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적인 국내 여배우 양다리 걸치다 결국..” 최민수와 나훈아가 사랑한 그녀의 충격 근황


한 시대를 휩쓸었던 여배우 중에 김지미 씨가 있습니다. 


지금도 옛 세대들은 화투를 치다가 6이 나오면 김지미가 나왔네 라고 합니다. 

화투 6자 모란에 비유될 만큼 미인으로 이름이 높았던 것이죠. 

여기에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즉 ‘화중지왕’이라고 하는 모란처럼 최고의 꽃으로 지칭되기도 하지만 안 좋은 뜻으로는 향이 없고 꽃잎이 너무 만개한 모란에 빗대어 남자 관계가 복잡한 여자라는 비아냥이 숨어 있습니다. 


그만큼 김지미 씨의 인생은 화려하면서도 굴곡이 많았습니다 한국 영화사 최고의 여배우로 손꼽히는 그녀의 남자들을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첫번째 남자 영화감독 홍성기


김지미 씨의 첫 번째 남편은 영화감독 홍성기였습니다. 

김지미 씨는 홍 감독이 나보다 12살 많은 늙은 총각이긴 했지만 당시 유명한 감독이었습니다.


사실 영화를 찍는 건지 사실인지도 모를 정도로 어수선하고 정신없이 몰아치는 와중에 결혼식을 치렀다라고 회상했습니다.

두 사람은 1959년에 결혼식을 올리고 딸을 낳았지만 이후 3년 뒤 1962년에 헤어지게 됩니다. 

두번째 남자 배우 최무룡

이 파경의 직접적인 사유는 다음 남편인 최무룡 씨와의 열애였습니다. 

김지미 씨는 결혼 후 국제극장에 속한 당대 최고 영화사에 최무룡 씨와 함께 전속 배우가 됩니다. 

이들을 둘러싼 사건으로 당시 한국 사회는 떠들썩했습니다. 
막 떠오른 신인 여배우가 파경하자마자 외도 사건에 연루되었기 때문인데요. 


김지미 씨는 당시 최무룡 씨와 현장에 앉아 서로 자기 속상한 얘기 같은 거 털어놓게 되지 않나 그러다 정이 들었는데 이게 빵하고 터져버리더라 수습해야 하니까 안 살 수가 없게 된 거다라고 당시의 상황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김지미 씨가 파견했던 9월에 최민수 씨의 아버지인 최무룡 씨의 부인 강효실 씨는 막 출산을 한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강효실 씨는 아들 최민수 씨를 놓자마자 열흘 만에 남편과 김지민 씨의 외도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고 이에 최무령 씨와 김지미 씨는 외도죄로 구속됩니다. 


아이를 낳자마자 남편의 외도라는 엄청난 사실을 직면하게 된 강효실 씨에게 세상은 동정적이었고 그만큼 김지미 씨에 대한 비난은 컸습니다.


김지미 씨는 최무룡 씨와 함께 내통 혐의로 구속된 뒤 수갑을 찬 두 사람의 행복해하는 모습에 당시의 언론은 연일 화제였습니다. 
지금 관점으로도 충분히 파격적이지만 당시 시각으로는 그야말로 대형 스캔들이었습니다. 


당시 최무룡 씨는 무려 100일 무렵에 갓난 아들 최민수 씨를 둔 상태였고 파경우 김지미 씨가 잠깐 최민수 씨를 맡아 기른 적도 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김지미는 최민수에겐 어떻게보면 나를 길러준 사람이지만, 어떻게 보면 친어머니와 친아버지를 이혼하게 한 주범인 것이죠. 방송에서 최민수에게 친 부모야 그렇다 치고 아버지의 불륜녀 김지미 님이 원망스럽지 않냐는 질문에 최민수씨는 

“그런 것은 없고, 그냥 당연하게 생각했다. 지금도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 역시 내 어머니라고 생각한다.  시간이 날 때면 종종 찾아뵙고는 한다”고 입장을 밝혔습니다.

20대의 여배우가 이 정도 사건에 연루되면 한국에서는 지금도 거의 은퇴하다시피 종적을 감추게 되는데 김지미 씨는 그 후에도 변함없이 건재를 과시합니다. 


김지민 씨는 “사람들이 참 희한한 것 같다. 나를 욕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또 한편에서는 내가 못한 거 실컷 해서 통쾌하다 당당하게 잘했다는 얘기를 편지로 전화로 전해왔다”라고 밝혔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재혼을 하고 딸 한 명과 아들 한 명을 낳았지만 아들은 돌이 지날 무렵 사망하게 됩니다. 
하지만 두 사람 또한 7년 뒤인 1969년 파경에 이릅니다. 


두 사람의 파경 사유에는 경제적인 문제가 적지 않게 작용합니다. 
당시 최무룡 씨는 영화 배우를 넘어서 영화 감독과 제작에도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래서 감독 데뷔를 할 때도 김지민 씨가 사재를 털어서 지원했고 이후 15편의 영화 제작에도 그녀가 적극 지원했지만 거의 대부분 실패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후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이런 경제적인 문제 외에 좀 더 근원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남편이 영화를 제작한다고 집에 들어오지 않았고 김지민 씨는 남편의 행방을 수소문에 아침 일찍 남편이 커피를 마시러 온다는 다방에 가 딸을 등에 업은 채 남편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밤새어 마작을 한 남편과 일행이 다방에 들어왔고 김지미 씨는 그 즉시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이러면 안 된다라며 남편의 뺨을 때렸습니다. 

그랬더니 최무룡 씨는 김지미 씨의 건강을 챙기며 오히려 진정시킵니다. 


하지만 묘하게도 김지민 씨는 남편이 집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도 영화 제작을 그만두기를 바라는 것도 놀음을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김지미 씨는 “난 사실 그 사람이 이 여편네야 새벽에 어딜 찾아와라고 소리치며 내 턱이 부서지도록 때려주었으면 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오히려 내 몸을 걱정하더라 그때 느꼈다 이 사람은 내가 평생을 맡길 남자가 아니구나” 라고 말이다 라고 속마음을 전했습니다. 

세번째 남자 나훈아


이후 그녀는 11살 연하의 나훈아 씨와 만나게 됩니다. 
당시엔 연상연하 커플이 드물었기 때문에 이번 역시 당시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듭니다. 

김지민 씨는 나훈아 씨와의 관계에 연하의 남자와의 긴 연애였다라고 합니다. 
두 사람은 결혼하지 않고 76년부터 82년까지 7년동안 동거를 했지만 결혼하지는 않았습니다.


또한 김지미 씨와 나훈아 씨와의 관계는 연인보다는 스승과 제자에 더 가까웠습니다.

나훈아 씨의 재능을 높이 평가한 김지미 씨가 예절과 서예 등 다방면에 걸쳐서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나훈아 씨는 김지미 씨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지만 그것이 그의 기질상 자신이 보호하고 지키는 아내를 얻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결국 사실혼 관계였던 김지미 씨와 헤어지자마자 14살 연하의 가수 후배 정수경 씨와 4년간 동거를 하다가 결혼식을 올립니다.

네번째 남자 의사 이종구

그리고 김지미 씨는 공식적으로 만난 네 번째 남자이자 세 번째 남편 의사 이종구 씨를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이들은 11년간 결혼 생활을 유지했지만 결국 파경에 이르는데 결혼 생활 역시 그리 행복한 편은 아니었습니다.

김지미 씨는 애정은 둘째 치고 편안한 상대가 옆에 있어야겠다는 생각으로 결혼을 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부부라며 싸움을 하고도 금세 이리 와봐 하면서 껴안기도 하고 자기가 잘못해놓고도 큰소리 뻥뻥 치고 해야 하지만 그녀 자신은 격식을 차리다 보니 거리감만 생기고 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녀는 이러한 결혼 생활에 피로를 느끼기 시작합니다. 

김지미 씨는

“제가 지금까지 한 일에 대해서는 후회한 적이 한 번도 없다.”

“하지만 이번만은 후회를 했다. 왜 진작 파경을 하지 않았나 왜 11년을 끌었나”

하고 파경 후 솔직한 심경을 밝혔습니다. 


 김지미 씨는 자기 인생에 대한 깨달음도 남깁니다. 

“살아보니 그렇게 대단한 남자는 없더라 나이 많은 사람과도 어린 남자랑도 살아보니 남자는 항상 부족하고 불안한 존재더라 그리고 그녀는 나는 마누라가 필요한 사람이지 남편이 필요한 사람이 아니다” 라는 말을 훗날 남깁니다. 

그녀는 지금도 꿈을 100% 살리려면 가정에 얽매여서 이루지 못할 수 있으니 장례를 잘 선택하라라고 젊은이들에게 이야기합니다. 

몸 건강이 지금 있는 그곳에서도 멋진 모습 계속해서 보여주길 기대하며 이상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