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적 디바 패티김’ 과거 누드 화보, 불륜으로 인한 길옥윤과의 이혼…충격 고백

패티 김 은 우리나라의 전설적인 디바로 그 시절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던 색다른 무대로 큰 인기를 누렸습니다.

스탠다드 팝의 선구자이며 1960년대를 대표하는 명가수이자 디너쇼의 여왕입니다.

그녀는 항상 당당하고 멋진 모습으로 대중들을 만나왔습니다.

하지만 54년 동안의 노래 인생을 끝마치고 2013년 돌연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은퇴 후 평범한 할머니로 살아가고 싶은 바람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오늘은 패티김의 일생과 그녀를 괴롭혔던 루머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패티 김은 1938년생으로 올해 85세입니다. 그리고 본명은 김혜자입니다.

1957년에 국무총리배 판소리 경연대회에서 입상하고,

1년 후 1958년 미8군 무대에서 가수 이예현과 듀엣으로 가수 데뷔를 했습니다.

데뷔 당시 예명은 린다 김 이였습니다.

이후 1959년 초에 미국의 여가수 패티 페이지와 같은 명가수가 되고 싶다는 뜻에서 현재의 예명으로 개명합니다.

패티김의 등장 이후 대한민국 대중음악계는 새로운 스타의 탄생을 지켜보았을 뿐만 아니라, 타고난 재능과 철저한 자기 관리로 새로운 시작을 이끌어 가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패티김은 이미자,현미,이금희,한명숙,최희준,윤복희와 더불어 1960년대를 대표하는 여가수였습니다.

그녀는 해방 후 일본 시장에 처음. 진출한 것을 비롯해 한국 가수로는 두 번째로 미국 시장에 진출했습니다.

그리고 한국 여가수 최초 미국 카네기 홀 공연 한국 가수 최초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공연 등

사실상 현재 한국 가수들이 이루어 낸 해외 커리어를 모두 시도한 가수라는 점에서 대단합니다.

동양 여성으로서 홀로 미국 시장에 진출하려 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받고 있습니다.

패티김은 지금 봐도 굉장히 이국적인 외모로 당시에도 화제였습니다. 혼혈이냐고 물어보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탈 동양인적 외형이 당시 미8군클럽에서 활동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이국적인 외모와 육감적인 몸매 때문에 많은 루머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일본에서 누드집을 찍고 왔다는 루머를 비롯해서 성형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습니다.

이에 패티김은 미8군 공연 시절 쌍꺼풀 수술과 코 수술은 받은 적은 있지만 이전에 개성을 잃어버리는 듯해 코에 넣었던 보형물을 오히려 제거했다.

그 외에는 얼굴에 손 한 번 댄 적이 없었다며 성형 루머를 정면으로 부인하기도 했습니다.

패티김은 평소 굉장히 자기 관리가 철저하기로 유명합니다.

칠순이 훨씬 지난 나이에도 꾸준한 운동과 목 관리로 전성기 때 컨디션을 유지했습니다.

매일 매일 5킬로미터씩 걷기 운동과 요가를 비롯해 수영 1500미터를 했습니다.

식이요법도 철저해서 데뷔 후 배불리 먹은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 때문인지 은퇴 기자회견 때는 70대 중반이라는 나이가 무색한 몸매와 패션 감각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철저한 관리를 했기에 디너쇼의 여왕이라고 불릴 만큼 대단한 공연을 계속 이어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화려한 가수 생활을 하던 그녀는 두 번의 결혼을 했습니다.

첫 번째는 다들 알고 계시는 길옥윤과의 결혼이었고 두 번째는 인생의 동반자로 아직까지 잘 지내는 이탈리아인 남편과의 결혼입니다.

사실 패티김은 길옥윤과 결혼 후 좋은 노래들을 많이 냈습니다.그들은 음악적 영감이 잘 통했습니다.

패티김과 길옥윤과는 1958년 일본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그 당시 풋내기 가수였던 그녀, 길옥윤은 패티김의 첫 인상은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고 말합니다.

둘은 가수와 작곡가로서 사무적으로만 만남을 가졌죠.

1965년 몸 담던 일본 클럽이 망한 뒤 길옥윤이 귀국을 택하고 어머니의 병으로 패티김도 한국 땅을 밟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간혹 가다 무대에서 함께 노래하고는 했습니다.

그렇게 인연을 이어가던 중 패티김은 봄비 보슬보슬 내리던 어느 날 밤 호텔방에서 뜻밖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녀는 곧 미국으로 떠날 예정이었는데, 길옥윤은 전화에 대고 ‘사월이 가면’이라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평소 말이 없고 내성적이었던 길옥윤 노랫말에 자신의 마음을 담아 전했고 두 사람은 그 해 12월에 결혼을 하게 됩니다.

신혼여행은 월남 파병 한국군 위문 공연으로 대신했습니다.

둘의 만남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신혼여행이었죠.

하지만, 이 신혼부부는 듣도 보도 못한 월남 땅 정글 속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청춘들에게 타향살이를 불러주었습니다.

위험했지만 당시 파병군들에게는 참 위로가 되는 공연이었을 텐데,그렇게 그들의 청춘을 달래주며 뜻깊은 신혼여행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더할 나위 없는 가수와 당대의 작곡가의 결합은 수많은 아름다운 곡들을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그대 없이는 못 살아 사랑이란 두 글자 등이 두 사람의 신혼 때 탄생한 곡입니다.

하지만 그 노래들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준 것에 비해서는 둘의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패티김과 길옥윤은 슬하의 딸을 하나 두고 결국 결혼 5년 만에 이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혼은 했지만 쿨한 부부답게 음악 생활은 계속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5년 동안 발표한 곡 중 대 작품이 많고 음악적으로는 정말 기가 막힌 팀이었으니 그렇게 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훗날 패티김은 그들의 이혼에 대해 모두 나 때문에 이혼한 것으로 오해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서로 너무 몰랐던 것이 결혼 실패 원인이었던 것 같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또 길 선생은 365일 술을 마시며 도박까지 했다.

부인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고 토로했습니다.

현재의 이탈리아 남편과의 불륜으로 고인과 이혼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지만 그것도 사실이 아니라고 합니다.

패티김은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부정적인 짓을 하지 않는다. 내 노래를 위해서도 나를 망가뜨리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한편 패티김은 이혼 20년 이후 길옥윤이 개최한 콘서트에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길옥윤은 암투병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암투병 와중에 이미 휠체어 신세였던 길옥윤 앞에서 패티김이 눈물을 참으면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길옥윤은 형언할 수 없는 눈빛으로 옛 아내를 쳐다보기도 했습니다.

길옥윤은 그 다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길옥윤은 부부 싸움을 한 뒤에도 화해하는 방식이 미안해가 아니라 끄적끄적 악보를 그려서 내밀었던 천상 음악가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두 사람의 이야기는 많은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이혼은 했지만 그 당시 그들의 사랑은 진지하고도 깊었던 것 같습니다.그래서 그 많은 명곡들도 탄생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패티김은

“지금 나는 온천지를 신비로운 붉은 빛으로 물들이는 석양의 노을처럼 가장 아름다운 태양의 모습이고 싶다”

라는 말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언제나 당당하고 멋진 매너를 가진 패티 김은 54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많은 이들을 기쁘게 해준 대한민국의 최고 디바임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이제는 행복한 노년을 가족들과 보내겠다는 그녀의 영화 같은 멋진 인생의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