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진이 끝까지 숨긴 충격적인 진실 (+ 흰머리 한 올 안 나는 젊음의 비결은?)

오빠 부대의 원조 가수 남진 씨는 자타공인 1970년대 한국 가요계 아이콘입니다.


라이벌인 나훈아 씨와 함께 한 시대를 양분했던 슈퍼스타죠


데뷔 57년 차로 70대 후반인 현재도 현역으로 꾸준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어마어마한 부잣집에서 태어나 별 어려움 없이 살았을 것 같은데 꼭 그렇지만도 않았습니다.


내색하지 않았던 그의 굴곡 있는 인생과 이렇게 많은 나이에도 활동할 수 있는 젊음의 비결도 알아보겠습니다.

남진 씨는 1945년 해방둥이로 항구의 도시 목포에서 태어났습니다.


목포에서 제일로 알아주는 부잣집 아들이었어요.

전쟁 직후인 1950년대 집에 자가용이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아버지는 목포 일보를 만든 사장이었고, 국회의원을 지낸 김문옥 씨입니다.

정미소 사업을 크게 했다고 합니다.


남진은 어릴 적 예체능에 소질을 보였는데 특히 음악은 하루 종일 들어도 질리지 않았다고 해요.


학생 때부터 팝송을 즐겨 불렀던 남진은 그 무렵 레스토랑에서 팝송을 불러 밴드 마스터에게 연습생 제의를 받게 됩니다.


영화 배우의 길을 꿈꿨던 그였지만 순전히 학원에 있던 여학생이 이뻐서 등록하고 연습생 겸 연애를 시작했다고 해요.


1965년 드디어 ‘서울 플레이보이’라는 음반으로 첫 데뷔를 하게 되었는데, 완전히 폭망했습니다.

두번재 음반 또한 노래 제목이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금지곡 처분을 받게 되어 실패하게 됩니다.

크게 실망한 그는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서 술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술로 나날을 보내는 그를 보다 못해 그의 어머니가 ‘울려고 내가 왔나’라는 트로트 곡을 밀면서 이 곡으로 다시 도전할 것을 권유했습니다.

원래 이 곡은 남진 씨가 트로트 부르기가 창피하다는 이유로 거절했던 곡이었는데, 그야말로 대히트를 치게 됩니다.


또 이듬해 박춘석 씨가 작곡해준 ‘가슴 아프게’를 통해 최고의 인기를 누리게 됩니다.


그 후에 나온 로커빌리 스타일의 불멸의 히트곡인 ‘마음이 고와야지’는 그를 가요계의 독보적인 캐릭터로 인정받게 합니다.

잘생긴 얼굴 그리고 엘비스 프레슬리를 모방한 창법과 무대 액션에 당시에 소녀 팬들은 열광시켰죠.


그렇게 한창 인기를 누리고 있던 때인 1968년에 해병대에 입대했고 이후 베트남 전에도 파병되었습니다.

수많은 동료들의 전사를 겪으면서 ‘사람은 죽으면 다 똑같다’라는 사실이 와 닿았다고 합니다.

베트남에서 몇 차례 죽음의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고 해요.


이 3년간의 군 생활이 부잣집 아들로 큰 어려움 없이 살다가 근성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1971년 군제대 후 ‘님과 함께’라는 곡을 통해 다시 정상에 반열에 서게 됩니다.


언론은 그의 컴백과 더불어 당시 총망받는 신인인 나훈아 씨와의 라이벌 구도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제대로 된 시련이 연달아 터지기 시작합니다.


1972년 나훈아 씨가 공격당한 너무나 큰 사건이 터졌습니다.

이때 남진 씨가 사건의 배후 인물로 낙인이 찍혔는데 그런 루머가 당시엔 급속도로 퍼졌어요.


그러나 나중에 나훈아 씨마저 사실이 아니라는 식으로 발언을 하면서 억울한 누명을 벗긴 했지만 꽤 오랫동안 그를 괴롭혔죠.


1976년에는 윤복희 씨와 결혼해서 큰 화제가 되었는데 얼마 가지 않아 이혼합니다.


당시 윤복희 씨는 유모 씨와 이미 결혼한 상태였는데 전 남편이 두 사람의 사이를 의심하자 홧김에 그녀를 짝사랑하던 남진 씨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당시 전 남편과 이혼도 하지 않은 상태였는데 말이죠.


나중에 윤복희 씨는 사실대로 털어놓고 남진 씨와 6개월 만 이혼을 하게 됩니다.


이런 사실을 잘 모르고 있던 대중들은 ‘남진 씨가 윤복희 씨를 구타하고 집에서 쫓아냈다’는 등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남진 씨는 윤복희 씨에게 쏟아질 화살을 자기가 맞으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해요.


그 후 남진은 미국 공연 가서 만난 재미교포 강정현 씨와 1980년 사실상 첫 번째 결혼을 하며 슬하에 1남 3녀를 낳게 됩니다.


이후 김대중 전 대통령과 친분이 있는 집안 자손이라는 이유로 아예 방송 출연을 금지되었고, 그1982년 ‘빈 잔’을 끝으로 10여 년간의 공백기가 생깁니다.

1990년대에 다시 복귀해 지금까지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

고 있습니다.

1993년 ‘내 영혼의 히로인’
1999년 ‘동지’
2008년 ‘나야 나’
2009년 장윤정 씨와 함께한 ‘당신이 좋아’
2014년 ‘상사’
2014년 ‘파트너’
2018년 ‘남자다잉’ 등을 히트시킵니다.

남진 씨는 한 때 한물간 가수로 취급받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나훈아나 씨보다 잘 나갔지만 음악성에서 나훈아 씨보다 한 수 아래라는 인식이 퍼진 적도 있었습니다.

그와 나훈아 씨는 음악도 그리고 스타일도 완전히 다릅니다.


나훈아 씨가 정통 트로트라면, 남진 씨는 팝과 로큰롤의 느낌의 현대적 트로트입니다.

그저 성향일 뿐, 누가 맞고 틀리고는 없죠.


그는 지금도 흰머리가 하나도 안 보이는데 놀랍게도 그는 아직도 염색을 하지 않는다고 해요.

참으로 믿기 어려운 젊음입니다.


남진씨는 어떻게 건강 관리를 하는걸까요?

아침에 일어나서 한 시간 반에서 2시간 정도 걷기를 한다고 해요.

그리고 저녁에 또 운동을 합니다.

나이 들어서는 수영이 자주하고, 때때로 골프도 즐긴다고 해요.

그리고 노래를 많이 부르는 것이 젊음의 비결인 것 같다고도 말했습니다.

호흡 운동이 저절로 된다고 해요.

노래를 많이 부르면 얼굴 근육을 많이 쓰기 때문에 저절로 리프팅이 된다고 합니다.

그의 얼굴에 처짐이 전혀 없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더욱 젊어 보이는 거죠.


부디 앞으로도 건강하고 행복하게 활동해 주시기를 응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