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를 너무 못해 대사가 없었던 이정재가 최고의 배우가 되기까지

어린 시절 이정재는 매우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쪽은 의사 집안이었고 어머니 쪽은 지방에서 양조장 사업을 크게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 그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그의 나이가 9살이 되던 해 어린이 형제는 인생의 첫 번째 고비를 만나게 됩니다.

의사였던 그의 할아버지가 국회의원 선거에 네 번이나 연달아 낙선하며 가세가 기울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그는 가족과 함께 화장실이 밖에 있는 매우 좁은 단칸방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어린 이정재도 가난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그렇게 그는 친구 집에 놀러 갈 때마다 발가락을 접어 구멍난 양말을 숨기며 천천히 가난에 익숙해졌습니다.

한편 이정재에게는 자폐를 가지고 태어난 형이 있습니다.

항상 맞벌이를 하셨던 부모님 때문에 그는 매번 집안일을 도와야 했고 형을 돌보는 것도 자연스레 그의 몫이었습니다.

동네 친구들이 아픈 형을 가졌다고 글을 놀렸지만 그는 학교가 끝나면 묵묵히 집에 돌아와 형부터 챙겼습니다. 

어려운 가정 환경 속에서 가족 이론이 아프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지만 그는 이 모든 것을 덤덤히 받아들였습니다. 

힐링 캠프에서 그는 어린 시절의 경험에 대해 난 단 한 번도 형을 인생의 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 형이기에 나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라고 말해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안겨주기도 했습니다.




그를 괴롭히던 가난은 커서도 그를 괴롭혔습니다 고등학교 때 등록금을 내지 못해 그는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배를 맞았습니다. 

돈이 없다는 이유로 공개적으로 매를 맞아야 했던 그는 빨리 돈을 벌어야겠다고 굳게 다짐하게 됩니다. 

한편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던 그는 미대에 진학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의 미술 실력이 꽤 좋은 편이었기에 당시 고등학교 미술 선생님의 도움으로 그는 미술 입시 학원을 무료로 다닐 수 있게 됬으나 또래 친구들보다 늦게 시작한 미술이었기에 실력이 많이 부족해 결국 그의 미대 입학은 실패하게 됩니다.

대학 진학 실패 이후에도 그는 좌절하지 않고 계속해서 나아갔습니다. 

그는 밤에는 취업 준비를 위해 인테리어 학원에 다니고 낮에는 학비를 벌기 위해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됩니다



20대의 이정재는 181 큰 키에 잘생긴 외모로 카페에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습니다. 

카페 사장은 그의 눈에 띄는 외모를 눈여겨봤고 당시 연예 기획사에서 일하던 친구에게 이정재를 소개해 주게 됩니다. 

며칠 후 사장님의 친구는 촬영 예정이었던 잡지 화보의 남자 모델이 개인 사정으로 촬영을 못하게 되었고 이에 급히 이정재에게 연락해 화보 촬영을 도와달라고 부탁하게 됩니다.

그렇게 그는 상상도 못해본 화보 촬영이라는 것을 하게 되었고 이후 이 화보로 인해 그의 인생은 180도 바뀌어버립니다. 

그는 당시 90년대 톱모대와 박영선과 화보를 찍게 되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이 화보가 엄청난 성공을 거두게 되고 수많은 패션 회사에서 그를 찾게 된 것입니다.

 
모델 일의 하루 일급이 20만 원이었고 당시 카페에서 받았던 월급이 38만 원이었기 때문에 그는 곧바로 일을 그만두고 모델로서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렇게 다양한 화보를 찍던 중 그는 어느 날 tv 광고를 하나 찍게 되는데 이 광고 하나가 또다시 그의 운명을 바꾸게 됩니다. 

바로 크런키 초콜릿 광고였는데 이 광고가 대박이 나면서 그의 인지도가 급속도로 올라가며 곧바로 드라마와 영화까지 찍게 된 것입니다. 

첫 번째 광고를 찍고 몇 달도 되지 않아 그는 공룡 선생이라는 드라마를 찍게 되었고 바로 다음 해에는 젊은 남자라는 첫 영화에 무려 주연 배우로 참여하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영화는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하진 못했지만 그는 이 영화를 통해 확실한 존재감을 내비치게 됩니다. 

그는 이 영화로 한국 내 유명 영화제 4개에서 신인 연기상 4개를 모두 독차지하는 성과를 거두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의 첫 번째 전성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첫 영화부터 대성공을 거둔 이정재는 바로 다음 해 최고 시청률 65%를 달성했던 sbs 고민 드라마 모래시계에 캐스팅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인기는 많았지만 그의 밤에 연기를 시작한 지 1년도 되지 않았기에 그의 연기가 워낙 부족했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의 연기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고 결국 감독은 그에 대해서 대부분을 삭제해 버리게 됩니다. 

그런데 이게 오히려 그에게는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게 됩니다. 

드라마에서 이정재는 돈이나 명예를 쫓지 않고 사랑하는 여자를 말없이 바라만 봐야 하는 그녀의 보디가드 역할을 맡았습니다. 

한편 연기를 못해 그의 대사가 없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 없이 사랑하는 여자를 묵묵히 바라보는 그의 모습은 되려 신비로움과 애틋함을 만들어내 엄청난 여성 팬들이 그를 더욱 사랑하게 되는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이로 인해 그는 대사가 별로 없었음에도 주연 배우였던 최민숙보다 더욱 큰 인기를 누리게 되고 한동안 대한민국 여자들의 이상형 1위로 꼽히기도 했습니다. 

그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당시 그는 데뷔한 지 1년이 조금 넘은 신인 배우였음에도 불구하고 드라마 중 그를 죽이지 말라는 편지가 sbs에 쇄도할 정도였습니다. 

여담이지만 그는 블랙핑크의 제니와도 연관이 있습니다.

모래시계 방영 당시 제니의 어머니는 아들을 낳게 되면 이정재의 극중 이름이었던 제이를 아이 이름으로 지으려 했을 정도로 이정재의 엄청난 팬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아닌 딸을 낳아 제이와 바람이 비슷한 제니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 것입니다. 

택시 기사를 꿈꿨던 작은 아이는 데뷔하고 1년이 조금 넘은 짧은 시간 만에 대한민국 톱스타가 되었지만 이 엄청난 인기는 되려 그에게 독이 되었습니다. 

그에게 쏟아지는 너무나 큰 사랑과 관심이 23살의 이정재에게 너무 부담스러웠던 것입니다. 

또한 당시에 그가 속해 있었던 소속사도 문제가 많았습니다. 그는 당시 소속사가 두 곳이었는데 그의 수입 50%를 한 소속사에서 가져가고 나머지 하나의 소속사가 수입 30%를 가져가는 불합리한 구조였습니다.


이 때문에 당시 그는 잠도 못 자고 매일같이 일만 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돈을 벌지 못했습니다. 

결국 쉴 새 없이 이어지는 혹독한 스케줄로 인해서 그는 사이에에 갔다가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는 도중 쓰러지게 됩니다. 

이정재는 이 모든 것이 너무 힘들었고 그렇게 그는 23살의 나이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군대에 입대하게 됩니다. 

모두가 가기 싫어하는 군대지만 몸과 마음이 지친 그에게 있어서는 군대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도피처였던 것입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90년대 한국에는 평발로 인해 현역이 아닌 방위로 군 생활을 할 수 있는 제도가 있었고 이로 인해 평발이었던 이정재는 집에서 출퇴근을 하는 방위로 군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이때 군대 동기로 유재석을 만나게 됩니다. 

이후 인터뷰에서 이정재는 스스로도 “유재석이 나를 업어 키웠다”라고 말할 정도로 유재석은 군 시절 그를 많이 챙겨주었습니다. 

당시 모레시계로 엄청난 인기를 누리던 이정재는 매일같이 술 약속이 있었고 이 때문에 숙지로 힘들어 하던 그의 출근을 유재석이 매일같이 도와준 것입니다.

군 생활을 마친 그는 본격적으로 연기 생활을 다시 시작했지만 그는 수억 원의 빚과 함께 인생에서 가장 큰 고비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가 전역한 이후 당시 소속사의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인해 촬영했었던 cf와 영화의 출연료를 받지 못한 채 회사가 망해버린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그때 당시 그의 어머니가 안정적인 수익을 위해 몇 개의 건물 매매 계약을 진행 중이었고 계약금도 모두 지불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한국에서는 건물을 매매할 때 계약금을 주고 이후 잔금을 지불함으로써 건물의 소유권이 양도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만약 계약금 이후 잔금이 지불되지 않으면 그전에 계약금은 모두 위약금으로서 건물 판매자에게 반환되었습니다. 

당시 그는 받기로 했던 출연료들로 건물들의 잔금을 지불하려 했는데 이 모든 것이 소속사의 부도와 함께 막혀버리는 바람에 그는 그동안 계약했었던 건물들은 물론 모든 계약금까지 하루아침에 잃어버리게 됩니다.


문제는 또 있었습니다. 출연료도 못 받은 것이 억울한데 망해버린 소속사의 수익 내역이 모두 그에게 등록이 되어 있어 이정재는 이전 소속사의 세금까지 모두 내야 하는 어이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그는 하루아침만의 전 재산을 잃은 것도 모자라 망해버린 소속사의 세금으로 인해 수억 원대의 빚까지 떠안게 됩니다. 

심지어 그의 어머니는 그 상황을 해결해 보겠다며 불법 사채까지 쓰는 바람에 그의 빛은 더욱 빠른 속도로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이 무너지는 상황에서조차 아무것도 알 수 없었던 이정재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이후 인터뷰에서 그는 이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모든 돈이 다 사라졌다는 게 믿기지 않았습니다. 

사라진 돈만큼 빚이 생겼다는 것도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한 사람의 도움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게 되는데 이는 바로 강우석 감독이었습니다.


이정재의 지인이 강 감독을 만나 그의 사정을 설명하고 그에게 기회를 한 번 주지 않겠냐고 부탁을 한 것입니다. 

그의 사정을 얻게 된 강 감독은 그와 영화 3개를 계약함과 동시에 출연료를 모두 선지급해줍니다. 

이때 그는 받은 출연료로 모든 빚을 청산하고 영화 세계를 촬영하게 됐지만 안타깝게도 앞에 두 영화들은 그렇게 큰 주목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마지막 영화 선물에서 그는 병에 걸려 죽어가는 부인을 둔 무명의 코미디언의 슬픈 이야기를 그려내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눈물과 감동을 안겨주며 적지 않은 흥행을 이뤄냅니다. 

그리고 이쯤 이정재는 자신을 톱 배우의 반열에 올려준 작품 “태양은 없다”를 찍게 됩니다. 

이 영화에서 이정재는 혼란스럽지만 아름다운 청춘의 모습을 솔직히 그려냈습니다. 

이 영화는 여러모로 그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캐릭터를 고정해 두기보다는 배우들이 스스로 캐릭터에 색을 부여할 수 있도록 하는 감독의 독특한 작업 방식 덕분에 그는 영화를 함께 만들

어 나가는 재미를 느끼게 된 것입니다. 

전역 후 소속사의 부도와 연기 생활에서 방황을 하던 그는 이때 처음으로 연기가 즐겁다고 느끼게 됩니다. 

즐겁게 촬영했던 만큼 그의 연기는 자연스러웠고 훌륭한 연기 덕분에 그는 28살의 젊은 나이에 한국 3대 영화제 중 하나인 청룡영화제에서 남우 주연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또 다른 시련을 마주하게 됩니다. 

배우에게 있어서 가장 영광스러운 상 남우 주연상을 받고 난 이후 무려 11년 동안 긴 슬럼프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는 영화는 물론이고 드라마까지 10개가 넘는 작품에 출연했지만 모두 저조한 성적을 보였으며 심지어 시간이 지나서는 퇴물이라는 말까지 듣게 됩니다. 

한편 그의 슬럼프가 길어지면서 그는 영화보다는 다른 사업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며 요식업 부동산 및 다양한 사업을 시도했지만 모두 잘 되지 않았습니다.

이때의 선택으로 인해 그는 사업도 그리고 본업이었던 연기에도 집중하지 못한 채 인생의 내리막을 걷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 날 그는 한 식당에 밥을 먹으러 갔다가 주인집 사장의 말 한 마디에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요즘 왜 이렇게 tv에 안 나와요 tv에서 좀 보고 싶어요. “

이 말을 듣고서 그는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이정재는 본인에게 아직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감동을 받아 작품 활동을 활발히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심기일전 후 돌아온 작품이 바로 영화 “하녀”였습니다.

이 영화는 1960년에 개봉한 명작을 리메이크한 스릴러 영화로 탄탄한 줄거리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 덕분에 칸 영화제까지 진출하며 이정재

의 이름을 다시 알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2012년의 영화 “도둑들”에서 도둑들의 대작 역할을 연기하며 총 관객이 1200만 명을 돌파해 처음으로 천만 배우 타이틀을 얻게 됩니다. 

곧바로 다음에 그는 영화 “신세계”를 통해 다시 한 번 천만 관객을 돌파하며 이정재라는 배우의 부활을 사람들에게 확실히 각인시켜줍니다.

영화에서 그는 경찰과 조폭 사이에서 활동하는 이중 스파이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함과 동시에 내적 갈등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캐릭터의 범인을 잘 표현해냈습니다. 

그리고 몇 개월 후 그는 영화 “관상”을 통해 한국 역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수양대군을 연기하며 또다시 대한민국 영화계에 큰 획을 그었습니다. 

과거 한국 역사에서 수양대군은 실제로도 조카를 포함해 수많은 신하들을 죽이고 왕이 되어 피해 군주라는 평가를 받은 실제 인물입니다.

그렇게 그는 처음 이 역할 제안을 받았을 때 자신보다 더욱 강한 이미지의 배우가 적합해 보여 출연을 망설였지만 감독의 끈질긴 설득으로 결국 출연을 결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영화 속 1위의 상이라 묘사되는 수양대군을 표현하기 위해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늑대와 1위를 끊임없이 관찰하며 짐승과도 같은 잔인한 왕 수양을 연계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화려한 의상 파격적인 비주얼과 웅장한 음악으로 인해 그는 압도적인 존재감을 뽐내며 그가 연기한 수양대군의 등장 신은 한국 영화 중 최고의 등장 신이라는 평가를 받게 됩니다. 

관상에서의 성공 이후에도 그의 성공세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후 그는 암살이라는 영화에서 한국의 일제강점기 시절 한국을 배신한 독립군의 불안하고 날카로운 심리를 잘 표현해냈습니다. 

당시 불안한 상태의 인물 연기를 위해 그는 48시간 동안 잠을 자지 않은 채 무수면 상태로 촬영을 진행했고 60살이 넘는 노인의 연기를 위해 15kg을 감량하기도 했습니다.

이후에도 그는 영화 “신과 함께 1,2″를 통해 세 번째 그리고 네 번째 천만 영화를 만들어내며 다양한 작품에서 활동하다가 2021년 드디어 이 작품을 찍게 됩니다. 

바로 오징어 게임이었습니다. 이정재는 오징어 게임의 시나리오를 받자마자 집에 들어가서 쉬지도 않고 하룻밤 사이에 모두 읽어버립니다. 

그는 오징어 게임에서 지금까지 연기했던 멋있고 카리스마 있는 모습이 아닌 도박 중독의 빚까지 있으면서 늙은 어머니에게 얹혀 사는 48세의 기운 역할을 연기했습니다.

드라마 속 참신한 게임들과 다양한 인물들의 개성 있는 연기를 통해 오징어 게임은 대중의 관심도 대중성 등에서 미국 드라마 역사상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왕자의 게임을 넘어섰으며 넷플릭스에서는 가장 많은 시청자 수를 기록한 드라마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미 한국에서 최상급 배우였지만 오징어 게임의 대흥행으로 세계적 인지도를 얻게 됩니다. 

이정재의 인생은 어려움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이러한 과거에 대해서 밝히는 것을 싫어한다며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세상 살면서 그 정도도 안 힘들어 본 사람은 없다. 유독 나만 세상의 모든 짐을 떠안은 것처럼 슬픈 이야기들로 동정 여론을 만들고 싶지 않다. 누구나 힘든 일은 겪기 마련이고 그 이야기는 지극히 주관적이다.”

그러나 그는 큰 어려움과 슬럼프를 겪었을 때만큼은 이렇게 해결해 왔다고 합니다. 

“정말 힘들 때가 되면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 하늘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나는 속으로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곧 끝날 것이다 라고 속으로 몇 번이고 반복했다.”

끝없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나아갔던 이정재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나아갈 것입니다.