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암아 너무 무섭고 두렵다” 85세 김동건 아나운서가 유언남기고 떠난 곳

변하지 않고 늘 한 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급변하는 방송가에서 변함없이 한 자리를 지키며 큰 사랑을 받아온 터줏대감들이 있습니다. 


터줏대감 중 한 명인 국민 mc 송해도 얼마 전  향년 95세의 나이로 별세하시며 많은 분들이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송해와 더불어 또 한 명의 터줏대감은 가요무대의 김동건입니다. 
일요일에 남자가 송해라면 월요일의 남자는 김동건이였죠.

하지만 그런 김동건에게도 비켜가지 못했던 시련이 있었습니다.
60년이 다 되어가는 긴 시간 동안 그의 아나운서 생활은 어떠했을까요.

김동건 아나운서에게 부모님은 각각 두 분씩입니다. 

친어머니는 그가 세 살 때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한국전쟁 때 납북되셨다고 합니다. 
그는 이모를 어머니로 이모부를 아버지로 알고 자랐습니다. 

실제로는 이모였던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사진 석 장을 주시면서 생모 이야기를 해주셨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 최불암을 만나 절친이 되었다고 합니다. 

최불암은 “김동건씨가 고등학교 때 인기가 좋았다. 특히 ‘하이 다이빙’을 잘했다. 수영장에 가면 늘 주목받았는데 부러웠다”고 말했습니다

“몇 달을 연습해 수영장에 갔다. 마침 그 해 미스코리아를 수영장에서 만났고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김동건씨처럼 하이 다이빙을 했다. 근데 무리하는 바람에 잘못 착지해 코피를 많이 쏟고 얼굴이 부었다”고 너스레를 떨었습니다.

한편 최불암은 김동건에 대해 “고등학교 때 주먹 좀 쓴다는 친구들과 어울리기도 했지만 깡패는 아니었다”며 “학교 명예를 지키는 일인자였다”고 말했습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아나운서에 대한 꿈을 꾸었던 김동건은 1963년 동아 방송국 시험에 지원해서, 아나운서로 입사하게 됩니다.

이렇게 시작한 김동건의 아나운서 생활이 벌써 60년이 되어 갑니다. 
그런데 이 50여 년 동안 김동권에게도 수많은 위기들이 찾아왔습니다. 
인생이 순탄치만은 않았죠.

그중 대표적인 예가 가요무대에서 퇴출된 것입니다.

가요무대는 그의 대표작이었고, 애착도 무척 컸습니다.
과연 당시에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요. 

김동건은 2003년 6월 가요 무대 마지막 무대에서도 자신의 하차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마지막 녹화를 끝난 다음에 kbs 관계자로부터 일방적인 하차 통보를 받게 됩니다. 


당시 정권이 바뀌면서 방송 프로그램 진행자도 바뀐다는 의혹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동건은 공식적으로 자신의 하차에 대하여 반발하지 않습니다. 

무려 7년이 지난 다음에야 약간의 아쉬움을 토로했을 정도죠

“내가 18년 동안이나 진행해 온 프로그램인데 하루아침에 아무런 설명도 없이 하차 통보를 받고 나니 참 당혹스럽더라고요. 그동안 18년이나 진행한 프로그램이니 최소한 시청자들에게 인사할 기회는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했어요.”

가요 무대의 주 시청층인 중장년 시청자들은 김동건의 복귀를 강력하게 요구했고 하차하고 7년 뒤 김동건은 가요무대로 돌아오게 됩니다.

김동권은 이런 크고 작은 일을 겪으면서도 엄청난 기록을 세웁니다. 

바로 현역에서 활동 중인 아나운서 중에서 최초로 데뷔 50년을 현역에서 맞은 것이죠. 

과연 어떤 성격을 가졌기에 이런 엄청난 기록을 세운 것일까요. 


“아나운서는 말로 먹고 사는 직업입니다.
그래서 허투로 말의 방송 사고를 자주 냈다면 오늘날까지 계속 할 수가 없었을 거에요
아나운서에게는 엄격한 자기 관리와 꾸준한 자기 개발이 필수입니다.”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나 자신을 졸병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오랜 기간 동안 높은 자리에 오른 적도 없었고 또 올라가보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한 평생 아나운서로 살았을 뿐입니다.”

김동건의 지인이 밝힌 한 일화에서는 그의 대쪽 같은 성격을 엿볼 수 있는데요.

과거 총선 때 후배 아나운서들이 당시 아나운서 클럽 회장이었던 김동건에게 찾아와서 이번에 국회의원에 당선된 아나운서들에게 축하패를 만들어 주자라고 제안을 했습니다.

그러자 김동건 아나운서가 “국회의원을 하다가 아나운서가 되면 축하할 일이지만 아나운서 하다가 국회의원 된 게 왜 축하할 일이냐” 라고 단번에 거절했다고 합니다.

이북이 고향이었던 김동건은 분단 이후 방송 사상 최초로 이북에 건너가 방송했던 적도 있습니다. 당시 남북 간의 갈등이 어느 수준이었는지 알 수 있는 일화가 있죠.

“분단되고 40년 만에 처음으로 북한에 갔었어요.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친한 친구에게 유언을 남기고 떠났었어요.”

“그런데 실상 북한의 간의 생각과는 달리 안전의 안심이었어요. 이북에 가게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3개월 동안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했어요. 심지어 어머니가 나중에라도 아시고 놀라실까 봐 어머니 방에 있는 tv까지 치웠죠”

김동권은 아나운서라는 직업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과연 본인에게 이해심이 많고 인정도 많고 의리도 있고 신의도 있어 시청하는 사람들 앞에서 떳떳하게 방송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사실 인간성이 나쁜 사람은 방송을 하게 되면 그런 성격이 나와요. 게스트로 나온 사람들을 깔보고 무안주고 또 말하는 것도 딱딱 끊어버리고 독선적으로 방송을 진행하기 쉽죠. 사실 그렇게 인간성이 나쁜 사람은 진정한 방송인이 될 수 없습니다.”

 
후배 아나운서들의 롤모델 역할을 하며 80이 넘은 나이에도 현역 최고참 아나운서로서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는 김동건의 인생과 가치관을 들어보았습니다.


앞으로도 건강한 모습으로 더 오래 오래 월요일의 남자로 시청자들과 함께하길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