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 빨간마후라 신영균, 3천억 재산 공개 돼

배우 신영균 씨는 자산이 놀랍게도 무려 3천억이 넘을 거라고 하는데 그 근거가 무엇일까요.

그 의 인생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신영균 씨의 고향은 북한, 황해도 평산군 금안면 필대리에 작은 마을입니다.

아버지는 백호 가량 되는 작은 동네 면장이자,소학교 이사장이었습니다. 나름 부유한 집안이었기에 유복하게 자란 편이었습니다.

그러나 여섯 살 때 아버지가 병환으로 돌아가시는 바람에 어머니가 30대 초반에 홀로 되셔서 온갖 고생을 다 해가며 삼남매를 키웠습니다.

신영균 씨는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다니면서 초등학생 때 교회 성극에서 단역을 맡게 되면서 연극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레슬링을 배운 적이 있는데 같은 도장에 다니는 친구의 아버지가 청춘극장이라는 극단의 단장이었습니다.

그에게 자신의 연기를 보여주고 그 극단에서 진짜 배우로 활동도 했습니다.

너무나 연기를 하고 싶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가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어머니는 노발대발하며 ,”딴따라 시키려고 황해도에서 서울까지 내려와서 공부시킨 줄 아냐”며 결사 반대했습니다.

그러자 몰래 도망쳐서 극단에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막상 해보니 너무나 비참하고 경제적으로도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고 연기는 취미로 할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일 년 동안 독하게 공부해서 1948년 서울대 치대를 들어갑니다.

서울대에서는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연극부를 만들어서 연극 부장으로 활동했습니다.

이후, 1958년 서울 종로에서 치과를 개업해 2년 동안 운영했습니다.

그가 치과를 차리자 인맥이 있던 연극인들이 찾아와 치료를 받았는데 그에게 연극을 같이 할 것을 권유했다고 합니다.

연기에 대한 열정을 끊지 못하고 극구 반대하는 아내를 설득해 다시 연극 무대에 서면서 배우로서 활동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의 연극을 보고 영화 과부의 감독이 캐스팅을 하게 되어 그는 1960년 32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영화 배우로 데뷔했습니다.

이듬해 1961년 신상옥 감독의 연상군 이라는 영화로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짧은 기간에 연기파 배우로 인정받았습니다.

1964년 그의 히트작 ‘빨간 마후라’에서 아시아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으면서 국제적으로 통하는 배우라는 인상을 대중들에게 심어주었습니다.

또한 1968년 미워도 다시 한 번 시리즈의 주인공을 하며 그 시대의 탑스타로 군림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인기가 엄청나, 작품을 어마어마하게 찍어댔는데, 일년에 서른 편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

19년간의 영화배우 활동 기간에 이렇게 다작을 하며 모은 돈으로 그는 사업을 합니다.

현재는 연예계 최고 부자로 손꼽히며 현금만 무려 500억이 있다고 합니다.

신영균 씨는 어떤 과정으로 이런 막대한 부를 축적했을까요?

1963년 친구와 서울 금호 극장을 인수하여 개관 이후, 명보제과를 인수해 부인 김선희 여사가 직접 빵을 굽고 장사도 하면서 사업을 키워 나갔습니다.

당시 명보제과는 뉴욕 제과와 태극당, 풍년제과 등과 함께 4대 제과로 꼽힐 정도였습니다.

1971년에는 볼링장을 인수했고, 1973년에는 빌딩 관리 업체인 한주흥산 주식회사를 설립해서 부동산 임대 사업에까지 뛰어들어 엄청난 사업 수환을 보였습니다.

어느 정도 부를 축적하자 영화 배우로서 자신의 영화를 원 없이 틀고 싶은 소망에 자신의 보물 1호라고 할 수 있는 명보극장을 사들이죠.

1977년 명보극장을 인수한 후 외국 영화와 한국 영화를 배급 상영하며 대박을 터뜨렸습니다.

1992년에는 한국에 진출하려는 미국 맥도날드 사와 신영균 씨가 함께 54억 원의 자본금을 투자해서 서울의 합자 회사인 맥신 산업을 설립했습니다.

지금은 아들이 한국 맥도날드 사장을 맡고 있죠. 특히 그의 재산 형성 과정 중 신영균 맥도날드와 SBS 서울 방송이 무척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결국 2014년 재벌닷컴 연예인 출신 부자 순위에서 신영균 씨를 1위로 꼽았습니다.

당시 SM의 이수만 씨나 YG의 양현석 씨를 제치고 1위를 차지했습니다. 당시 신영균 씨 재산은 총 2천8백30억 원.

신영균 씨가 손 대는 사업마다 성공했던 숨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가 영화에서 맡았던 역할은 영화에서의 이미지가 아주 좋았습니다.

게다가 남성적인 매력을 가진 미남이었는데도 단 한 번도 스캔들을 내지 않아 실제 인생도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이 믿음과 신뢰의 이미지가 사업에도 그대로 연결되어 하는 사업마다 족족 성공을 한 것입니다.
이런 점이 그의 진짜 부의 출처입니다.

이렇게 번 돈을 그는 사회에 환원해서 대한민국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2010년 당시 500억 원 상당의 가치를 가진 명보극장과 제주특별자치도 신영영화박물관을 영화계 예술계의 공유재산으로 기증해 영화계의 좌우 합작을 이끌었습니다.

2013년에는 모교인 서울대의 발전기금으로 시가 100억 원 상당의 토지를 기부하기도 했습니다. 2019년에는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선언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내가 나이 아흔을 넘었으니 살아봐야 얼마나 더 살겠습니까 그저 남은 거 다 베풀고 가면서 인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싶다.
나중에 내 관 속에는 성경책 하나 묻어주면 된다”

2022년 6월 8일 국민 mc였던 송해님이 향년 95세를 일기로 별세하면서 은퇴한 전직 연예인들을 통틀어 최고령 타이틀을 이어받았습니다.

신영균처럼 훌륭한 어르신들이 오래오래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살아서 후대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기를 기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