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필부터 싸이까지” 대한민국 최고의 가수들이 모두 참석한 한 천재의 장례식


“숨을 못 쉬겠어…”

이 한 마디를 마지막으로 한국 가요계 불세출의 천재 신해철의 심장은 멈췄습니다.

사망 이후 정치인부터 전 밴드멤버들을 포함한 선후배 및 동료 뮤지션, 방송인, 작가 등 각계각층에서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의 추모 물결이 이어졌습니다.

대한민국 가요계의 거장이라 할 수 있는 조용필 또한 빈소를 찾아 “이렇게 훌륭한 뮤지션은 없었다”는 말로 신해철의 사망을 애도했을 정도였죠.

신해철은 록음악의 대중화를 이끈 대표적인 싱어송 라이터입니다.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는 음악적 변신을 통해 새로운 사운드를 들려주면서 사회성 짙은 가사로 의식 있는 뮤지션이라는 찬사도 받았죠.

하지만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많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던 ‘마왕’ 신해철, 오늘은 그의 삶을 되돌아보며 고인을 기리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음악 인생에 있어서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사람은 누구냐는 질문을 받을 때면 신해철은 항상 이렇게 답을 하곤 했습니다. 

“부활의 김태원 형은 직접적인 제 진짜 스승이에요.  뮤지션이 뭔지 알려준 형이니까요. 음악을 대하는 자세와 태도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죠.”

‘the end’라는 팀으로 공연을 다니던 김태원에게 “어느 날 뭐 도와드릴 거 없을까요?” 라고 하며 고등학생 두 명이 찾아왔고 그 중 한 명이 고등학교 1학년에 신해철이었습니다.


이후 팬클럽 부회장을 자처한 그는 부활의 연습이 있거나 공연이 있으면 장비도 나르고 이런저런 잡일을 도우는 등 고등학생 시절 3년 내내 부활의 연습실을 찾아와 김태원에게 기타를 배우고 음악적 자문을 구했죠.

이에 김태훈 또한 부활 콘서트의 오프닝 공연을 아마추어였던 신해철의 밴드에게 맡긴 적이 있었을 정도로 그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후 1988년 대학가요제에 참가한 한 신해철은 “그대에게”를 통해 대상에 등극했습니다.

어찌나 대단했던지 당시 심사위원장이던 조용필은 전주만 듣고 대상임을 직감했다고 하는데요. 


그렇게 신해철은 해성같이 등장했고 이후 무한궤도 1집을 발표하며 젊은이들의 우상으로 거듭났습니다. 


무한궤도가 해체된 후 1990년 첫 솔로 앨범을 발표한 그는 당시 빼어난 외모와 신선한 음악으로 젊은층의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슬픈 표정하지 말아요’, ‘안녕’ 등 히트곡을 쏟아내며 새로운 뮤지션의 등장을 알린 그는 이듬해 발표한 ‘마이셀프’ 앨범부터 본격적인 ‘아티스트’의 길을 걸었습니다.

솔로 뮤지션으로서 상당한 성공을 거둔 신해철은 1992년 록밴드 ‘넥스트’를 결성합니다.

락밴드지만 랩, 테크노 하우스, 디스코 등 다양한 장르와 결합시키며 록을 새롭게 해석했고,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후 넥스트는 1997년 해체되기까지 1~4집을 발표하며 1990년대를 대표하는 록그룹으로 로큰롤 음악의 대중화를 선도했습니다.

밴드는 ‘도시인’, ‘날아라 병아리’, ‘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하여’, ‘먼훗날 언젠가’, ‘해에게서 소년에게’, ‘히어 아이 스탠드 포 유’ 등 숱한 명곡을 쏟아내며 록음악 팬층을 넓혔습니다.

하지만 1997년 “더 이상 올라갈 자리가 없다”며 밴드 해체를 선언한 그는 이후 영국으로 건너가 음악과 프로듀싱을 공부했다. 그는 유학을 전후해서는 ‘크롬’, ‘모노크롬’,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이름으로 팀 또는 개인 활동을 벌이며 전자 음악 사운드를 접목한 새로운 스타일의 음악을 선보였습니다.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그는 다시 꾸린 넥스트와 솔로 뮤지션으로서 앨범을 꾸준히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이전과 같은 대중성은 유지하지 못했지만 음악적 스펙트럼을 넓힌 시기로 평가됩니다.

신해철은 수많은 후배 가수들의 정신적 지지로도 유명했는데요. 

그는 프로듀서로 후배 가수와 작업을 하면 현재 최대의 능력치를 담아내기보다는 그 가수가 먼 미래까지 가지고 가야 할 지향점을 끌어내고자 노력을 했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가수 엄정화인데요.
 
그녀의 소속사 측에서는 당시 대세였던 청순가련 컨셉트의 여가수로 데뷔 앨범을 준비했지만 신해철이 소속사를 설득하여 기존 계획을 모두 뒤엎어버리고 본인이 작곡 작사한 곡 눈동자를 베이스로 섹시한 이미지를 전면에 담아 엄정화를 대비시켰습니다.

 그는 이런 프로듀스의 능력뿐만 아니라 작사 작곡 편곡에 수많은 악기 연주는 물론 프로듀싱과 엔지니어링 및 곡 작업을 위해 컴퓨터 프로그램 개발까지 한 진짜 천재였습니다.


또한 오늘날 케이팝의 기반이 되는 미디 음악의 선구자라고도 할 수 있으며 국내 최초로 영어 랩을 사용하는 등 늘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려 했고 혁신적인 것을 시도하는 데 두려움이 없었죠. 

이처럼 신해철은 기존의 히트 공식에서 벗어나 늘 새로운 트렌드의 곡을 만들어냈고 여기에 깊은 철학적 사고가 담긴 노랫말을 담아내며 많은 이들에게 인생의 조언자가 되어주기도 하는 등 음악으로 지금까지도 큰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