까지 갈 수 있나 정진하며 수련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제 자신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여러분은 송창식 씨의 인생을 보며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